2008년 10월호

전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 11년만의 폭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자진월북 아닌 납치…공작원이 쓴 가짜 가족편지로 유인”

  • 장철현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요원

    입력2008-10-07 16: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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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장엽 망명에 진노한 김정일, “버금가는 인사 납치해오라” 특명
    • 1997년 3월, 통전부·대외연락부·작전부·35호실 긴급 합동회의
    • “월남자 중 북한에 가족 있는 인사를 찾아라”…최종후보는 3명
    • 유인은 통전부, 납치는 35호실, 대외연락부, 작전부 공동 진행
    • 통전부 전문요원이 쓴 편지, 해외 공작선 통해 오익제에게 전달
    • “모녀가 베이징에 왔다”… “단둥에서 기다린다”… “열차에서 못 내린다”
    • 감격의 상봉 순간 국경 넘은 기차… 평양 문수초대소에 사실상 감금
    • 관광지 안내원에 돈 주며 “나 납치됐다고 외국인에게 알려달라”
    • 납치 책임자 안경호 1급 훈장 수여, 편지 대필한 통전부 요원 국장 승진


    나는 북한 통일전선사업부(한국에서는 통전부 혹은 통일전선부라고 하는데 고유명칭은 통일전선사업부가 맞다)에서 근무하다 2004년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탈북자다. 그리고 나는 오늘 서울에 온 지 4년 만에 내가 그 일부에 관여했고 전 과정을 지켜본 오익제씨 납치사건을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사실을 공개하는 데 4년의 시간이 걸린 것은, 그동안 국책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특수신분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위반되는 어떤 증언도 공개적으로 할 수 없도록 통제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북한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몇 차례 북한에서 일어난 대형사건을 익명의 육필수기 형식으로 ‘신동아’ 등에 기고한 바 있고, 외국 언론과의 익명 인터뷰를 통해 북한 정권의 권력구조나 실상에 대해 증언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노무현 정부 동안 공식적인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한국에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오익제씨가 실제로는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던 것은, 이 사건의 성격이 익명으로 전달할 경우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내 증언의 신뢰도를 증명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실명으로 증언할 그날을 기다려온 것이다.

    한국의 많은 사람, 특히 일부 북한 전문가들까지 북한의 통전부를 남한의 통일부와 비교하곤 한다. 과거의 통일부와 달리 현재의 통일부는 남북 간의 대화와 교류를 전담하는 공식 채널로 자리매김한 상황이다. 그러나 내가 일했던 북한의 통전부는 ‘통일외교’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시스템을 철두철미하게 적화통일 차원에서 역이용하는 이중적인 기능의 부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나 교류도 대남공작의 연장선에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대남공작 부서다.



    특히 통전부는 북한에서 유일하게 체계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거대 남한 연구 전문조직과 기술적인 심리전 부서들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토대해 대화와 협상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적화정책의 두뇌부서이기도 하다. 또한 남한 내 친북·좌익 조직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반을 통해 남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실제로 남한에 공작원을 침투시키는 방식에 의존하는 35호실이나 대외연락부가 못하는 일을, 통전부는 남한 내의 친북좌익들을 동원해 때로는 공격적으로 수행하기도 한다.

    북한은 독재국가이므로 대내적으로 강도 높은 통제를 가하고 대외적으로 일체감을 과시할 수 있지만, 남한은 다르다. 남한 정부는 야당과 시민단체, 언론과 여론에 항상 노출돼 있고 평가받는다. 통전부는 이 점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내가 오익제 납치사건을 말하는 이유 또한 통일외교를 명목으로 남북관계의 전면에 나서서 노골적으로 혹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적화 목적을 실행하는 통전부의 실체를 정확히 알리기 위해서다.

    한밤의 긴급회동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탈북한 1997년은 북한 전역 여기저기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당시 인민들은 죽은 김일성의 정치와 비교하며 김정일 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북한 정권은 수백만이 굶어 죽은 원인을 ‘미 제국주의의 경제압살정책’과 ‘자연재해’ 탓으로 돌렸지만, 북한식대로 표현한다면 별로 ‘교양가치’가 없었다.

    들끓는 민심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정권은 선군정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를 내세워 군을 강조한 폭압정치를 가속화했고, 숙청의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았다. 황장엽 비서의 월남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는 북한에 원자폭탄을 던져놓은 것만큼이나 큰 충격을 주었다.

    황 비서의 탈북은 처음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소문으로 돌았고 국가보위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를 색출한다며 이 사건을 은폐하려 시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황 비서가 아직 한국에 입국하기 전으로 필리핀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지시대로 도로 잡아오던가 현장에서 사살하면 사건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타산에서였다.

    황장엽 비서에게 테러를 가하기 위해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는 물론 35호실, 대외연락부, 통일전선사업부, 작전부 같은 대남공작부서들, 심지어 해외 외교공관까지 총동원됐지만 현장에서 들려온 소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테러리스트들과 관련 조직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 김정일은 그날 밤 당 비서들과 각 부 부장 및 제1부부장들과의 긴급 회동을 열라고 지시했다. 황장엽 비서의 탈북을 알고 있던 고위간부들은 긴장된 얼굴로 목란관에 모였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자면, 나이가 많은 고위간부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오랫동안 황 비서와 당 사업을 함께 했기 때문에 불안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

    목란관에 들어온 김정일은 한동안 침묵하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불안한 분위기가 더 가중됐음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김정일이 내뱉은 첫 말은 의외였다.

    “오늘 내가 여기 나오기 전까지 수령님 초상화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소. (김정일은 대내행사 때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수령님께 물어보았다구, 그 황장엽이가 맞냐고. 우리와 함께 평생을 함께한 그 황장엽이가 맞냐고. 내가 오늘처럼 힘들고 괴로워본 적이 없소.”

    김정일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본 간부들 중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럴 때는 함께 울어주는 것이 충성인 법이어서, 모든 간부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분위기가 격해지자 김정일은 소리쳤다.

    “여기 또 누가 황장엽이 같은 놈이 있어? 날 배신하고 갈 테면 가란 말이야, 가라고!”

    그때 대남담당 비서인 김용순이 벌떡 일어나며 눈물로 외쳤다.

    “장군님, 우린 장군님과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우린 죽어도 장군님 무릎을 베고 죽겠습니다.”

    그러자 모든 간부가 입을 모아 “장군님, 우리를 믿어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세 명의 후보

    며칠 후 내가 일하고 있던 통일전선사업부 등 관계부서에는 관련된 논설을 제작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곧이어 북한 ‘노동신문’은 “혁명의 배신자” “갈 테면 가라, 우리는 사회주의를 지킨다” 같은 과거에 없던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듯 황장엽 비서의 탈북은 수십년 동안 북한을 지배했던 사회주의혁명의 일관주의 정서를 배신과 충성이라는 이중구조로 부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의 모든 선전물은 장군님 무릎을 베고 죽겠다는 자결충성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군(軍)은 자폭정신, 민(民)은 자결정신, 심지어 학생들과 어린이들은 총폭탄, 총알서약을 하도록 전 사회적인 운동을 벌이게 됐다.

    황장엽 비서의 한국행이 거의 확실시되고 더욱이 테러는 불가능하다는 현지보고를 받은 1997년 3월 중순경 김정일은 대외연락부 부장 강관주, 작전부장 오극렬, 통일전선사업부장 임동옥, 35호실 부장 권희경을 불러 ‘황장엽 대응공작’ 차원에서 그에 버금가는 남한 인사를 월북시키거나 안 되면 납치라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부서 특수성 따위는 고려치 말고 호상 연대하여 이번 공작을 반드시 성공시키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중국지도부에 대해서도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오랫동안 격분을 터뜨렸다고 한다. 35호실에 대중(對中) 첩보 사업을 진행하는 데 대한 지시도 이때 내려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대동강구역 의암초대소(전 평양시 사동구역 국제관계대학 뒤에 위치하는 초대소 지역으로 이곳에는 작전부장, 대외연락부장, 통전부장 초대소가 밀집돼 있다)에서 밤낮으로 대남 공작부서장들의 연합회의가 진행됐다.

    일단 월북 혹은 납치 인물의 선정은 남한 내 사정에 밝고 인물 리스트가 잘 정리된 통전부가 맡기로 했다. 1과와 2과로 분류된 통전부 교류과에 즉각 이 과업이 떨어졌다. 1과는 친북 및 좌익단체를 관리하는 과로서 여기에는 전교조, 민주노총, 범민련, 통일연대 담당조직이 있다(이전에 한총련을 담당했던 조직은 2001년 대학생들을 과거처럼 이념화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폐쇄됐다). 1과는 남한 내 단체들을 직접 관리하는 과로서 어느 부서보다도 남한 사정에 정통했고 연결이 잘 돼 있었다.

    2과는 종교 담당과다. 북한의 기독교, 불교, 천주교, 천도교, 사회민주당으로 위장된 1~5국으로 구성된 이 과는 이른바 남한과의 종교 교류를 내걸고 있다. 2과 역시 이러한 채널을 통해 남한에 대해 상당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고, 내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한편 평양 제2백화점 옆 간판도 없는 건물에 있는 남조선문제연구소도 인물 선정에 합세했다. 통전부 산하인 이 연구소는 남한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문화 연구와 분석, 예측 대책보고서를 생산하는 연구소로 인물분석 및 관리는 기본이다.

    통전부는 납치 의혹을 피해가며 자진 월북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월남자 출신이거나 최소한 북한에 연고자가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물선정 범위가 과거 1950~60년대 월남자들로 좁혀지자 성향분석에 들어갔다. 좌익 성향의 인사를 월북시킬 경우 남한 정국에 주는 파급 효과는 클 수 없었다. 반면 우익성향의 인사들은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통전부는 종교계가 시간적으로 보나 가능성으로 보나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편으로는 과거 북한과 연계가 있던 사람들, 혹은 통전부가 북한 연고자들을 통해 공작 차원에서 접근했던 인물 리스트 중에서도 선별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오익제와 다른 두 사람(이들에 대해서는 실명을 밝히지 않기로 한다)으로 최종 결론에 도달했다. 통전부가 오익제를 지목한 근본적인 이유는, 류미영 천도교 청우당위원장이 1993년 10월 서울-평양 교환방문 및 동학혁명 100주년기념행사 공동주최 협의를 위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오익제에게 북한 평남 성천에 있는 처와 딸의 안부를 전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러한 공작은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현재 평양대극장 뒤 조평통 건물 안에 평양주재 한민족민주전선 대표부와 함께 들어 있다)의 주 업무였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월북자들로 구성되어 남한에 있는 연고자들에게 편지를 발송하거나 방송심리전, 직접접촉 등을 통해 인물을 포섭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교류라는 공식 채널을 통해서도 인물 포섭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통전부는 류미영에게 오익제의 심리정서를 타진하는 차원에서 성천에 있는 본처와 딸의 소식을 알려주게 했던 것이다.

    당시 류미영의 전갈을 받은 오익제는 굉장히 감성적인 반응을 보였고, 통전부는 이 점을 중시해 그를 공작 차원의 포섭대상 명단에 이미 올린 상태였다. 오익제 외 두 명을 월북시키거나 납치하겠다는 전술 대책안이 김정일에게 보고됐다. 김정일은 세 명으로 분산시키지 말고 한 명을 분명하게 선택해 실수 없이 끝내라고 지시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황장엽 탈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 하필 강냉이 밭에서…”

    공작대상을 한 명으로 단일화하라는 김정일의 지시 이후 35호실과 대외연락부, 통전부는 세 명을 놓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35호실과 대외연락부는 오익제가 아닌 사람을 고집했다. 현직에 있고 해외 유인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오익제의 경우 이미 공식 직함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떨어지고, 더욱이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연계돼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납북 이후 그 피해가 대선을 앞두고 있는 김대중 총재에게 돌아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전선사업부 제1부부장 임동옥은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한 김정일의 지시사항에 따르자면 가장 적합한 대상은 오익제라고 고집했고, 결국 그의 의견이 관철됐다.

    선결조건은 우선 오익제를 해외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통전부가 담당하기로 해 월북 위장까지 통전부가 맡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납치 실행은 35호실, 대외연락부, 작전부가 담당하기로 했다. 임동옥은 즉시 조국평화통일서기국 안경호 국장을 실무 책임자로 임명했다. 한편 35호실과 대외연락부는 미국과 일본, 중국, 서울 현지에 있는 공작선을 어떤 방법으로 오익제에게 집중시킬지, 납치 의혹을 피할 수 있는 위장형태와 루트 확보를 위한 전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협의에 돌입했다.

    구체적인 전술안을 보고 받은 김정일은 그 첫 페이지에 “이번 기회에 당 대남공작 부서장들의 능력을 검증하겠다”는 친필사인을 했다. 그 압박감이 얼마나 컸으면 오익제 납치공작 기간에 대남공작 부서장들은 퇴근 없이 의암초대소에서 숙식하며 공작을 지휘했다. 조국평화통일서기국 국장 안경호는 조평통과 각 연락소 내의 우수인력들로 실무진을 구성하고 김정일에게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결의문까지 작성해 다른 부서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오익제를 유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안경호는 사진과 편지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직원들을 평남 성천에 보내 오익제씨 본처와 딸, 노모의 사진을 찍어오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도 있다. 오익제 본처와 딸은 월남자 연고자들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최악의 서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자고 해도 변변한 옷이 없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조평통 요원들은 56연락소에서 일본 중고 옷을 준비해 갔다. 56연락소의 상급부서는 통전부 56과였고, 56과는 재일조총련 담당과로서 조총련과 함께 조총련기지를 이용한 외화벌이 회사들도 가지고 있다. 당시 북한에선 중고상품 수입을 통전부 56과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조평통 직원들은 일본에 있는 통전부 산하의 강남무역회사에서 가져온 중고 옷들을 들고 평남 성천으로 갔다. 중고 옷 준비까지는 완벽했지만 사진 배경이 문제였다. 조평통 요원들이 가져온 사진에 대해 임동옥은 훗날 나와의 사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진 찍을 곳이 없어서 하필 시골냄새가 나는 강냉이 밭을 배경으로 찍어 온 것이었다. 내가 그 문제를 지적하며 화를 냈다. 1분1초가 아까운 때에 다시 사진을 찍어야 했다.”

    북한에는 도로가 엉망이어서 한번 출장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조평통 직원들은 임동옥이 내준 승용차를 타고 다시 성천으로 가서 회칠을 한 흰 아파트 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돌아왔다. 가지고 갔던 중고 옷들도 다시 벗겨 올 만큼 월남자 가족에 대해 당시 직원들은 굉장히 적대적인 심리를 갖고 있었다.

    사진이 완성되자 안경호는 평양시 중구역 련화동에 있는 101연락소에 오익제 본처와 딸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도록 지시했다. 101연락소는 대남 문화연락소로, 남한 작가나 시인 명의로 신문 영상 소설 시집 등을 위장 제작하여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진영과 남한 대학가에 침투시키는 것을 주 업무로 했다.

    오익제에게 보낼 편지는 정치 이념적인 권유보다는 감성적인 유도가 우선이라는 판단이 떨어졌고, 101연락소 5국 19부(시문학 부서)의 박철이 작성을 담당했다.

    오익제 부인의 명의로 된 편지의 주요 내용은 ‘단 한 번도 재가하지 않고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노모를 모시고 남편을 기다린 한 여성의 기나긴 수십 년 세월’에 관한 이야기였다. 딸 명의로 만들어진 편지는 ‘그동안 어머니가 과부의 설움과 눈물을 씹으며 할머니를 모시고 홀로 고생한 이야기’와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란 자식의 비극적인 심정’을 토로했다. 특히 오익제 부인 명의의 편지에 담긴 노모의 이야기에는 ‘죽기 전 한 번이라도 아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절절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몇 번의 검증과 반복을 거친 후 통전부가 편지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편지의 내용은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달랐다. 우선 오익제씨의 부인은 그동안 두 번 결혼했고, 딸 역시 그 때문에 성을 두 차례 바꿔야 했다. 또한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받은 박대는 편지에 단 한 글자도 반영되지 않았다.

    1997년 5월경, 통전부의 편지글은 대외연락부 공작선을 거쳐 남한 내 현지 35호실 공작선을 통해 오익제씨에게 전달됐다. 오익제씨가 훗날 북한에 들어온 후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는 그 편지와 사진을 보고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한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열차는 국경을 넘고

    35호실 공작선은 이후에도 오익제씨에게 “본처와 딸을 중국으로 내보내겠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유혹했다. 오익제씨가 대가 없는 성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에는 북한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류미영과의 친분을 근거로 제시하라는 내용까지 미리 지시됐을 만큼 전술안은 치밀했다. 마침내 오익제씨가 모녀와의 상봉을 희망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자, 안경호는 실무본부를 즉시 중국으로 옮겼다. 납치의혹을 피해 자진월북으로 위장하자면 그가 중국으로 오는 과정이 문제였다.

    대외연락부는 자기의 공작선을 노출시키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오익제 공작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익제와 중국 베이징까지 동행했던 LA 전금관광여행사 대표 김충자(55)씨는 그동안 대외연락부가 관리하던 미국 주재 공작선이었다. 오익제씨는 단순하게 본처와 딸을 만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김충자의 조언에만 충실했다. 실제로 그는 월북 준비가 전혀 없이 약간의 달러와 늘 가슴에 품고 다니던 스케줄 메모, 전화번호가 들어 있는 수첩만을 들고 나왔다. 훗날 그의 수첩은 조사과정에서 통전부의 주요 자산으로 입수됐고, 오익제씨는 거기서 큰 상처를 받았다.

    통전부의 오익제 납치공작팀은 납치를 자진월북으로 위장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오익제씨의 전화를 이용해 불필요한 통화를 여러 번 서울과 하게 하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본처와 딸의 은밀한 만남이라는 것만 믿고 김충자의 요구대로 행동한 오익제씨는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일시적으로 심리적 갈등을 겪었다. 그곳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줄로만 알았던 본처와 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작원들은 북한보위부가 월남자 가족이란 이유로 국외여행을 통제하기 때문에 베이징까지 못 오고 중국-북한 국경선 근처에서 모녀가 기다린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당시 중국에 나와 있던 조평통 서기국 국장 안경호가 비밀리에 오익제씨를 접촉해 이를 확언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 중요 직책의 인사가 약속한다는 말에 이왕 떠난 길을 가보겠다고 결심한 오익제씨는 통전부가 시키는 대로 위장변신까지 하고 따라나섰다. 단둥 지역에 도착한 그는 모녀가 여권 문제 때문에 열차에서 내릴 수 없다는 보위부 직원의 말만 믿고 주저하던 끝에 북한 열차에 올랐다.

    오익제씨가 열차 안에서 본처와 딸을 만나던 그 감격적인 순간에, 열차는 이미 서서히 국경을 넘고 있었다. 북한 땅을 달릴 때까지만 해도 이를 의식하지 못했던 오익제씨는 창 밖의 낯선 풍경에 놀라 이 열차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냐고 소리를 질렀다. 안경호는 “평양으로 가고 있으며 오익제 선생은 지금부터 민족종교 교류와 남북통일사업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담당해주어야 하겠다”고 설명했다. 그 첫 말에 오익제씨는 거세게 항의했다고 한다.

    안경호는 이미 준비한 ‘오익제 월북’ 관련 조선중앙통신사 보도자료를 보여주었고, 오익제씨는 기차 안에 외신기자가 없는지 소리를 질러가며 찾았다. 모녀는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다시는 헤어져 살지 말자고,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울며 애원했다. 안경호는 “장군님이 선생님을 꼭 모시고 오라는 믿음을 주셨다”며 총리 대우를 해주겠다거나 남북 종교교류의 일선에 모시겠다고 거듭 설득했다. “오익제 선생이 다시 서울행을 희망하실 경우 언제든 돌려보내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약속에 오익제씨는 한 시간 동안 생각할 여유를 요구했다. 그 시간에 모녀는 그에게 매달려 눈물로 대화를 나눴다. 오익제씨는 반세기를 홀로 살았다는 본처와 딸의 순정 어린 호소에 못 이겨 마침내 통전부가 써준 각본대로 평양역에서 짧은 월북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공작이 마침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총리급 대우’의 실상

    평양역에서 월북 성명을 발표한 후 오익제씨는 곧바로 문수초대소로 이송됐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2동 천도교청우당 뒤에 위치한 문수초대소는 월북자들을 수용하고 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전부가 관리하는 건물이다. 애초에는 1989년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전대협 대표들과 남한 사람들의 숙소로 쓰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지만, 월북자초대소로 사용하겠다는 통전부 제의서에 김정일이 사인한 이후 월북자초대소로 변경됐다.

    그 문수초대소의 마지막 손님이 바로 오익제씨였다. 오익제 이후 월북자들이 없었던 까닭에 문수초대소는 조총련을 담당하는 56과 전용건물이 됐다. 문수초대소는 남한의 에이스침대 가구로 꾸며졌고 북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남한 맥주나 소주도 제공되곤 했다.

    오익제씨는 이 초대소를 관리하는 무장경비에 둘러싸여 1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하는 동안 “총리 대우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매달 오익제씨에게 외화바꾼돈표 7000원이 지급됐다. 외화바꾼돈표란 달러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교환화폐다. 당시의 공식 환율은 2대 1이어서 7000원이면 거의 3500달러 수준이지만 무책임한 외화바꾼돈 발행으로 실제 환율가치는 7000대 100으로 떨어져 있었다. 결국 100달러가 그가 받는 총리급 월급의 전부였다.

    오익제씨는 “북한이 말하던 남북종교 교류와 남북통일 기여란 게 이런 범죄자 취급이냐”며 첫 조사부터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인권이 없는 북한에서 항의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어서, 조사관은 잠잘 시간에까지 그를 불러내는 등 노골적으로 괴롭혔다. 결국 오익제씨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서울로 돌려보내달라고 단식에 들어갔다. 본처와 딸이 손수 만든 음식도 그를 돌려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옥이 안경호와 함께 “오익제 선생의 노여움을 풀어주라”며 김정일이 보낸 음식이라고 목란관에서 만든 요리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가 김정일이 보냈다는 음식까지 거부하자 그때부터 오익제씨는 거의 사형수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무장 인력이 침실에까지 버티고 지켜서 있었고 모녀와의 만남도 단절시켰다. 아침 산보도 허용되지 않은 채 이틀 동안 누구도 찾는 사람이 없자, 그 정적이 더 괴로웠는지 오익제씨는 마침내 관광을 신청했다. 북한 텔레비전에 처음 비쳐졌던 그의 얼굴은 바로 이 때 촬영된 것이었다.

    구속이나 다름없는

    관광이 끝나고 난 이후 동행했던 김용순 비서는 “관광용 승용차는 장군님이 직접 보내주신 승용차였고 스케줄이며 음식까지 모두 장군님이 골라주신 것들”이라고 말했다. 오익제씨는 금강산, 묘향산 등 명소들과 지정 관광코스를 차례차례 순회했다. 이후 북한 당국은 벤츠500형과 개인 저택까지 김정일의 선물로 하사하는 연출극도 벌였다.

    그러나 오익제씨는 평양시를 관광하거나 책을 읽고 사람들을 면담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불합리성을 더 분명히 인식했던 것 같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명소 관광 중에 한 처녀 안내원에게 바꾼돈 1만원을 몰래 쥐어주며 자기가 납치됐다고 외국인에게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사실은 알려질 수 없었고, 자진 신고한 안내원까지 종적이 사라졌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TV를 통해 오익제씨의 관광 뉴스를 보던 김정일은 김용순을 찾아 “오익제 인상이 왜 저렇냐? 저 얼굴 보면 누가 자진월북이라고 하겠는가? 내일부터 TV에 내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다음날부터 오익제씨는 더는 초대소 밖을 외출할 수 없게 됐다. 그때부터 오익제씨는 사상공세를 받게 됐고 지금까지도 구속이나 다름없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북한에 자진월북했다는 사람들치고 월북 성명서를 스스로 읽지 않은 사람이 없다. 고 신상옥 감독이 그랬고 그의 아내 최은희씨도 마찬가지였다. ‘오익제 월북사건’은 실은 황장엽 탈북에 대응하는 공작 차원에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통전부가 자행한 가장 근래의 남한인사 납치극이다.

    오익제 공작 이후 안경호는 노력훈장과 국기훈장 1급, 기타 다른 성원들도 2급 훈장을 받았다. 오익제 부인 명의의 편지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았던 101연락소의 박철은 5국 19부 부장에서 5국 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박철은 이후 김용순 비서의 심복이 되어 임동옥 부부장 공격에 앞장섰다가 2001년 당조직부 지도검열을 받고 숙청됐다. 현재 박철 대신 작전부장의 사위 장혜명이 5국 국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2006년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위장직함으로 남북작가회담의 북측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DJ는 무슨 말을 할까

    이른바 오익제 월북 소식이 알려진 후 남한 사회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는 소식이 평양에도 전달됐다. 황장엽 비서의 탈북만한 파급력은 없었던 것 같지만, 통전부는 오익제 후폭풍을 과장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황 비서의 탈북으로 인한 김정일의 격앙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김정일은 “김대중이면 몰라도 오익제는 황장엽에 버금가는 인물이 못 된다”며 여전히 분노했다. 그러면서 “오익제 납치만으로 머물지 말고 남한 정국을 계속적으로 흔들라”고 지시했다. 황장엽 탈북 쇼크 이상으로 오익제 월북을 과시할 수 있는 공격적인 대남 심리전을 펼치라는 지시였다.

    오익제씨 명의의 편지를 서울로 발송하는 공작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국에선 대선을 앞두고 있는 김대중 당시 총재에게 왜 오익제씨가 편지를 공개 발송했는지에 대해 아직도 의문이 많은 모양이다. 이회창씨가 정권을 쥐면 북한에 더 불리할 텐데도 북한은 내놓고 김대중 총재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통전부의 편지 발송은 대선용이 아니라 김정일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모든 정책 위에 김정일의 위상이나 결심이 놓이는 독재국가다. 북한이 종종 전략적 혼동을 자처하는 것은 대의보다 김정일의 사견에 충실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권력구조의 속성 때문이며, 그것이 곧 북한 사회질서와 체계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당시 오익제씨 명의의 편지를 발송한 목적은 대선이 아니라 황장엽 비서 탈북에 대응하는 공작의 연장선이었던바, 김대중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오익제씨의 위상을 인위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분위기를 회고할 때, 만약 1998년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면 북한이 그에 대한 월북 유인공작을 실행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본다.

    북한은 체제홍보나 김정일의 만족을 위해 많은 남측 인사나 일본인을 납치해왔고, 지금도 그러한 국가적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김정일 정권에 대해 유화책으로 일관하며 정상회담까지 했던 김대중씨는,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인사가 바로 그 김정일 정권에 의해 납치당해 현재도 감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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