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핵심 요소
美 영향력 쇠퇴하자 나타난 일
2차 대전 이후 질서가 무너지다
언제 어디서 전쟁 발생하더라도…
경계하고 의심하는 시민의 태도
독재자에게서 보이는 일정한 패턴
2024년 11월 열리는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P 뉴시스]
세계적으로 최근 수십 년의 기간을 ‘벨 에포크(Belle Époque·아름다운 시대)’와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벨 에포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됐으며 독일 통일로 유럽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생긴 1871년을 기점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14년까지의 시기를 이른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평화 속에서 문화, 예술, 과학, 경제가 크게 발전한 시대다.
이 시기에는 산업혁명의 성과로 부상한 새로운 산업의 발전과 함께 그 생산품들이 증기기관차와 증기선을 통해 국경을 건너 빠르게 전달됐다. 덕분에 국제무역이 활발해지고 글로벌화가 진전됐다. 도시화와 중산층 형성이 가속화했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과 노동자 계급의 권리 신장 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한편 유럽 주요 국가들 간에 복잡한 동맹 체제가 구축돼 겉보기에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이 또한 영원할 수 없었다. 국가 간에 자국 중심 민족주의와 영토적 야심이 증가하면서 긴장이 고조됐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이 종식됐다. 이후 이뤄진 디지털혁명과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최근 30여 년간 우리가 경험한 경제적 번영과 글로벌화는 100년 전 유럽의 상황과 많은 부분이 겹쳐 보인다. 경제적으로는 초국적 가치사슬이 형성됐고, 사회문화적으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국가 간 상호 연결성이 강화됐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번성의 조건
그러나 역설적으로 중국의 세계무역 질서 편입 및 본격 성장의 결과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제조업 기반이 넘어가면서 발생한 미국 제조업 노동자 계층의 고통이 누적된 결과 트럼프 현상이 나타났다. 이제는 아예 트럼프 방식이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 잡을 태세다. 거기에 더해, 산업별로 시간차는 있겠지만 정보통신혁명에 이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개막으로 노동시장의 근본적인 지각변동, 즉 ‘고용의 증발’이 예고되고 있다.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시장경제, 자유무역과의 결합을 통해 20세기 후반 이후 인류의 전반적인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 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이러한 구조적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와 발전에 핵심적 요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시민과 정부기관이 법 앞에 평등한 동시에 법이 공정하고 일관되며 투명하게 적용됨을 뜻하는 ‘법의 지배’다. 둘째,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평화적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적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셋째, 정부 권력의 입법, 사법, 행정으로의 분리와 이들 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는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다. 넷째, 언론이나 시민이 권력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도 처벌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다.
다섯째, 시민들의 활발한 선거 참여 및 공공정책에 대한 의견 제시, 그리고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참여’다. 여섯째, 합리적 논쟁을 거쳐 협상과 타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책임감을 갖추게 하는 ‘교육과 시민의식’이다. 일곱째, 불평등의 심화는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저해하므로 경제적 안정과 평등한 기회 제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기회와 평등’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번성은 이러한 조건들이 상호작용하고 시민과 정부 간의 신뢰와 협력이 바탕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지면 관계상 위 일곱 가지 항목에 대한 개별 평가는 생략한다. 다만 우리는 지금 어느 항목에서도 낙제를 면하기 쉽지 않은, 문제적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제국 쇠퇴기에 나타나는 일
지난해 3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3연임을 확정한 시진핑 국가주석(가운데)이 헌법에 한 손을 올려두고 선서하고 있다. [베이징=신화 뉴시스]
특히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 병합과 더불어 이때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이 본격화했다. 서방측이 이에 대해 적기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 푸틴의 야심과 모험주의를 키웠다. 이를 방치한 결과 ‘국가 주권과 영토 보전의 원칙’을 핵심으로 하는 1975년 헬싱키 협정 체결 이후 50년 가까이 지켜진 합의가 우크라이나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오늘날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중국의 굴기와 군사적 팽창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영토 주장과 군사기지 건설, 대만해협에서 진행되는 군사훈련 및 무력시위, 인도와 국경 지역에서 일으키는 충돌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9년 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촉발된 민주화운동 탄압, 2020년에 이어진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를 계기로 홍콩의 자치권은 더욱 제한됐고 민주화 에너지는 거의 사라진 듯 보인다.
100년 전 유럽과는 달리 현재는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존재, 다자간 협약, 국제기구의 역할 강화 등으로 대규모 전쟁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반면 지역 갈등, 테러리즘, 사이버전쟁 등 새로운 형태의 충돌이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거침없는 영토 확장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물론 미국 주도하에 창설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력한 차기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가 유엔 안보리와 나토에 대해 가진 인식을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규정한 기틀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형국이다.
그 배경에는 제국의 쇠퇴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미국의 심각한 재정 부실화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의 부채가 지난해부터는 100일마다 1조 달러, 약 1300조 원씩 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은 기존대로 최고등급을 유지하면서도 정부의 재정건전성 위험 증가를 이유로 신용등급 전망은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내렸다.
변곡점에 도달한 이후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생길까. 군사비 지출 여력의 한계로 인한 미국 영향력 쇠퇴의 결과로 머잖아 국제질서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 같다. 일방적으로 무력을 행사해서 국경선을 변경하더라도 더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전쟁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이 된 지난해 2월 24일 서울 서초구 세빛둥둥섬 외벽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을 비추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이야기한 이른바 ‘맥도날드 이론’이란 것도 있다. 즉 패스트푸드 체인점 맥도날드가 진출한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비록 코소보 전쟁이나 조지아 전쟁에서 깨지긴 했지만, 맥도날드를 세계화와 경제적 번영의 상징으로 보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전쟁이 불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이므로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고려할 때 국가 간 대규모 충돌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이론 중에 ‘민주적 평화 이론(Democratic Peace Theory)’도 있는데,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즉 독재 또는 권위주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보다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더 높다는 가설이다. 민주국가들에서는 전쟁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필요하므로 전쟁의 비용과 위험을 고려할 때 국민과 의회의 승인을 얻기가 어렵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이것이 경솔하게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억제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예측가능성을 높여 평화적 해결 방식을 선호하게 한다는 뜻이다.
물론 민주국가 사이에서도 드물게 전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민주국가들이 비민주국가들에 대해서는 전쟁을 주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선제공격 당했을 때의 반격 또는 응징은 정당방위 차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어쨌든 전쟁 행위라는 결론에 이르는 국가 의사결정 절차가 민주국가에 비해 비민주국가가 훨씬 단순하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우발적 충돌로 전쟁이 시작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개 전쟁은 전략적 판단하에 지도자의 리더십과 국운을 걸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체제 이행 중인 국가건, 대를 이은 철권통치를 자행하는 독재국가건 지도자는 그 리더십을 유지하려면 대중의 정서에 반응하며 상호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핵심적 영향을 미치는 경제 상황은 수많은 변수로 인해 통제가 어렵다. 경제성장과 분배의 사이클이 순조롭게 선순환되고 있을 때엔 그럴 가능성이 감소하겠지만, 국민 다수가 먹고살기 어려워져서 집권한 정치세력에 대해 불만이 고조되면 외부에 가상의 적이라도 만들어 국민의 분노 에너지를 내부의 권력이 아닌 외부의 적에게로 돌리려는, 정권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 대처를 하기가 쉽다.
경기의 완급 조절이나 경제의 지속 성장, 조화로운 분배를 정책적으로 실현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한마디로 경제는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지 않다. 또는 통제할 수 있다고 잠시 착각할 수는 있으나 작은 거품이 터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점점 더 큰 거품을 만들면서 경제위기의 규모를 오히려 키우는 우를 범할 뿐이다.
그럼 남은 변수 중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정치적으로 다양성·다원성이 감퇴하고 독재체제에 가까워질수록 완전한 민주주의에 비해 국가적으로 전쟁을 결심하기가 훨씬 더 용이한 정치 환경이 조성된다. 이를 고려하면 다양성과 포용성, 절충과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튼튼하게 지켜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은 그간 민주주의의 형식적 발전과는 별개로 내용적으로는 극심한 이념 대립, 정신적 내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념에만 매몰된 퇴행의 집단은 하루속히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고대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존재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권위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데 핵심 기반 및 동력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화국 주권자 시민의 의무
최근 30여 년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됐다가 점차 권위주의화, 독재화의 길을 걸어온 지도자들이 동원한 수단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이런 패턴이 대한민국에서 나타날지 유심히 관찰하고 대처하는 것이 공화국 주권자 시민의 의무다.가령 대통령과 총리직을 마음대로 오가며 통치하는 것을 포함해 헌법의 임기 조항을 수정 또는 무력화하거나 정치적 합의와 관행을 깨고 임기를 자의적으로 연장해 사실상의 종신 집권에 이르는 행위, 게임의 룰이므로 당사자 합의가 전제돼야 하는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자기 측에 유리하게 뜯어고쳐 다수당 지위를 영구화하는 행위, 사법부에 대한 공격으로 법원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오염시키는 행위, 법관 임명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행위, 심하게는 판사와 검사 수천 명을 일거에 해임하거나 체포하고 그 빈자리를 집권당에 충성하는 자들로 채워 사법부의 독립성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키는 행위, 야당 정치인이나 언론인에 대한 테러 또는 암살 행위 등이 있다.
이런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는 국가들의 사례를 찾다 보니 깨달은 점이 있다. 우리가 공기처럼 여기는 자유민주주의가 실제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가 소수에 그친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유세계 최후의 보루인 미국조차 증오 기반 정치문화에 휘둘려 도널드 트럼프라는 정치 괴물을 낳고 말았다. 이런 지경이라 타국의 사례를 들기가 이제는 멋쩍을 정도다.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전제를 따르자면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도 영원불변의 상수는 아니다. 수십 년간 누린 경제적 번영도 멈춰 설 수 있다는 위기감을 지니고 있어야겠다. 경제가 흔들리고 정치가 무너지고 전쟁의 참화가 닥치더라도 국가나 개인은 살아남아야 한다. 경제위기를 미연에 예방하는 것은 우리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더라도 위에서 열거한 권위주의화의 징후가 포착될 때에는 자유와 번영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있어야겠다. 특히 헌법이나 선거법을 일방적으로 손대려 하거나 법원이나 언론의 정상적 기능을 저해하는 경우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겠다. 사이비종교를 맹신하듯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맹종하는 시민이 있을 경우 이들을 준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며 해독시키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그러지 않으면 어느 괴물에 잡아먹힐지 모르기 때문에.
김세연
● 1972년 출생
●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 제18·19·20대 국회의원
● 여의도연구원 원장
●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 저서 : ‘리셋 대한민국’(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