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떴다 보아라 안창남,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주인공인 사이클 선수 엄복동(맨오른쪽).
이날 밤에는 전일본 아마추어 권투 선수권자이며 프로권투 세계 랭킹 6위로 미국에서 활약하던 일명 ‘독침’ 서정권(徐廷權)의 귀국 환영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미 많은 서울 시민들이 경기 전부터 흥분해 있었다. 남대문과 청량리를 오가는 전차 속 신사와 청년·학생들은 너나없이 권투 이야기뿐이었다. 전차와 자동차는 쉼없이 관중을 동대문으로 실어 날랐고 500촉 전구가 켜진 경기장 정리를 위해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 운동장에 배치됐다.
오픈 경기가 모두 끝나자 다시 거구의 여운형이 링사이드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드디어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서정권이었다. 플라이급이라 몸이 작고 미남형이었지만 그 얼굴에는 ‘범하기 어려운 투지’가 엿보였다. 상대는 역시 미국에서 활약하는 스페인 출신(필리핀이라는 설도 있다) 의 라슈 조. “그야말로 서반아인의 강한 쟁투심을 보인다 하여 전 미국사람을 놀라게 했고, 세계적으로도 ‘표범’이라고 불려오던 권투계의 강적”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서정권은 조선 사람들의 기대와 흥분을 배신하지 않았다. 관중들의 긴장은 금방 환호로 바뀌었다. 1회부터 서정권은 라슈 조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2회와 3회에도 일방적인 우세였다. 결국 라슈 조는 4회에 무방비 상태로 소나기 펀치를 맞고 “이마가 터지며 피가 흘러” 쓰러졌다. 심판은 서정권의 TKO승을 선언했다. 감격적이고 통쾌한 승리였다. 경기가 끝났는 데도 관중들은 서정권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흩어질 줄 몰랐다.
월간 ‘삼천리’의 기자는 이 날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5척 어린 청년 앞에 전세계의 코끼리 같은 양키-들이 길을 피하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음에 우리들은 그와 피와 산천을 같이 하였음을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아, 우리 반도에는 세계적으로 우러러보는 새로운 영웅 한 분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의 장래를 빌며 그가 현재의 제6위로부터 제1위에 오를 날이 하루 급하기를 빌 따름이노라.”(‘무적 서정권 대승 광경-서반아의 강호를 격파’ 삼천리 1935. 11)

일제시대 권투 영웅 서정권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한국인의 뜨거운 스포츠 사랑, 그리고 ‘사랑’을 넘어서 때론 ‘광적’인 경지까지 다가가는 스포츠 민족주의는 개화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일제시기에 본격적으로 자라났다. ‘삼천리’ 기자가 썼던 것처럼 이때 이미 한국 스포츠 영웅의 이미지는 확정되어 있었다. 그 영웅은 다름아닌 ‘코끼리 같은 양키들을 당당히 물리치는 맵고 작은 조선 고추’이다.
한국 스포츠의 영원한 숙명
그런데 한국에서 국민적 스포츠 영웅이 되려면 서양의 덩치 큰 선수를 이겨야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숙명적인 적과도 맞서 이겨야 한다. 그 숙명은 정말 끈질기고 지독해서 경기장에 나서는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을 괴롭힌다. 바로 일본이다. 지난 1월 하순 카타르 친선축구대회 한·일전에서 최성국은 골을 넣은 후 ‘독도는 우리 땅’이란 문구가 쓰여진 속 셔츠를 보여주며 골 세리머니를 했다. 그 숙명은 금세기에도 결코 중단되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