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와 고인이 남긴 유서.
발견된 유서는 전날인 5월14일 새벽에 가족 몰래 써서 서랍에 넣어둔 것이었다. 새벽 5시30분에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청계산 만경대로 가는 길을 물었고, 8시30분쯤에는 가까운 이 두세 사람과 통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침 9시, 만경대 바위 꼭대기에 앉아 고민했다고 했다.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깔끔하게 죽으면 다행이지만 불구의 몸으로 살아남으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시각, 이상한 예감이 든 부인이 남편의 후배들에게 “어디 있는지 찾아봐달라”고 부탁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청계산에 가셨다는 걸 알고 부리나케 달려가면서 계속 전화를 해댔다. 뛰어내릴까 말까를 세 시간 동안 고민하던 박 국장은 한참이나 문자 메시지를 날린 10시30분이 되어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내려가자고, 가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훌훌 털어버리자고 겨우 설득해서 내려온 것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그는 만경대 바위 위에서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내 울었다”고 했다. 청계산장에서 소주를 마시는 내내, 오후에 자리를 옮겨 반포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 내내,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정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온 지난날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고는 거듭해서 검찰청에서 당한 모욕에 분노하며 치를 떨었다. 탁자를 치며 분통을 터뜨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 가겠다고 재촉하는 박 국장을 집까지 모셔다가 부인에게 부탁하고 돌아선 것이 오후 6시였다. 찜찜한 기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푹 자고 나서 다음날 아침 조사받으러 가시겠거니 생각했다. 나중에 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족은 이미 낮에 서랍 속에 들어 있던 유언장을 발견해 읽은 터였다. 아들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결백을 알고 있으니 절대로 다른 마음 먹지 말라”고 울면서 간청했다. 술을 꽤 많이 마신 박 국장은 7시쯤 이내 잠이 들었다가 새벽 1시쯤에 깨어났던 모양이다. 13층 아파트의 베란다에 서서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우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싶어 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운 부인에게, 박 국장은 “잘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새벽 5시에 샤워를 하고 유난히도 공들여 머리를 말리고는, 6시30분쯤 출근했다가 검찰로 가겠다고 가족들을 안심시켰다는 것이다. 예정돼 있던 대검찰청 출두시각은 9시30분이었다. 그 전에 은퇴 후 소일 삼아 나가던 사무실에 들러 서류를 챙긴 후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로 가지 않았다.
그가 간 곳은 경기도 광주 퇴촌에 있는 모친의 산소였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묘소에 공들여 절을 올린 그는 근처에 있는 광통교 다리 위에 차를 세운 후 혼자서 난간에 올라섰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강물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오전 10시, 대검찰청에 나가 앉아 있어야 했을 그 시각에, 팔당호 기슭으로 떠내려온 그의 시신이 발견됐다. 천추의 한이 된 문제의 검정색 뉴그랜저 승용차는 광통교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진술번복’의 실체
박석안 국장이 왜 검찰의 조사를 받았는지는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자세히 알려진 그대로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양재동 사옥 증축결정이 나던 2004년 봄 당시 서울시 주택국장이던 그는, 인허가 과정에서 이 회사로부터 특혜나 뇌물을 받은 것이 있는지를 조사받기 위해 검찰에 소환됐다. 수사를 담당한 곳이 바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였다.
후에 검찰에서도 언론에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 사건의 주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이었고 뚜렷한 근거나 물증, 혐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지난해 산 자동차가 현대차에서 나온 뉴그랜저이고, 공식시가에 비해 700여만원 싸게 샀다는 것이 유일한 화근이었다. 그 때문에 검찰조사를 다섯 차례 받았다.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장시간에 걸친 강도높은 조사였다. 5월11일과 1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