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년째 계속되고 있는 울릉도 사동항 방파제 공사. 오른쪽에 있는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터미널과 주기장으로 사용하고, 여기서 나온 돌로 방파제를 강화해 100인승 중형기가 뜨고 내릴 수 있는 활주로로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독도 영유를 확실히 하는 지름길은 일본과 전쟁을 해 이긴 다음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표현을 명문화한 강화협정(평화협정)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한일 간에는 전쟁을 할 이유도 없고, 전쟁을 해서도 안 되므로 이는 적절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강화협정은 종종 평화협정이나 기본조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화협정은 전쟁을 치러 승부가 난 후 복교(復交)할 때 주로 쓰이는 명칭이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대립관계를 끝내고 외교를 회복해 평화관계로 들어간다는 내용의 기본조약을 맺었다. 기본조약의 핵심 사항은 상대의 국경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접국끼리의 갈등은 양쪽이 주장하는 영토가 겹칠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한일 양국 사이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 주장이 겹쳤다. 일본은 복교를 하면 한국을 식민지배한 데 대한 사과로 청구권 자금을 내놓고 대신 독도 영유권을 가져가려고 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 시절 양국은 국교 정상화 회담을 진척시키지 못했다.
박정희의 조용한 외교
경제재건 자금을 절실히 필요로 했던 박정희 정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제주도와 홍도는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 섬이 한국 영토라는 데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유사 이래 한국인이 살았고 한국의 역사 공간으로 만들어 왔으니 당연히 한국 영토로 이해한다.
박정희 정부는 ‘독도는 신라 시대 이래 한국이 영유한 섬이니 새삼 누구 땅이냐를 놓고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전략을 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으나, 박정희 정부는 ‘독도는 원래부터 한국 땅이고 영유권 다툼은 있어 본 적이 없으니, 독도 영유권 이야기는 꺼낼 필요조차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간 것.
그러나 일본측에서 본다면 박정희 정부는 이승만 정권과 달리 ‘독도는 한국 땅’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된다. 당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침략국’이라는 오명을 빨리 벗어던지기를 원했다. 때문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평화 애호국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식민지배를 당한 한국과 복교한다면, 이는 일본이 평화애호국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좋은 ‘이벤트’가 된다. 이러한 계산하에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건너뛰어 박정희 정부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일본은 협상 과정 내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다. 이 때문에 협상에 참여한 김종필(JP)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차라리 독도를 폭파했으면 좋겠다”는 푸념까지 하게 됐다.
기본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일본은 기본협정에서 독도 문제가 합의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정기적으로 한국측에 독도 영유권 문제를 논의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는 영유권 분쟁이 있어 본 적이 없다’며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차이가 JP 발언의 진의를 의심하던 일부 국민을 자극했다. 반일(反日) 성향이 강한 이들은 박정희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켕기는 데가 있기 때문일 것으로 의심했다.
이들은 압축성장을 한다는 이유로 독재를 하는 박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청구권 자금을 받고 독도를 일본에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도 박 정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이 주장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 가운데는 정치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