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천리’ 1936년 4월호에 실린 ‘이용익의 백만원이 사느냐 죽느냐’ 기사.
1902년 10월2일, 제일은행 경성출장소(지금의 한국은행 본관)에 내장원경(內臟院卿) 이용익(1854~1907)이 나타났다. 제일은행은 일본의 민간은행이었지만, 1878년 조선에 진출한 이래로 은행권 발행, 국고금 출납 등 사실상 조선의 중앙은행 기능을 담당했다. 조선 최초로 설립된 은행인 만큼 자본금 규모로 보나 영업 능력으로 보나 대한천일은행, 한성은행 등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을 압도했다.
내장원경 이용익은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지배인실로 안내되었다. 내장원경은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의 수장. 당시 조선 유일의 수출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광산과 인삼밭에서 나오는 세수(稅收)는 모두 내장원에 귀속됐다. 내장원경이란 자리는 엄청난 규모의 황실 자산과 이권을 관리하는 대한제국 최고의 ‘노른자위 보직’이었다.
더구나 이용익은 고종의 최측근 경제관료이기 이전에 그 자신이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다수의 금광을 소유한 백만장자였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은행의 극진한 환대를 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용익은 지배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본인 명의로 당좌예금 계좌를 개설하고 뭉칫돈 23만7519원 74전을 입금했다. 당시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이던 영친왕 이은의 월급이 50원, 부은행장이던 이용익의 월급이 25원이었다. 정확한 환산은 불가능하지만, 100년 전의 23만여 원은 오늘날 230억원보다 훨씬 큰돈이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친러파의 거두 이용익은 친일파가 들끓는 조정에서 고군분투의 세월을 보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가 이길 것으로 믿고 한일의정서 체결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1904년 1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일본으로 압송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같은 해 12월에 가까스로 억류에서 풀려나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인 1905년 1월14일, 관직 없이 야인 생활을 하던 이용익은 3년 만에 제일은행 경성출장소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어디서 났는지 뭉칫돈 10만원을 입금했다. 열흘 후인 1월24일에도 다시 2만4000원을 입금했다. 7월7일에는 수표로 3만원을 인출해 당좌예금의 잔액은 원금만 33만1519원 74전이 되었다.
33만원의 행방
한 달 후 이용익은 경상북도 관찰사로 관직에 복귀했고, 5월에는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일본에 압송되는 수난을 겪고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이번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친일파의 미움을 샀다. 8월14일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됐지만, 현지에 부임하는 대신 8월17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비밀리에 출국했다.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객의 저격을 받고 중상을 입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용익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가 요양하다 1907년 1월에 사망했다. 대정객(政客)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33만원 당좌예금도 주인을 잃고 허공에 떠버렸다.
15년의 세월이 지난 1922년 1월26일, 일본 중의원에서 야당인 헌정회를 대표해 대정부 질의자로 나온 아라카와 대의사(代議士·의원)가 다음과 같은 ‘생뚱 맞은’ 의혹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