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탈북자 출신으로 서강대 경영학부에 다니는 이영미(가명·여·21)씨는 “북한에서 영어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의) 영어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했던 말씀”이라면서 교사의 말을 성대모사로 들려줬다.
이씨는 북한에서 우리의 특목고에 해당되는 함흥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김일성종합대학(이하 김일성대) 법학부에 합격한 재원이다. 그는 대학 입학 통지서를 받던 날 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김일성대 교문에도 못 가본 것이다.
한국으로 와서 재수한 후 서강대에 입학한 그는 “사회탐구 영역 내용이 북한과 다르지만 않았다면 서울대에 입학하는 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최고 일류대학 김일성대와 비교되는 서울대에 입학하지 못한 게 무척 안타까운 듯했다. 그는 북한의 교육방식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영어교육에 관한 한 북한의 교육방식을 일부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의 나라 말을 왜 분석해”
“북한에선 영어를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요. 북한 외국어고등학교의 영어교과서는 영국의 국어교과서예요. 영어교과서를 통째로 달달 외워야 했어요. 선생님이 회초리를 들고 다니면서 ‘언어를 왜 해석하느냐’고 야단쳤어요. ‘남의 나라 말이니까 그냥 외우라’는 거였죠. ‘문법 같은 건 몰라도 된다. 언어가 입에서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어요.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던 어느 날 문법이 저절로 이해되었어요. 만약에 처음부터 문법을 공부했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겠지요. 일상생활에서 ‘할아버지가 오고 계신다’라는 말에 익숙해졌을 때 경어법을 배운다면 이해가 빠른 것과 같은 효과겠지요.
남쪽에 와보니 북한의 영어 교육이 ‘정말 괜찮고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선 회화 방식으로 가르친다고 해도 결국 문법을 자꾸 강조하거든요. (한국 학생들은) ‘뼛속까지 해부한 영어’ 뭐 이런 책을 보던데, 남의 나라 말을 뼛속처럼 해부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말을 생각해보세요.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독해력이 늘고 글도 잘 쓰게 되고 말도 잘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국어를 어학적으로 분석해서 부사가 어떻고 명사가 어떻고 이렇게 공부하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어요.
(북한의 고등중학교에선) ‘세계문학 영어판을 수준에 맞게 일주일에 10권 이상 읽어라’고 강요해요. 스토리가 있는 영어책이니 재미가 있어서 나중엔 골라가면서 읽게 되죠.
제가 다닌 외고에서는 세계문학에 나오는 명문장 100개를 골라 달달 외우게 했어요. 예문을 애니메이션으로 거듭 보여주면서 외우게 했고요. (외우다가) 자연적으로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교육이었어요. (북한에선) 번역 단계를 거치지 않고 죽자 사자 외우는 게 상책이었어요. (그날 과제를) 못 외우면 집에 안 보내주니, 12시 전에 집에 가려면 어쩔 수 없었지요.
문법은 몰라도 문제를 보면 (답이) 입에서부터 줄줄 나오게 됩니다. 한번 해보세요. 남쪽에 와서 토익, 텝스 다 치렀는데 별문제가 없었거든요.
국어를 예로 들면 ‘어제 비가 왔어요’라는 말이 그냥 입에서 나와야 하는 거지, ‘어제 비가 오네요’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과거형이니 ‘왔다’라고 해야 한다고 분석하지 않아도 아는 거죠. (북한의 영어교육은) 영어를 입에서 자연스럽게 맴돌게 하겠다는 전략이죠.”
그는 “영국식 영어를 북한인을 통해 배웠기에 한국에 온 후 발음과 스펠링이 달라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바로 적응했다”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4명의 탈북 대학생은 공통적으로 “(한국에서) 미국식 영어를 처음 접했지만, 6개월간 훈련하니 시험문제를 충분히 풀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영어 교육에 관한 한 북한에서 배워야 할 부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