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 글: 박윤희 자유기고가 gogh1028@hanmail.net

    입력2003-05-26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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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는 사람들.
    • 요리, 사진, 연극, 패션, 와인, 만화, 문학….
    • 일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는 중년 남성들의 자아 찾기 프로젝트. 그 ‘또 하나의 삶’을 만난다.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저는 낭만파는 아니에요. 한 마디로 ‘몸부림과’죠. 로맨틱한 인생은 좀 고루한 것 같고, 전 좀더 전위적인 중년이고 싶어요.”

    환경디자이너로 일하는 KDA그룹 박기태(52) 대표는 지인들로부터 ‘문화 마피아’라 불린다. 짧은 머리와 넓은 어깨, 아기 머리통만큼 큰 주먹 때문에 그런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의 전공인 환경디자인 이외에도 패션, 요리, 영화, 가구, 여행 등 다방면에 예민한 촉수를 깊숙이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식가이자 요리사다. 친구의 생일날이나 집들이 때는 직접 칼과 프라이팬을 챙겨 들고 출장 요리사를 자처한다.

    “얼마 전 친구 집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정찬 요리 8가지를 만들어 대접했어요. 세계 각국에서 먹어본 맛있는 요리를 혼합해 퓨전 스타일로 만드는 게 주특기죠. 이번에는 전채요리로 프랑스식 양파 수프를 만들고 일본식 생선모듬과 청경채소스를 곁들인 야채샐러드를 준비했어요. 메인요리는 닭 날개를 튀겨 맵고 달콤한 타이소스를 곁들였고, 소 갈비살 스테이크와 리조토(이탈리아식 밥요리)도 만들었죠.”

    그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자 박대표는 사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같은 건물 5층에 마련된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게스트 하우스는 말 그대로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그가 특별히 마련한 공간이다. 2개의 침실, 샤워실, 다락방까지 갖췄는데 무엇보다 부엌이 인상적이다. 기분 내키면 마음에 맞는 지인들을 초대해 현란한 요리솜씨를 뽐내는 사교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언젠가 탤런트 최불암씨는 이 부엌에서 탄생한 그의 요리를 맛본 후 ‘영혼을 먹고 간다’는 찬사를 남겼을 정도라니 그 솜씨를 알 만하다. 그는 마치 전업주부처럼 부엌 싱크대의 찬장을 하나하나 열어 보이며 살림 자랑을 늘어놓았다.



    “음식에 어떤 소스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그래서 저는 항상 굴소스, 칠리소스를 포함해 한 70가지 소스를 준비해두죠. 차 맛도 한 방울의 소스가 결정해요. 여기 티소스만 해도 10가지가 넘어요. 그런데 진짜 좋은 차 맛을 즐기려면 좋은 물을 쓰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볼빅’이나 ‘에비앙’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14가지 생수를 늘 준비해두고 있죠.”

    그는 생수의 국적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쌀의 국적도 따진다.

    “어떤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쌀의 출신성분에 차별을 둡니다. 일본 쌀, 스페인 쌀, 미국 쌀 등을 골고루 먹긴 하지만 볶음밥을 만들 땐 태국에서 수입한 ‘자스민 쌀’을 사용해요. 자스민 쌀은 밥알끼리 서로 달라붙지 않아 볶아놓으면 정말 맛있거든요.”

    부엌에 걸려 있는 칼만 12가지. 빵칼에서 생선회를 뜨는 칼까지 용도와 모양새도 다양하다. 그는 도마 밑에 쿠션처럼 행주를 깔더니 그 반동을 이용해 칼질하는 솜씨도 보여주었다. 과연 강호의 칼잡이라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솜씨였다.

    ‘푸아 그라’와 ‘원숭이 골’

    “뉴욕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식당에서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접시 닦는 일로 출발했는데 주방장이 예쁘게 봐줘 이런저런 요리를 배울 수 있었죠.”

    그는 “남에게 요리를 잘한다고 말하려면 1시간 안에 최소한 13가지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자신만만하다는 뜻일 게다. 더구나 세계의 미식가들이 가장 맛있다고 꼽는 3대 진미, ‘푸아 그라(프랑스 거위 간)’ ‘트뤼프(서양 송이버섯)’ ‘캐비어(철갑상어의 알을 소금에 절인 식품)’가 냉장고에서 늘 그의 손놀림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까다로운 미감을 가진 그는 세계 3대 진미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그가 평생을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중국에서 만난 ‘원숭이 골’이라고 했다.

    “원숭이 머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뇌 부분을 칼로 도려내 먹습니다. 특징적인 향이나 맛이 없는데 하여튼 제가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그가 평소 자주 가는 식당은 서울 역삼동에 있는 ‘한 술 더 맛집’. 이 식당은 100% 천연 양념을 사용하고 모든 음식의 재료가 무공해 농법으로 재배된 것이다. 미식가인 그 역시 맛도 맛이지만 건강을 고려한 식단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바다냄새가 그리울 때는 단 한 끼 점심식사를 위해 강원도 속초로 차를 몰기도 한다. 속초 ‘팔팔구이집’에서 지인들과 갓잡은 생선을 숯불에 구워 먹는 일도 그가 누리는 일상의 여유다.

    “모든 음식이 비싸야만 맛있는 것은 아니에요. 1년에 한 번씩 꼭 찾아가는 서울 인사동 국밥집이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우거지 넣고 끓여주는 2500원짜리 국밥이 정말 맛있어요. 가난한 화가이던 아버지와 대부호의 딸인 어머니의 피가 동시에 흘러 그런가 봐요. 아무튼 음식 취향도 극과 극을 달려요.”

    그에게 ‘맛있는 집’ 고르는 요령을 묻자 식탁이 5개 미만인 집, 한 자리에서 10년 이상 영업한 집, 주인이 요리와 서브를 같이 하는 집을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고 귀띔한다.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마오쩌둥 콜렉션 앞에서. 시계, 시가, 넥타이 수집도 빠뜨릴 수 없는 취미다

    맛있는 요리를 즐기거나 만드는 것 이외에도 그에게는 독특한 수집벽이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동상과 포스터를 수집하는가 하면 시계, 선글라스, 시가, 중국차, 골동품 등도 모은다.

    “마오쩌둥이 중국의 12억 인구를 핸들링했다는 것 자체가 매력이죠. 1989년 중국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마오쩌둥 배지를 비롯해 마오쩌둥의 초상이 새겨진 다양한 소품을 한 500개 정도 모았어요.”

    그의 손목에는 최초로 만들어진 오메가 알람시계가 채워져 있다. 전세계적으로 몇 개 안 남아 있다는 명품이다. 단지 복고풍의 알람 소리가 좋아 구입했다고 한다. 주로 해외여행을 할 때 기념품으로 시계를 구입하는데 그의 서랍장 속에서 잠자는 시계만 해도 300개가 넘는다. 최저가 30만원부터 최고가 1500만원까지 가격대와 모양새도 다양하다.

    시가 수집은 고등학교 시절 도둑 담배를 피면서부터 시작했다. 화가인 고 박고석씨가 그의 부친인데 그는 아버지의 시가를 훔쳐 피다 다양한 국적의 시가를 수집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케이스만 해도 몇백 만원이 넘는 터라 지금은 보류한 상태다.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패션’을 빼놓을 수 없다. 오십을 넘긴 나이에 쫄티, 패딩 롱코트, 힙합 바지 등 패션실험으로 이미 업계에선 베스트 드레서 반열에 올라 있다.

    “보보스의 특징이 무조건 비싼 옷만 선호하는 것은 아니에요. 유행을 타지 않는 자기만의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죠. 주로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무채색을 좋아하고 차가운 색조보다는 따뜻한 색을 선택합니다. 따뜻한 계열의 색이라 해도 ‘대비’가 되어서 멋있는 색인가, ‘조화’를 이루어서 멋있는 색인가를 따져 패션 연출을 하지요.”

    그는 백화점 쇼핑보다 동대문, 남대문 쇼핑을 더 좋아한다. 1개월에 3번 꼴로 새벽시장을 찾아 그때 그때 유행도 파악하고 5000원짜리 남방도 구입해 그만의 개성을 표출한다.

    “1960∼70년대 남대문에 구제품 시장이 크게 섰어요. 그때 아버지랑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패션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괜히 멀쩡한 청바지 사다가 수십 번씩 빨아 구제품을 만들어 입기도 했죠.”

    그는 넥타이 수집광이기도 한데 옷장을 열면 살아생전 부친이 매던 것까지 포함해 무려 500개가 걸려 있다.

    “그동안 감옥살이만 빼고 모든 일을 다 해보고 산 것 같아요. 사람들은 30대는 30평 아파트, 40대는 40평 아파트, 50대는 50평 아파트 뭐 이런 식의 삶의 규모와 욕망을 따르잖아요. 그런데 50대부터는 다시 10평 아파트로 되돌아가서, 사는 공간은 물론이고 재산, 욕망을 조금씩 축소하고 정리해나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이제 제가 가지고 있는 수집품도 남한테 줄 것은 주고 슬슬 정리해나갈 생각입니다.”

    대신 젊은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좀더 광범위하게 구축해 ‘재미있는 공간’만은 늘려가고 싶다고 한다.

    ‘본성 지키기’의 중요성

    “젊은이들의 문화를 알고 싶어 요즘 인터넷 채팅을 자주 하는데 31세라고 속이고 채팅방에 들어가요. 그런데 한 10분 정도 채팅방에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상대방으로부터 ‘당장 나가!’라는 문자가 날아와요. 타이핑 속도가 느리니 나이가 들통날 수밖에요.”

    하지만 ‘소리바다’에서 최신 음악을 다운받아 들을 만큼 ‘젊은 감각’이 살아 있다.

    그는 숨겨진 ‘본성’을 확인해보기 위해 스크린에 얼굴을 내민 적도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2’ 카메오 출연이 그것인데,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며칠 동안 임권택 감독 꽁무니를 쫓아다닌 끝에 겨우 단역을 하나 따냈다고 한다. 그의 역은 종로 시장통에서 물방개를 파는 장사꾼. 이 일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무엇이든 저질러놓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인생 최고의 자산은 자기 자신이죠. 자산을 지키려면 다양한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흡수력’을 최대한 늘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자는 것은 죽는 것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 자기 본성대로 원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낭만 아닐까요?”

    그는 친분이 두터운 탤런트 유인촌씨가 바쁜 중에도 악을 쓰며 ‘스노보드’를 배우는 것에 자극받아 3년 전부터 산악자전거를 타고 있다. 이쯤에서 멈출 법도 하련만 박기태 대표는 앞으로 헬리콥터 조종에도 도전장을 던질 계획이라고 했다.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윤박사는 스틸 사진 촬영을 하는 아내 조숙희씨와 함께 매주말 철새 도래지를 찾는다

    대전 동구에 위치한 ‘윤대호 가정의학과’를 찾았을 때 의학박사 윤대호(54) 원장은 환자 치료에 여념이 없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대기환자만 해도 어림잡아 20명. 그런데 환자대기실 풍경이 다른 병원과는 사뭇 달랐다.

    벽면에는 ‘형제’ ‘엄마 엄마 엄마’ 등의 제목을 단 대형 새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고 TV 모니터에선 독수리의 고공 활공이 펼쳐진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는 대신 TV 모니터를 채우는 까만 독수리떼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매년 11월이면 저 독수리가 티베트에서 6시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날아 한국으로 옵니다. 800마리 정도가 오는데 키는 1m, 날개만 3m 정도예요. 독수리는 죽은 동물만 처치하는 ‘환경청소부’라 할 수 있는데 8㎞ 전방에 있는 냄새도 감지할 만큼 후각이 발달해 있죠.”

    진료실에서 나온 윤원장이 즉석에서 ‘독수리 강의’를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가 촬영한 자연다큐멘터리로 착각할 만큼 안정된 촬영감각을 보이는 동영상은 윤원장의 작품이고, 벽면에 부착된 야생조류 사진은 병원에서 함께 일하는 부인 조숙희(45·임상병리사)씨의 솜씨인 것이다.

    윤원장은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야인(野人)’으로 돌변한다. 방송용 ENG 카메라를 둘러메고 이들 부부가 찾는 곳은 전국의 철새도래지. 볼보 4구륜 크로스컨트리가 그의 오프로드를 책임진다.

    “20년 동안 주말이면 어김없이 새를 찍으러 돌아다녔어요. 여름에 폭우가 쏟아져 새들을 볼 수 없으면 그냥 우산을 쓰고 철새도래지를 걷죠. 그렇게라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새의 날갯짓을 쫓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낀다는 윤원장. 이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새박사’라고 부른다.

    ‘노랑머리 할미새’를 발견하다

    현재 국내에서 관찰 가능한 새의 종류는 70∼80가지의 텃새를 포함해 340여 종. 그는 지금껏 흑고니, 왜가리, 백로 등 300종이 넘는 야생 조류를 동영상 카메라에 담았다. 병원에는 영상편집실이 따로 마련돼 있는데, 1000여 개의 촬영 테이프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의 영상편집실은 ‘야생조류 비디오도서관’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 새 전문가들도 그에게 새에 관한 자문과 영상자료를 요청해올 정도다.

    “지난 1999년 제가 처음 발견해 ‘노랑머리 할미새’라고 이름을 붙여준 새도 있어요. 또 다리가 길고 제비처럼 생긴 ‘장다리 물떼새’도 제가 국내에서 처음 발견했지요.”

    이렇게 그가 촬영한 새는 KBS 9시 뉴스에 방영되기도 하고 ‘철새들의 합창’ ‘잃어버린 둥지를 찾아서’ 등의 자연다큐멘터리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만큼 새 촬영에 기울이는 그의 노력과 정성은 대단하다.

    “화려한 옷을 입으면 새 눈에 금방 띄니까 여름에는 초록색, 겨울에는 낙엽색 옷을 주로 입어요. 새에 가까이 다가가려 비누나 향수도 전혀 쓰지 않죠. 새와 소통하기 위해 최대한 키를 낮춰 작아 보이게 하는데, 뷰파인더를 통해 하루 종일 새만 관찰해도 좋아요.”

    ‘효도관광’ 명목으로 양가 부모를 철새도래지에 모시고 간 일도 있지만, 지금껏 동행한 누구도 두 번은 이들을 따라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야생조류 탐사과정은 고생스럽다.

    “저는 동영상 촬영을, 아내는 스틸사진 촬영을 주로 하는데, 각자 짊어지는 장비 무게만 해도 약 40∼50㎏이 돼요. 워낙 짐이 많다 보니 도시락을 들고 다닐 여력이 없죠. 새를 쫓아 산길, 강줄기를 따라 걷다 보면 하루 종일 밥 굶는 일은 보통이에요.”

    야생조류에 익숙해져서일까 새를 해석하는 그의 시각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꿩 먹고 알 먹고’를 ‘일석이조’라고 해석하는데 저는 오랫동안 꿩을 관찰하면서 다른 해석을 하게 됐어요. 한번은 산불이 났는데 꿩이 둥우리 속의 알을 지키기 위해 강물에 자기 몸을 적셔 알을 감싸더라고요. 몸이 마르면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요. 그러다가 산불이 번지면서 어미 꿩도 알도 다 타버렸죠. 이를 발견한 사람이 꿩도 먹고 알도 먹으면 일석이조가 되는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꿩은 그만큼 모성애가 강한 새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이 참 많아요.”

    그런가 하면 금실 좋은 부부 사이를 ‘원앙’에 비유하는 것도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관찰해보니까 원앙만큼 바람둥이도 없어요. 원앙 수컷은 짝짓기를 끝내고 수 초 안에 다른 암컷을 찾아 또 짝짓기를 해요. 반면에 기러기는 한 번 짝짓기한 암컷하고만 평생을 함께 살아요. 그러다 상대 기러기가 먼저 죽으면 외기러기 신세로 삽니다. 그래서 ‘짝 잃은 외기러기 신세’란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주말마다 새 촬영에 나서다 보니 마치 ‘걸어다니는 야생조류사전’처럼 새에 관한 정보가 술술 쏟아져나오는 윤원장. 몇 끼니 밥을 굶어도 짝짓기, 새끼 키우기 등 ‘새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이 생기고, 무엇보다 그가 만나는 환자들에게 ‘자연’을 보여줄 수 있어 새 촬영만큼 좋은 취미도 없다고 한다. 부부 사이에 정을 키우는 데도 새 촬영이 일등공신이란다.

    “평일에 부부싸움하고 말을 안 하다가도 토요일만 되면 어쩔 수 없이 화해해요. 같이 새 촬영을 가야 하니까. 촬영 나가서 서로 찍으려는 새가 다르면 멀리 떨어져 있기 일쑤인데 그때는 무전기로 소곤소곤 대화를 합니다. ‘새가 당신을 경계하고 있으니 조심해라’ ‘새가 도망간다’ ‘여보! 보고 싶으니까 이쪽으로 와’ 뭐 이렇게 대화하다 보면 연애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부부의 취미가 같다 보니 주고받는 생일 선물도 여느 부부와 다르다. 주로 고배율 카메라 렌즈를 주고받는데 이렇게 20년 동안 하나둘씩 사들인 촬영장비만 해도 디지털 카메라, 방송용 ENG 카메라, 망원렌즈, 디지털 편집기 등 10억원어치가 넘는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맞춰온 디지털 카메라용 특수 렌즈를 6600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윤원장은 이런 장비를 들고 기회만 닿으면 일본, 싱가포르 등으로 해외 촬영을 다닌다.

    “새 촬영을 하기 전에는 ‘자동차 스피드광’이었어요. 대전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45분밖에 안 걸렸으니까요. 도요타 세리카를 타고 시속 200㎞로 달리면서 남한 일주를 6시간 만에 끝내기도 했고요. 결혼 전 데이트할 때도 대구, 전주, 광주 등 전국을 돌면서 하니까 처남이 누나 죽을까봐 자동차 타는 걸 말리더라고요. 처남이 사진학과 교수인데 ‘사진이 정말 재밌으니까 취미를 바꿔보라’고 권유해서 지금은 새박사 소리까지 듣게 됐습니다.”

    누구나 한 가지 일을 너무 오래하거나 한 장소에 길게 머물면 훨훨 날아다니는 기술을 잊게 마련이다. 아무리 ‘큰 날개’가 있어도 말이다. 중년이 되면 ‘열정’은 사라지고 ‘불안’만 남는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중년의 나이는 더 이상 비상을 꿈꾸지 않는 퇴화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대호 원장의 중년은 세월의 궤적을 훌쩍 거슬러 올라 첫 비상을 꿈꾸는 아기 새의 열정을 닮아 있었다. 새들의 사생활에 탐닉하면서 인생의 바다를 논스톱으로 항해하는 그의 날갯짓이 퍽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도청장에서 ‘국가대표’ 와인 전문가로]보르도 와인 아카데미 원장 최 훈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30대에 시작한 와인 사랑이 이제와서는 최원장의 삶과 비즈니스를 끌고 가는 핵심이 됐다

    ‘불도저’와 ‘와인’, 이 둘의 공통점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렇다 할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며 사는 사람이 있다.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 최훈(67) 원장이다. 그를 만나면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이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최원장은 전 철도청장이다. 공직에 몸담던 시절 그는 해운국장, 관광국장 등 다양한 자리를 거치며 ‘불도저’란 별명을 달고 살았다. 그만큼 대단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난 1984∼85년, 산업합리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해운업 통폐합’도 그의 작품이다.

    이런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국내 최초의 본격 토털 와인 교육기관인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를 차린 것은 누가 봐도 파격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물주 노릇만 하는 ‘예비역’으로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여전히 팔팔하게 뛰는 ‘현역’이다. 가나아트센터 2층에 위치한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를 처음 찾았을 때도 그는 국내 특급호텔 임직원 40여 명을 앉혀놓고 와인 강의에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제가 와인 아카데미를 차리니까 친구들이 ‘술 좋아하니까 그렇겠지’ 하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공직에 있을 때는 소주나 독한 위스키를 마시다 쓰러지는 ‘크레이지(Crazy) 문화’에 속해 있었지 와인 마실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지금도 그런 어리석은 음주 문화가 되풀이되는 곳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건강’과 ‘멋’을 생각하는 음주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어 와인 아카데미를 열었습니다. 이제 와인도 ‘패션’이잖아요.”

    지난 2000년 문을 연 보르도 와인 아카데미는 주로 호텔, 레스토랑, 클럽 등에서 와인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는 임직원,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와인 비즈니스와 관련한 창업 희망자, 일반 와인 마니아 등에게 전문적인 와인 교육을 실시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상당수 와인 전문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독일, 프랑스 등에서 전문 강사를 초빙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업 CEO들의 발길이 의외로 잦다는 것이다. 2개월 단위로 마련되는 ‘CEO를 위한 와인 과정’에는 매번 10∼15명의 CEO들이 몰려든다. 주로 40∼60대지만 간혹 30대 벤처기업가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CEO가 알아야 할 와인의 기본 매너를 가르칩니다. 해외 영업 기회가 많아지는 만큼 ‘글로벌 에티켓’의 중요성도 차츰 커져 CEO들의 호응이 높아요. 명색이 CEO란 사람이 외국 파트너로부터 좋은 와인을 대접받고도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면 참 창피한 노릇이죠. 그래서 수업시간에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 각 산지별 와인을 직접 시음해 보면서 적절하게 맛을 표현하는 화법을 교육하고 라벨 읽는 방법도 가르쳐줍니다.”

    가령 와인 한 모금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스치고 넘어가면서 매력적인 향을 입 안에 남겼다고 치자. 단순히 ‘크~ 술맛 좋다!’고 걸쭉한 감탄사를 연발했다간 분위기 깨기 십상이다. 적어도 와인의 여운이 좋다는 뜻의 ‘Good Finish!’나 ‘Good Finish Longer and Longer!’ 정도의 대사는 흘려야 저녁 식사 테이블의 분위기를 낭만적으로 이끌 수 있다.

    매너가 경쟁력인 시대에 와인 문화를 몸에 익히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지구촌 문화의 흐름을 따르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비싼 와인만 마신다고 CEO가 아니에요. CEO는 가장 밑바닥에서 최고급까지 모든 와인을 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꼭 필요한 사업 파트너를 만났을 땐 최고급 와인을 시키면서 한껏 기분을 낼 줄도 알아야 하고, 회사 파티 때 직원이 쓸데없이 비싼 와인을 주문하면 ‘비싼 거 말고 2만원짜리 마셔도 충분해’라고 의견을 말할 정도의 기본 상식은 갖추고 있어야지요.”

    글로벌 시대에 와인도 하나의 ‘전략’이자 ‘무기’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와인 아카데미를 거쳐간 200여 명의 CEO들은 ‘클럽 르 서울(Club Le Seoul)’이란 와인모임까지 만들어 아카데미 졸업 이후에도 다양한 ‘전략’을 끊임없이 몸으로 익히고 있다 한다.

    “회원들끼리 일년에 두세 차례 호텔에 모여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각종 와인을 시음합니다. 제가 프랑스 여행에서 새로 발견한 와인을 선보이면서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맛있게 마시는 방법과 어울리는 치즈도 추천하죠.”

    그의 전문지식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순간인데, 최원장은 클럽 르 서울 이외에도 각종 모임에서 인기 상한가다. 최원장만큼 와인의 세계에 통달한 사람을 찾기 힘들 뿐더러, 그를 통해 ‘모르고 마시는 와인보다 알고 마시는 와인이 훨씬 맛있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기꺼이 그의 ‘명강의’에 귀를 맡기기 때문이다.

    최원장의 와인 예찬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는 와인을 제대로 알기 위해 불어 공부에 매달리고 프랑스를 200번 이상 방문한 노력파다. 프랑스 뿐 아니라 와인이 만들어지는 나라는 남미를 제외하고 모두 다 가봤다고 한다.

    “와인을 제대로 알려면 우선 불어를 잘해야 하고, 포도생산지와 샤토(양조장)를 다녀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와인 전문가라고 할 수 없어요. 저는 해마다 서너 차례 사람들을 모집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으로 ‘와인 현장 학습’을 떠납니다. 지난달에도 파리에서 출발해 렝스, 스트라스부르, 리옹, 아비뇽, 마르세유 등 프랑스 동남부에 있는 와인 생산지를 돌아보고 왔지요.”

    한 해 평균 40일을 와인 현장 학습에 투자하는, 기능에 치중한 ‘소믈리에’가 아니라 그야말로 ‘마에스트로(장인)’란 칭호가 어울리는 전문가다.

    최원장이 처음 와인에 눈뜬 것은 1967년, 프랑스 한 호텔의 실습생으로 있던 때였다.

    “교통부 관광국 평직원으로 있을 때 프랑스에 갈 기회가 생겼어요. 거기서 1년간 호텔경영학을 공부했죠. 와인 학습도 필수과정이라 자연스레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 무렵 니스의 한 호텔로 실습을 갔는데 그 곳에선 그레이스 켈리를 비롯, 세계 유명인을 위한 패션쇼며 파티가 자주 열렸어요. 파티가 끝난 후에는 좋은 와인들이 남게 마련인데, 일 끝내고 종업원들과 그걸 맛보면서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죠.”

    최초의 ‘국산 와인’은 ‘마주앙 화이트’다. 그 역시 마주앙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86년 세계관광기구(WTO) 아태지역 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심화학습’을 할 수 있었다.

    노력과 열정 없이는 만족도 없다

    “제 취향이요? 그런 것 없어요. 저는 모든 와인을 골고루 즐겨 마셔요. 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나 특정 브랜드만을 고집하다 보면 염증을 느끼게 되거든요. 이것저것 바꿔 마셔봐야 좋은 것, 나쁜 것을 비교할 수 있죠. 레드 와인은 돼지고기, 쇠고기 요리에 곁들여 마시면 좋고, 화이트 와인은 새우나 게, 대합, 오징어회를 안주로 마셔야 식욕이 돋아요. 하루 3잔 정도 마시면 기분 좋게 지낼 수 있고 건강에도 해롭지 않아요. 그런데 술꾼이 어떻게 3잔만 마시고 말겠어요. 그럼 성인군자 되는 거지. 하루 한 병은 예사로 마셔요.”

    최원장은 서울 반포동에 100평 규모의 와인 전문숍 ‘뚜르 뒤 뱅(Tour de Vin)’을 운영하고 있다. 뚜르 뒤 뱅은 불어로 ‘와인의 여행’이란 뜻인데 이곳은 와인 문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취급하는 수입 와인만 해도 600여 종. 프랑스, 칠레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가져온 와인도 있다. 그는 국내에 수입되는 모든 와인의 라벨을 욀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집에 보유하고 있는 와인은 약 30병. 값비싼 와인을 수집하는 것에는 별 취미가 없다. 해외 여행길에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와인을 발견하면 꼭 챙겨오는 정도다.

    하지만 책 욕심은 상당하다. 영어, 불어, 일어, 중국어에 능통한 그는 해외여행을 할 때 와인과 관련한 책은 모두 손아귀에 쥐고 들어온다. 이렇게 모여 그의 서재를 장식한 와인 전문 서적만도 수백 권. 매일 새벽 4시에 눈을 뜨면 와인 관련 책을 읽고 와인에 관한 글도 쓴다. 이미 ‘포도주 그 모든 것’이란 책도 냈다. 더 방대한 규모의 후속타도 준비중이다.

    “예순이 넘어 창업을 했고 그 나이에 경영을 배우느라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난해 매출 총액이 10억원 남짓 됐으니까 그렇게 손해본 셈은 아닌가요? 아무리 인체 메커니즘이 훌륭해도 나이가 들면 시각, 미각, 후각 기능이 퇴화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더 늦기 전에 후학을 위해 와인의 종류, 문화사 등 와인의 총체적인 것을 책으로 남기고 싶어요.”

    외국에서 와인 전문가가 서울에 오면 종종 ‘닥터 최’를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받는다. 예전에는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던 사람들인데 그도 모르는 사이 ‘와인 전도사’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돈이 많다고 누구나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화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멋’도 몸에 밴다. ‘불도저’를 닮은 와인 전도사는 이런 평범한 이치를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폭탄주, 독주로 회오리치는 ‘크레이지 문화’가 과연 최훈 원장이 주도하는 새로운 와인의 물결에 부드럽게 압도당할지 두고 볼 일이다.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하루 4시간씩 연극 연습에 몰두하는 김대표. ‘진짜 배우’가 될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왠지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불안감이 들더군요. 이전에는 머리 속에 사업 확장할 생각만 가득했는데, 불현듯 ‘이렇게 바쁘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제동이 걸리더라고요. 주책인지 모르겠지만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창텔레콤 김인수(47) 대표는 누가 봐도 유쾌한 ‘외도’에 빠져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정보통신 사업에 매진하느라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가 늦바람이 난 것. ‘일탈’에 가속도가 붙은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어 보인다.

    지난 3월20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극 ‘생일파티’(해럴드 핀터 원작)가 올려진 무대에서 흰머리의 60대 남자로 변신한 그가 대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객석에선 부인 박남주(47)씨가 연극배우로 변신한 남편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두 아이들도 자못 흥분한 표정이었다. 막이 내리자 아이들은 아빠에게 달려가 찬사를 던졌다.

    “아빠, 정말 멋있어요!”

    프로 극단 문을 두드리다

    김대표는 이 무대를 위해 3개월을 투자했다.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면 저녁 7시. 밤 12시까지 꼬박 5시간 동안 연극 연습에 몰두하고 새벽 1시가 돼서야 집 문턱을 넘었다.

    “틀에 짜인 역할만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잖아요. 일탈의 욕구도 커지고요. 그런데 연극 무대에 오르면 그 욕구가 다 충족되는 게, 마음이 정말 개운해져요. 내면에 숨어 있던 표현의 욕구가 일제히 발산되면서 예술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나 할까요. ‘살아 있다’는 느낌 그 자체죠. 그런 활력이 사업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가 사업가와 연극배우 겸업을 시작한 때는 지난 1994년. 극단 ‘실극’(회장 이태식)의 단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서울대 건축공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시절 서울공대 연극회에서 활동하며 연기는 물론 직접 희곡도 쓰고 연출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실극’은 서울공대동문극회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모임이다.

    “전문 연극인으로 사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교수, CEO, 연구원 등 생업에 종사하면서 2∼3년에 한 번 꼴로 무대에 섭니다.”

    대학시절 그는 연출가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배우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긴다. 이유는 하나. 해방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밖에서는 CEO이지만 일단 무대에 서면 플레이보이도 되고 여관집 주인 노릇도 할 수 있어 그렇단다.

    “이번에 제 무대를 본 동문들이 ‘내면연기가 많이 좋아졌다’고 칭찬하더군요, 하하. 대학 시절에는 ‘너 어디 모자라냐? 왜 팔, 다리를 제대로 못 움직이냐?’는 모욕적인 평가도 많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자극을 받으면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연습을 하곤 했죠. 요즘은 특별히 누가 뭐라 그러는 것도 아닌데 문득문득 배우로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

    그래서 또 ‘한 건’ 저질렀다. 인터넷을 통해 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프로 극단의 오디션에 응모한 것이다. 동문극회 활동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였다.

    “연극연출가 채윤일씨가 전재산을 털어 ‘2003 채윤일 연출시리즈’를 기획했는데, ‘이상의 날개’ ‘엘렉트라’ ‘진땀 흘리기’ 등 8편의 연극을 계속 무대에 올리는 거지요. 다행히 발성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지난 4월 상연한 ‘진땀 흘리기’(이강백 작)에 조선시대 ‘신하’ 역으로 캐스팅될 수 있었죠.”

    난생 처음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한 무대에 설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 앞에서 핏대 올리는 신하 역이었어요. 대사는 별로 많지 않았어요. 다른 신하들 틈에 섞여 우르르 몰려다니고 가끔 소리 한 번씩 지르는, 말 그대로 단역이었죠. 비중은 크지 않지만 연습시간에 빠지면 절대 안 되니 최선을 다할 밖에요.”

    비록 햇병아리 배우지만 무대를 향한 그의 열정은 뜨겁기만 하다. 매일 하루 4시간씩 연기 연습에 몰입하고, 주말이면 산을 찾아 마음껏 소리를 지르며 발성 연습도 한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볼 때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표정이나 동작을 따라 해본다. 거울 보고 실성한 듯 웃어대는 연습은 스스로도 이골이 날 만큼 했다.

    “배우가 되려면 우선 예술적인 감수성이 있어야 해요. 끊임없이 화술훈련과 신체훈련도 반복해야 해요. 10년 전쯤에 전문 학원에서 3개월 과정 화술훈련을 받았고, 신체훈련에 도움이 될까 싶어 3년째 단전호흡을 하고 있어요. 보통 배우들은 몸을 단련시키려 춤이나 요가를 하는데 저 역시 요가 동작을 배우며 스트레칭에 신경을 많이 쓰죠.”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연극 ‘생일 파티’에서 60대 노인으로 분한 김대표

    이런 그에게는 아내 박남주씨가 가장 적극적인 후원자다. 박씨도 이대 재학 시절 사대연극반 단원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을 이어준 것도 연극이었다.

    “한 여성단체에서 기획한 페미니즘 연극을 하면서 아내를 만났어요. 연극연습이란 게 힘도 많이 들지만 낭만적인 구석이 있거든요. 또 동고동락 하다 보면 끈끈한 정도 생기고요. ‘무대 맛’이 뭔 줄 아는 사람이라 격려를 많이 해줍니다.”

    그는 아무리 귀가가 늦어도 1주일에 2∼3회는 부인과 한강 둔치를 산책하며 ‘동지애’를 확인한다. 두 달에 한 번은 대학로를 찾아 연극도 보고 데이트도 즐긴다.

    사실 김대표는 사업가이긴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갈망이 매우 깊었다. 경기고 재학시절 쓴 단편소설이 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심사를 거쳐 화동문학상을 받았고, 당시 인기를 끌던 청소년 잡지 ‘학원’에 또 다른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쩌면 남자의 중년은 그동안 돌보지 않았던 감수성이란 이름의 ‘아이’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김인수 대표는 연극 무대를 통해 그 아이를 훌륭히 키워나가고 있었다.

    [시 쓰고 만화 읽는 유쾌한 보헤미안]건축사무소 S.Y.A 대표 함성호

    서울 경복궁 근처에 있는 건축설계사무소 ‘S.Y.A’를 찾았다. 함성호(40) 대표를 만나기 위해서다. 2층짜리 단독주택을 개조한 사무실에는 간판도 없고, 벽은 마치 폭탄 맞은 건물처럼 여기저기 벽돌과 콘크리트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떤 벽은 망치로 주먹만한 구멍을 함부로 내고 다시 미대생들이 데생에 활용하는 미니 석고상을 쑤셔넣어 더욱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비구상 작품을 보는 것 같다.

    잠시 후 나타난 함대표는 건축가이자 시인이다. 설계도면과 시. 언뜻 보면 ‘코드’가 달라도 한참 다른 듯한 두 분야에서 그는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56억 7천만 년의 고독’‘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등 3권의 시집을 펴냈다. 첫 시집의 경우 7쇄를 찍는 등 지금껏 1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또한 그는 만화평론가이자 건축비평가이기도 하다. 티베트 기행 산문집 ‘허무의 기록’과 만화평론집 ‘만화당 인생’도 그의 작품이다. ‘만화당 인생’의 경우 책표지에 직접 일러스트를 그려 넣기도 했다.

    삶이 궁금해 시를 쓴다

    “건축가가 시를 쓴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두 가지를 다 하냐’며 신기해해요. 개중에는 ‘한 우물만 파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고요. 저도 처음에는 한 우물만 팠어요. 그런데 그 건축이라는 한 우물만 계속 파다 보니 여러 지층이 나오더군요. 깊이 파들어 갔는데 한 가지 지층만 나오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언어를 다루는 문학과 공간을 만지는 건축은 서로 대등하게 추상적이에요.”

    그는 1988년, 제대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군대에 있을 때 친구들이 보낸 위문편지에 답장을 써 보내면 제법 감탄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곤 한 때문이다.

    “친구들이 ‘글 참 잘 쓴다’면서 문학을 해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권하더군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가 ‘무기’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막연한 동경만 있었지 진지한 고민은 없었거든요. 제대하고 3개월 동안 설악산 근처 누나네 집에서 백수 생활을 하면서 24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습니다. 매일 만화방에서만 살다가 처음 만화 아닌 걸 집요하게 들여다본 거죠.”

    그때까지 ‘세 수레의 만화책’은 읽었어도 문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건축기사로 취직해 아파트 현장을 돌면서 습작을 시작했다. 폭발하는 상상력을 건축물로 구현할 수 없음에 아파하며 조그마한 수첩에 시를 적어 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문인들이 강사로 나선 시국강연이 많았는데, 한번은 김규동 시인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 제가 쓴 글을 보여드렸어요. 저는 희곡을 쓴다고 썼는데 김시인은 ‘시가 좋다’며 칭찬을 하시더군요.”

    이를 계기로 시 습작에 더욱 매달린 그는 마침내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를 통해 시단에 데뷔, 1992년 첫 시집을 내놓았다.

    그가 쓰는 시는 말랑말랑한 서정시가 아니다. 실험적 성격이 강해 무슨 ‘난수표’를 보는 듯도 하다. 한 평론가는 그의 시가 ‘건축물처럼 구축적인 형태를 띠고 신화, 지식, 설화, 역사, 이데올로기,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장대할 수밖에 없다’고 평했다. 그 자신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고 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비밀을 여는 열쇠를 시 속에 감춰두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느라 함대표는 세상과 원치 않은 충돌을 겪기도 했다.

    “첫 시집 때문에 욕을 참 많이 먹었죠. ‘시가 아니다’ ‘장광설이다’ ‘요설이다’…. 그 밖에 다른 어려움들까지 겹쳐 폐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시, 건축 모두 접어두고 배낭여행을 떠났죠.”

    ‘도전하는 중년’  5人의 뜨거운 삶

    함대표는 ‘정착민이 아닌 여행자’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산다 했다. 그래서 자유롭고 그렇기에 늘 여유롭다

    중국, 티베트, 네팔, 인도를 도는 8개월간의 긴 ‘방랑’을 시작했다. 마침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했다. 그 현장을 보고 싶어 티베트 행을 결심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 전이라 오퍼상으로 위장해 비즈니스 비자를 땄다.

    “티베트에 가려고 일단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사기를 당해 여행경비가 절반 정도 날아갔어요. 간신히 티베트에 들어가긴 했는데 고소증 때문에 3박4일 동안 죽다 살았죠. 다행히 한국 스님을 만나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는 한국 스님이 준 돈으로 티베트에서 한 달을 머물 수 있었다. 그가 1998년 발표한 티베트 기행 산문집 ‘허무의 기록’은 이때의 경험을 글로 옮긴 것이다.

    그의 여행은 티베트에서 끝나지 않고 네팔, 인도, 태국으로 이어졌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보헤미안처럼 떠돌았다. 돈이 없어 고생도 많이 했다.

    “네팔 국경을 넘을 때도 여행에서 만난 영국 친구가 차비를 내줬어요. 네팔에 머물면서 우연히 사찰 설계 일을 맡았는데 그때 벌어들인 500달러로 친구들에게 진 신세를 갚았죠. 인도에서도 4개월쯤 있었어요. 여행경비를 벌려고 다국적 포커판에 뛰어들었죠. 거기서 번 돈 500달러로 인도 에서 4개월을 버틸 수 있었어요.”

    이때 한국에서는 그가 실종됐다며 난리가 난 상태였다. 집에서는 그가 북한에 납치된 것 같다며 당국에 신고를 했고, 텔레비전 뉴스에까지 그의 실종 소식이 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친구들은 제 유고시집까지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행이란 ‘나’라는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라 말한다.

    “여행을 통해 ‘계획하는 삶’이 참 허무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여행자들은 내일이 없잖아요. 돈이 없으니까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고, 경험해보니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없어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더라고요.”

    그는 당시의 경험이 몸에 배어 ‘나는 정착민이 아니라 여행자’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됐고 이제는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도 알아요. 굳이 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새 여행지라는 생각으로 살면 여유가 생기죠. 그렇게 일상을 여행하듯 살며 나만의 낭만을 추구합니다. 모든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처음이 바로 낭만성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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