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힘 빼고 즐기다보면 ‘명예의 전당’ 오르겠죠?”

‘성찰하는 카리스마’ 고진영

  • 글 | 엄상현 기자|gangpen@donga.com

    입력2015-09-23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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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 빼고 즐기다보면 ‘명예의 전당’ 오르겠죠?”
    ‘내가 태어난 날은 7월 7일이다. 그래서 난 항상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내 성격은 긍정적이며, 밝고 쾌활하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선수에 대한 큰 꿈이 있고, 누구보다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 욕심이 많아서 지고는 못산다. 남이 잘하는 부분을 내 것으로 꼭 만들려는 성격이다. LPGA 무대에서 (선배)언니들과 경기를 하면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 국위선양을 하고 싶다. 최종 목적지는 미국 LPGA 명예의 전당이다.’

    고진영(20·넵스)이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홈페이지에 올린 자기소개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프로 무대에 입문하면서 쓴 글이어선지 솔직하고 투박한 필치, 순수한 꿈과 희망이 엿보인다.

    고진영은 올해 그 꿈에 한발 다가섰다. 넥센·세인트나인 마스터스, 교촌 허니 레이디스오픈, 초정탄산수 용평리조트오픈 등 KLPGA 투어 3승을 올렸다. 데뷔 첫해인 지난해 올린 1승을 포함해 통산 4승. 처음 출전한 세계 대회인 LPGA 리코위민스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악몽, 그리고 ‘골프일지’

    “힘 빼고 즐기다보면 ‘명예의 전당’ 오르겠죠?”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브리티시여자오픈은 너무도 아쉬운 경기였다. 고진영은 3라운드를 8언더파 단독 선두로 끝냈다. 마지막 4라운드에선 10번 홀까지 버디 2개와 이글 1개로 4타를 더 줄여 12언더파로 내달렸다. 2위와는 3타차로 벌어졌다. 우승이 눈앞에 온 듯했다.



    하지만 세계 랭킹 1위 박인비(27·KB금융그룹)의 저력은 무서웠다. 3라운드까지 5언더파 공동 5위에 머문 박인비는 4라운드 전반에만 4타를 줄여 추격의 발판을 놓더니 후반에 이글을 기록하는 등 3타를 더 줄여 12언더파로 낮췄다. 그사이 고진영은 13번 홀 보기, 16번 홀 통한의 더블보기로 무너졌다. 3타차 역전패. 4라운드에서 박인비가 7언더파로 내달린 데 비해 고진영은 1언더파에 그쳤다. 고진영이 못 쳤다기보다 박인비가 워낙 잘 쳤다.

    고진영에게 가장 아쉬웠던 홀은 더블보기를 기록한 16번 홀. 두 번째 샷이 해저드(개울)에 빠진 데 이어 퍼트 실수까지 따랐다. 이 홀을 파로만 막았어도 남은 두 홀에서 1타를 줄여 박인비와 연장전까지 노려볼 만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기를 마친 날 밤 16번 홀이 되풀이되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 악몽을 떨치기 위해 ‘골프일지’에 1라운드부터 4라운드까지 상황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정리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고진영은 한 단계 성숙했으리라.

    브리티시여자오픈 준우승 직후 귀국한 고진영은 곧바로 제주 삼다수마스터즈, 하이원리조트 여자오픈 등 KLPGA 투어에 참가했다. 휴식 없는 강행군이 무리였던 걸까. 하이원리조트여자오픈에서 프로 입문 이후 처음으로 컷오프(예선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올해 초부터 어깨 결림과 무릎 통증으로 악전고투하던 터였다.

    아픈 덕분에 우승?

    “힘 빼고 즐기다보면 ‘명예의 전당’ 오르겠죠?”
    올해 마지막 LPGA 메이저대회인 프랑스 에비앙챔피언십 출전을 앞두고 국내 최고상금 대회인 한화금융클래식에 참가한 고진영을 대회장인 충남 태안 골든베이CC에서 만났다. 먼저 그의 건강 상태가 궁금했다.

    “어깨는 다 나았어요. 담처럼 가볍게 결린 거라 오래가진 않았어요. 그런데 무릎은 아직 좀 힘들어요. 지난번 병원에 갔을 때 물이 찼다고 했는데 그 이후 시간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갔어요. 경기 도중에 좀 아프고, 끝나고 나서도 통증이 있어요. 살짝 붓기도 하고요.”

    ▼ 매주 강행군인데, 병원부터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올 시즌은 마무리해야죠. 무릎 아프고 나서 우승했으니 남한테 아프다는 말도 못하겠어요, 하하. 오히려 골프가 더 잘되는 것 같기도 해요. 아프니까 힘도 덜 들어가고 욕심도 버려서 그런가봐요. 일단은 무릎을 잡아줄 수 있도록 허벅지와 무릎 주변 근육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 브리티시여자오픈이 처음 출전한 LPGA 메이저 대회인데,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를 해보니 어땠나요.

    “그동안 국내 대회에만 뛰다보니 시야도 좁고,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외국 선수들은 뭔가 좀 달랐어요. 날씨가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는 듯 수시로 바뀌는데도 불평 불만 하나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경기하더라고요. 자기관리도 철저한 것 같아요. 피지컬 트레이너를 경기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시합 당일에도 운동하고…. 우리나라에는 그런 선수가 드물거든요.

    경기할 때도 많이 달랐어요. 경쟁자인 다른 선수가 어려운 퍼트를 성공하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더군요.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모습이 멋있었어요. 저는 처음에 축하를 받고 되게 어색했어요. 그런 분위기일 거라고는 상상 못했거든요. 국내 대회에선 선수들이 자기 경기에만 집중하는 분위기예요. 외국 선수들을 보면서 저도 저런 아량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연습도 의미가 있어야”

    “힘 빼고 즐기다보면 ‘명예의 전당’ 오르겠죠?”
    ▼ 이번 대회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고 했는데.

    “저도 공이 잘 안 맞고 스코어가 안 좋으면 즐기는 게 쉽지 않았어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정신 집중도 안 되고, 정신을 다른 데 팔면서 의미 없는 행동을 많이 했죠.

    그런데 이번에 영국 다녀와서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곧바로 제주 삼다수마스터즈에 출전했을 때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거든요. 날씨도 덥고 (역전패 당한) 기분도 잊히지 않은 상태였죠. 그런데 골프를 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도 속상하거나 후회되지도 않았거든요.

    골프에서 점수나 등수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좋은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그걸 보러 오신 분들과 저를 도와주는 분들을 생각하면 제가 경기를 즐기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 하이원리조트여자오픈에서 처음으로 예선 탈락했는데, 그때도 즐길 수 있었나요.

    “그때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어요.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어요. 누굴 탓할 게 아니라 연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큰 자극제가 됐죠. 뭐가 부족했는지 돌아보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골프선수라면 언젠가는 떨어졌다가 올라가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것 아닐까요.”

    ▼ 그래도 첫 탈락인데.

    “저도 예선 탈락하면 충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것 아니더라고요. 누구나 떨어질 수 있는 건데, 그동안 괜히 안 떨어지려고 저 스스로를 쟁여놨던 것 같아요. 물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돼야겠지만. 어쩌면 그 탈락의 순간을 평생 못 잊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순간 느낀 감정이나 생각들, 그 시간이 저 스스로를 깊이 성찰할 수 있게 도와준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과제도 하나 생겼죠.”

    ▼ 어떤 과제?

    “공도 안 맞고 일관성 있게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스윙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래서 지금 많이 연습하고 있고, 덕분에 훨씬 나아졌어요.”

    근력운동으로 비거리 늘려

    ▼ 연습 방법도 달라졌나요.

    “예전엔 죽어라 연습만 했죠. 그게 전부인 걸로만 알고. 하지만 의미 없는 연습은 소용없고, 연습도 의미가 있어야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도 많이 배우는 중입니다.”

    고진영은 ‘박세리 키즈’다. 세 살 즈음이던 1998년, 박세리가 LPGA US오픈에서 우승하는 광경을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TV로 봤다.

    “그 트로피가 너무 예쁜 거예요. 그걸 갖고 싶다고 아빠에게 조르던 게 기억이 나요. 물론 그때는 너무 어려서 골프를 못했죠.”

    골프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부모님과 마트 가는 길에 재미 삼아 집 앞 연습장에 들렀다가 운동 겸 취미 삼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배운 건 중학교 골프부에 들어가면서부터다. 현재 미국 LPGA에서 활약 중인 백규정, 김효주 등이 그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중3 때 친구들과 함께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된 고진영은 고3 때 국가대표로 활동하다가 다음해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다. 여자 골프선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코스대로 걸어온 것. 데뷔 첫해 1승을 올리면서 신인왕에 도전장을 냈지만, 시즌 3승을 올린 친구 백규정에게 밀리고 말았다. 그게 자극제가 된 것일까. 고진영은 지난겨울 베트남 전지훈련에서 혹독하게 훈련했다. 지난해에 비해 몰라보게 살이 빠진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는 2~3kg밖에 안 빠졌어요. 인터벌 트레이닝 같은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을 많이 하면서 지구력과 심폐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그린 주변 숏 게임과 벙커 샷 연습도 많이 했죠.”

    ▼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했나요.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에 11시간 정도 했어요. 다른 선수들 쉬는 시간에도 연습했으니까요.”

    ▼ 올해 3승을 올렸는데, 가장 도움이 된 건?

    “퍼트랑 드라이버 샷을 포함해서 전체로 다 좋아진 것 같아요. 근력운동 덕분에 비거리도 많이 늘었고요.”

    “당장 美 LPGA 가고 싶다”

    브리티시여자오픈 준우승을 계기로 고진영은 미국 LPGA에 진출하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함께 경기를 한 선배 박인비와 유소연, 그리고 친구 백규정으로부터 조언과 자문을 받은 결과다.

    “하루라도 빨리 미 LPGA 분위기에 적응해서 세계의 선수들과 재미있게 경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면서 골프를 하는 것도 굉장히 즐거울 것 같고, 경직된 경쟁보다는 자유롭게 즐기면서 골프를 하고 싶어요. 제가 정말 꿈꾸는 미국 명예의 전당에도 오르고, 또 언젠가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 또 하나의 멋있는 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요.”

    ▼ 어떤 골프 선수가 되고 싶습니까.

    “장난꾸러기 같은 골프선수가 되고 싶어요.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보고, 모험도 하면서 골프를 즐기고 싶어요. 물론 똑바로 치는 골퍼가 이상적이지만, 그렇게만 치면서 나이 먹기에는 뭔가 좀 아쉽잖아요, 하하. 그냥 즐겁게 치면서 선수생활 하고 싶어요.”



    Lady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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