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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있는 문화이야기 ⑭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최초의 지식인, 사상의 순교자 볼테르의 ‘톨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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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프랑스의 철학자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철학자와 좀 다르다. 그러나 철학이란 본래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임을 아는 우리는 계몽가나 사상가, 혹은 우리 시대 말로 지식인 또는 지성인이라 부르는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야말로 철학자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들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는 그 세기말의 혁명과 관련이 깊다. 철학자들이 혁명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 프랑스 혁명 또한 기본적으로 굶주림에서 나온 것이지 철학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물론 혁명이 진행되면서 대의명분이 필요해졌고 그쯤에서 철학이 이용됐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 추구한 이상사회는 세기말 혁명이 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델은 영국이었다. 이를 통해 혁명 후 프랑스에서는 영국의 민주주의를 계승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계몽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18세기 이전까지 유럽은 세계를 ‘신의 것’과 ‘인간의 것’으로 나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았다. 그것을 18세기 계몽사상은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그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바로 ‘법의 정신’(1748년)을 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그리고 ‘사회계약’(1762년)을 쓴 루소다. 이들은 각각 귀족, 중산계급, 장인계급 출신이었다.



그들 중 우리는 유독 볼테르에 대해 무지하다. ‘철학서한·철학사전’ ‘캉디드’ ‘관용론’ 외에는 번역된 책도 없으며 소개된 책도 없다. 다른 두 사람의 저작이 알려진 수준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제1 대표자는 볼테르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프랑스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는 기형적이다.

몽테스키외는 권력분립 이론의 선구자였으나, 귀족 출신답게 강력한 귀족정치를 옹호했다. 이러한 몽테스키외를 비판한 볼테르는 당시의 국왕 체제를 전제로 자유주의를 옹호한 정치적 실용주의자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실학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라마다 전통, 문화, 역사 등의 차이에 따라 정치체제가다를 수 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언론 출판의 자유를 비롯한 인권의 보편성을 믿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그 보편성이 몽테스키외는 귀족, 볼테르는 왕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은 점이었다. 물론 지금 우리는 그런 볼테르에도 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그리 중요치 않다.

지식인·사법기자·법개혁자

볼테르는 1694년에 태어나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기 11년 전인 1778년에 죽었다.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법을 공부한 만큼 법을 잘 알았다. 22세에 정권을 야유하는 풍자시를 써서 구속이 된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종교적 관용, 정치체제, 언론의 자유를 배경으로 발전한 뉴턴과 로크의 학문을 공부한다. 계몽주의를 결정하는 1734년의 ‘철학서한’이 ‘영국 서간’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철학서한’으로 인해 다시 박해를 받게 된 그는 도피한다. 프러시아를 거쳐 제네바로 간다(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1762년 칼라스 사건이 터지자 68세의 노인 볼테르는 분연히 그 사건에 뛰어든다. 그 후 82세로 죽기 몇 달 전 그는 겨우 파리로 돌아온다.

이렇게 평생 박해를 받고 산 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자유와 정의의 옹호자로 받들어진다. 정교분리가 제도화된 후 그의 반가톨릭주의는 빛을 잃게 되나, 니체가 찬양했듯 비열한 모든 기존 가치의 전환을 모색하며 톨레랑스와 희망을 말한 그의 평생에 걸친 투쟁과 사상은 여전히 지식인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나에게 볼테르는 달리 볼테르가 아니다. ‘철학서한·철학사전’을 쓴 고유한 의미의 철학자나, ‘캉디드’를 쓴 소설가 볼테르가 아니다. 그런 르네상스인 볼테르 역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여기서의 내 관심은 아니다. 나의 볼테르는 68세에 작은 재판에 관여해 69세에 ‘관용론’을 쓰고 그 후에도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은 사법기자, 법개혁자, 지식인 볼테르다.

볼테르가 관여한 칼라스 재판은 19세기말 드레퓌스 재판과 같은 ‘오판 사건’이었다. 후자가 졸라와 연결되듯 전자는 볼테르와 연결된 점에서도 유사하다.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68세의 아버지인 프로테스탄트 칼라스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사형을 선고받아,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에 처해졌고, 사후에는 불 속에 던져졌다.

당시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이 사건은 볼테르에 의해 프랑스의 국가적 재판, 나아가 유럽의 세기적 재판이 되었다. 볼테르는 편지, 팜플렛, 판화까지 동원해 그 사건의 문제점을 알렸고, 마침내 재심에서 무죄를 얻어냈다. 지방도시에서 행해진 평범한 사람의 재판에 지식인이 나서 이렇듯 고군분투한 것은 이 사건이 아마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사건이 터진 곳은 프랑스 최남단인 툴루즈의 포목 상점이었다. 툴루즈는 중세 마녀 재판을 불러일으킨 이단의 발생지이기도 하다. 1761년 10월, 칼라스의 집에서 그의 장남 마르크가 죽었다. 칼라스와 가족은 광신적 신교도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한 장남을 독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신교도는 극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1685년의 퐁텐블로 칙령은 프랑스인은 모두 가톨릭이고 신교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어 1724년 국왕은 가톨릭을 유일교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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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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