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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도미는 바닷가 어부 아닌 서울에 거주한 귀족”

  • 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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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로렐라이’ 백제 도미설화 재조명

조선 삼강행실도의 백제 도미설화 삽화.

삼국 시대 왕명을 보면 같은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백제만 예로 들어도 제4대 개루왕과 제21대 근개루왕, 제5대 초고왕과 제13대 근초고왕, 제6대 구수왕과 제14대 근구수왕 등과 같이 선대의 왕명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던 관습이 있었다. 물론 선대왕과 구별하기 위하여 ‘근초고왕, 근구수왕, 근개루왕’과 같이 호칭 앞에 근(近)자를 일부러 붙였다. 이 ‘근’은 ‘大’를 의미하는 ‘근’(>큰)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도미의 사건은 언제 발생한 것인가. 제4대 개루왕 때는 백제 건국 초기라서 도미전의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사회적인 상황이 성숙되지 않았다. 당시 백제는 부족국가에 가까운 작은 나라였고, 고구려 역시 초기 부족국가로 졸본에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 사이엔 대방·옥저·예맥이라는 나라들이 건재하여 있었다. 따라서 도미전의 내용 중 “고구려의 산산 아래에 피신하여 여생을 마쳤다”는 대목은 제4대 개루왕 때에는 실현되기 매우 어려웠던 일인 것이다. 또한 “제4대 개루왕은 품성이 공손하고 조행이 있었다(性恭順有操行)”는 기록이 있어 가능성을 더욱 흐리게 한다. 이 기록이 맞다면 제4대 개루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는’ 그런 잔인한 사건을 자행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남침과 내기 장기

제21대 개루왕 때를 면밀히 살펴보자. 이때의 백제는 영토가 황해도·경기도·강원도 영서(嶺西)·충청도·전라도에까지 확대된 최강의 시대였다. 왕권은 강력했고 왕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도미전의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을 만큼 시대적 배경이 여러 모로 성숙해 있었다. 도미전의 배경이 된 지명인 도미진·천성도·산산이 모두 제21대 개루왕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미진은 현재 경기도 광주시 한강변에 위치해 있다. 그 이전에는 도미진, 산산 등 한자지명 우리말은 없었고 고유지명인 ‘얼매곶, 매시달’만 쓰였다. 지명은 도미전이 4대 개루왕 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제21대 개루왕은 성품이 호탕하고 호전적이었다. 개루왕 15년(469) 백제는 고구려의 남변을 침범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년에 급격히 국세가 기울어 개루왕 21년(475)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서울인 한홀(漢城)은 함락되고 개루왕은 비참하게 전사했다. 겨우 망국을 모면했을 뿐 나머지 부분은 의자왕과 다를 바 없다. 절대적 패인은 개루왕이 고구려에서 밀파한 간첩 도림(道琳)과 바둑을 즐긴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대목은 도미전에서 왕과 도미가 내기장기를 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도미전의 사건은 제21대 개루왕 재위 21년(455∼475) 동안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루왕 재임기간 중에서도 후반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천성도(泉城島)·산산(蒜山) 그리고 고구려에 망명하였다는 대목과 관련이 있다.

도미전에는 도미가 체형을 당한 후 배에 실려 떠내려가다 도달한 섬이 천성도이며, 망명하여 여생을 마친 곳은 고구려의 산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 두 곳은 백제 시대에는 얼매곶과 매시달로 불렸던 곳들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장수왕이 남침하여 백제 영역을 점령한 이후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하였다. 여기서 고구려가 백제 중부 지역의 지명을 개정한 시기는 장수왕이 강점(백제 문주왕 1년, 475)하고 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기가 무작정 늦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가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의 점령지역에서 10군의 땅을 약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왕 때(492∼518)에 얼매곶이 천정구(泉井口)로, 매시달이 산산(蒜山)으로 개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천정구가 후에 천성도(泉城島)로도 불렸거나, 아니면 천정구 부근에 있는 섬 이름이 천성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명이 동일한 ‘천(泉)’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도미전은 배경 지명인 ‘천성도’와 ‘산산’이란 지명이 발생한 시기 이후, 즉 문자왕 말년(518) 이후에 전기화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흔히 노래나 전설에 등장하는 지명은 세월이 흘러도 잘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지어진 시대를 알리는 징표로 남는다. 가령 정읍사,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양산도가 등도 앞에 붙어 있는 지명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도미전은 도미의 신분을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 하였다. 일부에선 도미가 평민으로 직업은 어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편호’는 호적을 말함이니 ‘편호소민’은 ‘호적에 오른 평민’이란 뜻이다. 그러나 도미의 신분을 이처럼 비하한 것은 그 아내의 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적인 꾸밈인 듯하다.

이번엔 ‘삼국사기’ 원본이 위작(僞作)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원본의 내용에서 확인해 보자. 첫째, 당시 상황에서 “벽촌의 촌부가 의리를 안다”는 표현은 현실성이 없다. “두메에 묻혀 사는 아낙네의 절행이 널리 알려져 칭찬이 자자하였다”는 내용도 현실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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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 tohsh@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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