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호

‘국민타자’ 이승엽과 야구전문기자의 6년 교유기

‘홈런 무효’ 화풀이에 찌그러진 캐비닛

  • 글: 김상수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ssoo@donga.com

    입력2003-10-28 1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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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6호 홈런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경신하며 온 국민의 영웅이 된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 선수.
    • 항상 웃는 얼굴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착해빠진 순둥이’라 하지만,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는 ‘못 말리는 승부욕’을 먼저 말한다. 프로 그 이상의 프로, 그 속에 담겨 있는 인간 이승엽 스토리.
    ‘국민타자’ 이승엽과 야구전문기자의 6년 교유기

    지난 10월2일, 기다렸던 56호 홈런을 쳐내고 껑충껑충 뛰며 그라운드를 도는 이승엽 선수.

    기자가 프로야구 취재를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다. 햇수로 따지면 올해로 9년째. “프로야구 담당기자가 된 지 10년이 되지 않았으면 내 작전에 대해 논하지 말라”던 LG 트윈스 이광환 감독의 말을 되새겨보면, 기자도 내년에는 드디어 감독의 작전에 대해 한마디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뜬금 없이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기자가 야구를 전문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한 1995년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해는 OB(현 두산) 베어스가 전년의 불미스러운 항명파동의 앙금을 씻고 프로야구 원년 우승 이후 13년 만에 두번째 우승의 감격을 맛본 해였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훨씬 ‘상징적인’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27)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프로생활을 시작한 해인 것이다.

    “야구선수는 몰라도 이승엽은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슈퍼스타다. 1999년엔 54개의 홈런을 날렸고 올해는 56호 홈런으로 기어이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작성했다. 나이 쉰을 넘긴 ‘국민배우’ 안성기와 ‘국민가수’ 조용필과 달리 그는 불과 20대의 나이에 ‘국민…’이란 칭호까지 얻었다.

    널리 알려진 지극한 효심, 스타이면서 항상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겸손함, 운동선수다운 강한 정신력과 투지, 여기에 잘생긴 얼굴까지 그는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젊은이다. 만약 그가 단순히 운동만 잘하는 선수였다면 ‘국민타자’라는 명예를 얻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때때로 “야, 이 친구 정말 대단하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홈런을 때려내는 능력말고도 여러 장점을 가진 선수다.

    골칫덩어리 삼성 라이온즈



    이렇게 대단한 선수를 기자가 알게 된 건 1998년이었다. 그해 기자는 삼성 라이온즈를 담당하게 됐다.

    프로야구 기자들에게 삼성을 전담 취재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삼성이 워낙 ‘골치 아픈’ 구단이기 때문이다.

    이 팀에는 일단 스타가 많다. 스타가 많다는 건 기사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기사를 많이 쓰기 위해선 그만큼 취재를 열심히 해야 한다. 삼성처럼 한두 명도 아니고 1번부터 9번까지 전부 스타인 팀을 맡은 기자는 흔한 말로 ‘물먹을’ 일도 많다.

    게다가 삼성 라이온즈는 언론의 선수 취재를 차단하기로 이름난 구단이다. 기자들이 라커룸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하고 원정숙소에 들어가는 것도 못하게 했다. 당시만 해도 이 두 장소는 기자들이 선수를 취재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이걸 금지하니 선수들과 친해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밥 먹는’ 거였다. ‘선수들이 개인시간에 기자 만나 밥 먹는 거야 간섭 못하겠지’ 싶어,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에 내려갈 때마다 낮에 선수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얼굴을 익혔다. 가장 까다로운 선수는 당시 주장을 맡고 있던 양준혁이었다. 덩치는 산만한 선수가 이만저만 무뚝뚝한 것이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걸로는 영 가까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날 점심식사를 같이하고 나서는 반응이 달라졌다. 만나면 얼굴 가득 ‘어울리지 않는’ 살가운 표정이 피어올랐다. 양준혁은 “나이는 내가 한 살 어리지만 밥은 더 많이 먹었을 게 분명하니 말 놓고 지냅시다”라며 맞먹기(?) 시작했다. 기자는 “한 살이면 짬밥이 몇 그릇인데 안 된다”고 버텼다. ‘경상도 싸나이’답게 처음에는 까다로워 보이지만 일단 친해지면 화끈해지는 의리파였다.

    양준혁과 함께 당시 ‘왼손 쌍포’를 이뤘던 선수가 바로 이승엽이었다. 기자가 삼성을 담당하기 한 해 전인 1997년 이승엽은 홈런왕(32개) 타점왕(114점) 최다안타왕(170개) 등을 휩쓸며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했다. 화려한 ‘이승엽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것이다. 입단 첫 해인 1995년에 13개, 이듬해 9개 등 2년간 홈런을 22개밖에 치지 못했던 이승엽이 1997년 들어 이처럼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된 배경에는 백인천 감독이 있었다. 백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지도한 주인공이다.

    그해 스프링캠프에서 백감독은 이승엽에게 “넌 어떤 타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승엽은 서슴없이 “홈런을 많이 쳐내는 타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고, 이후 백감독은 방망이의 힘을 타구에 한꺼번에 전달할 수 있는 외다리 타법을 이승엽에게 가르쳤다. 올해 롯데 사령탑에서 물러난 백감독은 “외다리 타법의 단점은 변화구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는 것인데 승엽이는 이를 무난히 극복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외다리 타법은 큰 성공을 거뒀고 이승엽에게 홈런타자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

    기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승엽의 첫 이미지는 1998년초 삼성의 경산연습장에서의 모습이다. 물론 전에도 본 적은 많지만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 인사가 인상적이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살짝 섞인 특유의 말투 있지 않은가. 나중에 개그맨들이 성대모사를 하곤 했던 바로 그 말투 말이다.

    “(비음이 약간 섞인 높은 톤으로) 안녕하십니까, 이승엽입니다.”

    그와는 따로 밥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워낙 기자들에게 잘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야구선수는 딱 두 가지 종류로 나뉠 뿐이다. ‘인터뷰를 잘 해주는 자’와 ‘인터뷰를 잘 해주지 않는 자’. 뜨기 전엔 기자들에게 잘하지만 스타로 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나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승엽은 달랐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언론과의 관계가 원만했다. 어찌나 잘했는지 이제까지 그를 욕하는 기자를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 많은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텐데도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한다.

    덕분에 그와 친해지는 것도 크게 어렵진 않았다. 당시만 해도 다른 기자들보다 어린 축이었던 기자와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승엽은 허물없이 지내는 기자에게 종종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냐?”

    “서울인데요. 밥 사주세요. 여자친구하고 같이 있어요. 서울 오면 밥 사준다고 약속했잖아요.”

    회사 앞으로 나갔더니 여자친구하고 ‘뻘쭘히’ 서 있는 이승엽이 보였다.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다 선택한 곳은 레스토랑이었다. 여자친구가 있으니 분위기 좀 잡아줘야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시 이승엽의 여자친구는 모 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S모양(이승엽의 아내 이송정씨가 이 기사를 보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기자에게 눈을 흘기고 있을 팬들은 진정하시라. 이씨도 남편이 한때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S양은 밝고 명랑한 성격에 똘망똘망한 눈망울, 찰랑거리는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첫눈에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예뻤다. 미국 여배우 피비 케이츠가 기자의 머릿속을 스쳐갈 만큼(영화 ‘그렘린’ ‘파라다이스’ 등에 출연했던 이 80년대 청춘스타는 기자의 어린 시절 우상이기도 했다).

    당시 총각이었던 기자는 속으로 ‘자식, 복도 많네’라며 이승엽을 부러워했었다. 나중에 얘길 들으니 OB 포수였던 박현영(현 경기고 코치)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았다고 했다. 일부 신문엔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기자 역시 잘 됐으면 하고 바랐지만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헤어짐의 아픔이 치유될 무렵 이승엽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아내 이송정씨다. 이승엽은 1999년 겨울 축구선수 안정환 등과 함께 앙드레 김 패션쇼에 출연했다가 모델로 활동중이었던 이씨를 만났다. 당시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으니…. 그 다음은 알아서들 생각하시라.

    친구야 친구

    이승엽을 얘기하려면 두산의 투수 박명환을 빼놓을 수 없다. 둘은 프로야구계에 잘 알려진 ‘실과 바늘’이다. 이승엽을 찾고 싶으면 박명환에게 전화하면 된다. 박명환이 간혹 “이승엽 매니저라고 불러달라”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이승엽이 한 살 위지만 두 사람은 때로 친구처럼, 때로 형제처럼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

    둘이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겨울. 한 선배의 소개로 식사를 같이하면서부터 친해졌다고 한다. 이후로 이승엽은 서울에 올라오기만 하면 박명환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서울에서 잠자리를 해결할 만한 곳이 없었다”는 게 이승엽의 고백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주로 당구장을 찾는다. 이승엽이 당구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둘 다 150점 수준으로 아주 잘 치는 편은 아니지만, 언젠가 한번은 둘이서 밤새 당구를 친 적도 있단다. 박명환이 내기에서 거푸 이겨 8만원을 땄는데 승부욕 강한 이승엽이 박명환을 붙잡고 집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것. 박명환은 “하여간 승엽이 형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둘의 우정이 깨질 뻔했던 위기도 있었다. 2000년초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이하 선수협) 사태가 발생했을 때였다. 당시 이승엽은 구단 분위기 때문에 가입하지 못했다. 이에 분노한 박명환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36번(이승엽의 전화번호 저장번지)을 지우며 “다신 안 본다”고 절교선언을 했던 것. 이승엽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 사건 이후 서로의 오해가 풀리자 둘의 우정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승엽은 박명환 외에도 투수 이혜천, 포수 홍성흔 등 주로 두산 선수들과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다. 연예인으로는 결혼식 축가를 불러준 윤도현, 듀엣 유리상자와 친하고, 대구 구장 장내 아나운서 출신인 개그맨 김제동과는 요즘도 하루에 한번 통화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앞서 박명환이 밝힌 것처럼 이승엽의 유별난 승부욕은 동료들 사이에서 소문난 상태. 남에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게 야구가 됐건 게임이 됐건 상관없다. 그는 “인터넷 고스톱으로 날밤 새는 일도 많다”고 이야기한다. 3000만원으로 시작한 인터넷 고스톱상에서의 사이버머니가 지금은 7억원으로 불어났다고 하니 그가 매사에 얼마나 승부욕이 강한지 짐작할 만 하다.

    ‘국민타자’ 이승엽과 야구전문기자의 6년 교유기

    이승엽·이송정씨 부부의 즐거운 한때. 지난 1월 결혼 1주년 무렵에 찍은 사진이다.

    그런 이승엽에게 1998년은 ‘치욕의 해’였다. 이 해는 국내 프로야구에 용병제가 도입됐던 시즌. 전년도 홈런왕이었던 이승엽은 이 해 홈런 38개를 기록해 두산 우즈(42개)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게다가 우즈는 종전 장종훈이 갖고 있던 시즌 최다홈런(41개) 기록까지 경신한 터였다.

    98시즌이 끝난 뒤 이승엽은 “치욕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선수도 아닌 용병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빼앗겼다는 게 너무 분했다”며 “우즈 꿈을 꾼 적도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늘 웃음 띤 표정과는 전혀 다른 일면이었다.

    경기중에도 그의 승부욕은 여러 번 목격할 수 있었다. 아마도 1999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소는 대구. 당시 이승엽은 우즈의 홈런 기록(42개)에 도전중이었다. 경기 초반 홈런을 날렸지만 5회부터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홈런이 무효가 돼버렸다. 경기가 속개되기를 기다리며 삼성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기자는 갑자기 들려온 “꽝!” 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승엽이 주먹으로 더그아웃 캐비닛 문을 한방 갈긴 것이었다. 홈런이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분한 마음을 애꿎은 캐비닛에 풀었던 것이다. 평소 순하기만 한 이승엽의 이 ‘깜짝 주먹질’에 크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승엽의 두 번째 주먹질을 본 것은 올해 8월9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LG전에서였다. 8회 한 차례 공에 맞았던 이승엽은 9회 ‘빈볼 시비’로 인한 양팀 선수들의 몸싸움 와중에 LG 투수 서승화와 1대1 주먹다짐을 벌였다.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61)씨는 “승엽이가 프로에서 주먹다짐을 벌인 건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후배들이 선배한테 반말하며 일부러 머리 부근을 겨누어 던지는데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 그래도 팬들에게 그런 모습 보이면 안 된다고 크게 꾸짖었다.”

    이로 인해 이승엽은 프로에 입문해 처음으로 2경기 출전정지라는 징계를 받았다.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올 시즌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달성은 좀더 앞당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됐건 주먹다짐으로 악연을 맺은 이승엽과 서승화는 이후에도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징계가 풀린 뒤 이승엽은 8월22일 잠실구장에서 LG 서승화를 다시 만나 4회에 가운데 담장을 넘기는 3점 홈런을 빼앗아 ‘분풀이’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지고 있을 서승화가 아니었다. 그는 9월30일 잠실구장에서 55호 홈런을 기록중이던 삼성 이승엽을 만나 ‘배팅 볼’을 던지며 앙갚음을 했다.

    문제는 3회 이승엽의 두 번째 타석에서 불거졌다. 서승화는 2개의 볼이 선언되자 “스트라이크 존이 지나치게 이승엽에게만 유리하다”고 조종규 주심에게 항의했다. “정면승부할 테니까 공정하게 판단해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는 연달아 시속116㎞, 121㎞, 109㎞의 ‘황당한’ 직구를 던지며 시위했다. “그래, 줄 테니 쳐봐라”하는 투였다.

    그러나 이승엽은 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다”는 이승엽은 경기가 끝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공들을 치고 싶지 않았다. 난 투수가 던진 최고의 공을 받아 쳐 56홈런 신기록을 만들고 싶었다.”

    배팅 볼 투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 대기록을 수립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국민타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하곤 차원이 달라요”

    2003년 10월2일 대구구장. 롯데와의 시즌 최종전에 앞서 이승엽은 “독기를 품었다”고 했다. “아무 때나 독기를 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정말 내가 가진 모든 기량을 이 한 경기에 쏟아붓겠다”는 설명이었다.

    아시아 홈런 신기록에 대한 부담으로 그동안 그가 받은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특히 이날은 새벽에 가위눌릴 정도였다. 아내 이송정씨는 “결혼 후에 오빠가 가위눌린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승엽은 결국 1회 롯데 이정민의 공을 밀어 쳐 좌중월 아치를 그렸다. 대망의 56호 홈런 신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56발의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그라운드를 유유히 도는 이승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자의 머릿속에도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드라마틱한 홈런을 터뜨릴 때마다 기자는 현장에 있었다. 1999년 43호 홈런 신기록부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일본 마쓰자카를 상대로 쳐낸 2점 홈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동점 3점 홈런, 올해 세계 최연소 300홈런까지. 그때마다 이승엽은 항상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완벽했다. 그가 ‘국민타자’가 된 것은 그런 극적인 효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9월25일 기아전에서 이승엽이 김진우로부터 55호 홈런을 빼앗은 날, 경기가 끝난 뒤 기아의 조계현 투수코치와 소주 한잔을 기울일 기회가 있었다. 현역 시절 ‘싸움닭’으로 이름을 날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계현 코치에게 물었다.

    “왜 이승엽이 뛰어난 타자입니까?”

    그러자 조코치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머리가 좋아요. 게다가 IQ(지능지수)외에 EQ(교육지수)가 뛰어납니다. 또 겸손한 데다 성실하기까지 해요. 한마디로 됨됨이가 좋다고 할까요. 운동선수에겐 이런 부분도 중요해요. 나도 현역 때 승엽이에게 홈런 많이 맞았지만 정말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선수입니다. 우리하곤 차원이 달라요.”

    10월8일. 이승엽과 청담동의 한 카페에 마주앉았다. 이날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승엽은 오후에 국정홍보처의 라디오 광고 녹음을 했다. 이승엽이 온갖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냈듯 국민들이 힘을 뭉쳐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자는 것이 광고의 내용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국민타자’라는 그의 닉네임에 착안한 광고였다.

    광고 녹음이 끝난 뒤 따로 시간을 내 한 시간 가량 인터뷰를 했다. 그는 “내가 무슨 말 할 줄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인터뷰예요?”라며 피식 웃어보였지만, 기자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그가 다음 시즌부터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것은 명약관화. 어쩌면 한국에서 하는 마지막 인터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승엽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사실 그는 시즌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쇄도하고 있고 방송에서도 출연해달라고 난리다. 방송 프로그램은 일절 거절하고 있지만 신문사 인터뷰는 시간을 내 응하고 있다고 했다.

    ‘공인’인 이상 언론사 상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입맛 까다로운 기자들을 대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웃는다. 슈퍼스타가 되면 우쭐하고 거만하기 십상이지만 이승엽은 다르다고들 한다. 팬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일이 사진 찍어주고 사인해주고 항상 성의를 다한다. 그런 그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다.

    “힘들죠. 시즌이 끝난 뒤에도 실컷 못 잤어요. 휴대전화에 불이 날 정도예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인상 쓰지 않고 잘 하려고 노력하죠. 얼마 전엔 홍보팀 직원한테 화를 내기도 했어요. 인터뷰를 그렇게 마구 잡으면 어떡하냐고요. 근데 홍보팀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도 미안해요. 그분들도 그게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대신 그는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이 없다며 불평을 털어놓았다. 예전에는 비시즌엔 당구를 쳤지만 요즘은 통 당구장 근처에도 못 갔다는 것. 시즌 중에도 즐기곤 했던 인터넷 게임도 한동안 손을 못 댔다고 했다.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골프도 마찬가지. “전에 연습장에 몇 번 나가봤는데, 서 있는 공 맞추기가 그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다”며 또 한번 웃는다.

    “준플레이오프 때 다친 무릎은 괜찮니?”

    “아직 안 좋지만 나아지겠죠. 다음달에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아테네올림픽 예선 출전에는 큰 지장 없을 것 같아요. 다음주부턴 경산구장에서 훈련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사람은 처음과 끝이 좋아야죠. 올림픽 예선이 우리나라를 위해 뛰는 마지막 경기니까 잘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어요.”

    “어머니는 아시아 홈런 신기록 세운 사실을 알고 계셔?”

    이승엽의 어머니 김미자씨는 지난해 뇌종양 수술을 받아 투병중이다.

    “기억력이 가물가물하세요. 어떤 때는 또렷하다가도 어떤 때는 깜빡깜빡 하세요.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

    새로운 야구인생을 찾아서

    이야기가 계속되자 그는 미국진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털어놓았다. 아내가 요즘 대구 집에서 개인과외 수업을 받으며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 가고 싶은 구단에 관한 이야기며, 받고 싶은 대우에 이르기까지.

    “1루수가 약해서 내가 꾸준히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이 첫째고, 돈은 그 다음”이라는 이승엽은 3~4년 장기계약에 연봉 기준으로 200만달러 정도는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세금하고 여러 가지 부대비용을 빼면 남는 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돈을 벌러 가는 건 아니니까요. 국내에선 더 이상 도전할 목표가 없잖아요. 돈보다 새로운 야구인생을 찾고 싶어요.”

    신혼여행으로 발리를 다녀온 후로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시간이 나면 아내를 위해서라도 꼭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많이 지쳐보였지만 여전히 밝은 그의 표정은 믿음직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인터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있던 여성 팬들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며 몰려들었다.

    이승엽은 기자에게 손을 내밀면서 “겨울에 (박)명환이하고 같이 스키 한번 타러 가자”고 했다. 기자는 “스키도 좋지만 미국 가기 전에 우리집에 와서 밥이나 먹자”고 청했다. 먼 곳으로 고생하러 가는데 따뜻한 밥 한끼는 먹여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 다시 만날 텐데도, 왠지 이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손꼽아보니 그와 알고 지낸 지 2000일을 조금 넘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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