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총력 특집 | ‘핵 왕따 위기’ 한국외교의 초상 |

김일성 | 싱가포르 부러워한 老정객… “개혁·개방하려 해”, 김정일 | ‘아버지 짓누르고’ 제 살길 찾은 ‘美國바라기’, 김정은 | “서울 단숨에 타고 앉겠다”는 담대한 전략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核전략 어떻게 다른가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입력2017-10-0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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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자 고립감에 시달렸다. 북한은 중국에 배신당했다고 여겼다.”

    자오후지(趙虎吉) 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는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까닭을 1989~1991년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한소수교(1990), 한중수교로 인한 고립감과 체제 불안에서 찾는다. 

    자오 전 교수는 김일성 통치 시기부터 북한을 수시로 오간 북한통(北韓通)이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우창(五常)시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되 한국·북한인과 정체성 일부를 공유한다. 부모 고향이 각각 평안도, 경상도다. “김일성은 김정일과 달랐다”고 그는 설명한다.

    “김일성은 나진·선봉을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개혁·개방을 선택한 거다. 김영삼(YS)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느닷없이 죽는다. 자연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YS가 평양에 갔더라면 북한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 간 권력·노선투쟁이 있었다는 건 과도한 추측 아니냐고 질문하자 그가 이렇게 답한다.

    “노선·권력투쟁이 일어났을 공산이 없다고 볼 수 없다. 김정일은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일성은 1994년 7월 25일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7월 8일 사망한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 회고는 자오 전 교수 견해와 맥이 닿는다. 



    북핵 문제의 기원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지 않아 김영삼-김일성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두 정상 간 한반도 통일과 핵 문제에 관한 통 큰 결단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이쪽에서는 김영삼 대통령, 저쪽에서는 김일성 주석이었으니까, 당사자들 각자 위치나 위상으로 보아 ‘무엇인가 이뤄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고 또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한승주, ‘외교의 길’에서 인용) 
    한 전 장관은 1차 북핵 위기 때 중국이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고 기록한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미국, 외교적으로 중국 압박을 받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받아들이는 등 움직였다는 것이다. “1992년 한중수교를 거치면서 중국이 북한을 한 차례 버렸다”는 게 중국학 권위자인 서진영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명예교수) 평가다.

    당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던 정종욱 전 주중대사는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이 ‘그간 2선에 물러나 있었는데 사태가 엉망이 돼버렸다. 조국에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다시 복귀해 남북 정상회담도 열고, 핵 문제도 해결하고 은퇴할 것이다. 남북회담 의제엔 조건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국에 전했다”고 말한다. 김일성은 △남북 정상회담 △제네바 비핵화 협상 복귀 △IAEA 영변 핵시설 사찰 수락을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YS에게 전달했다.

    북한이 핵 개발을 시작한 때는 1980년대 말이다.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다. 닷새 후인 12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내 미국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한다. 12월 31일엔 한국,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요구와 IAEA 사찰을 허용한다고 선언했다. 한미 양국은 1992년에는 팀스피리트(Team Spirit) 군사훈련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한반도가 해빙 분위기로 흘러간 것이다.


    “김정은은 당대 최고 전략가”

    그는 김정은이 김정일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세 가지가 다르다. 첫째, 어리다. 권력을 확실히 잡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인사권을 막 휘두르는 등 무단(無斷)적 행위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젊다는 건 이념이 확고하지 않다는 얘기다. 둘째, 집권 환경이 다르다. 김정일은 20년 넘게 아버지 그늘에 있다가 혼자가 된 반면 김정은은 곧바로 홀로 섰다. 셋째, 외국 유학 경험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 다 봤다. 이 셋을 합치면 김정은이 변화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고 봐야 한다. 김정은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개혁·개방으로 가면 체제가 흔들리고 개혁·개방을 하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는다. 그 사람들이 아파하는 게 뭔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정확히 파악해 그것을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김정일은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고 말하곤 했다. ‘김정은의 북한’ 또한 ‘비핵화는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라는 태도를 밝혀왔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는 일방적 핵 포기가 아니다. 미국 위협 해소(평화협정 및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전체 비핵화(미국 핵우산 폐기)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일한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김정은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김정은은 당대 최고 전략가다. 북한의 목을 쥔 중국이 하지 말란 짓을 하면서도 큰 벌 안 받고 이겨내고, 미국이 예방 타격을 협박하는 생존 게임에서도 기 안 죽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미치광이 취급하나.”(‘주간동아’ 1004호 인터뷰에서 인용)

    생존을 위해 김일성 뜻을 거스르고 핵무장에 나선 김정일은 ‘미국바라기’ 측면이 있었다. 핵과 미사일을 북·미 관계 정상화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태도를 내비쳤다. 북·일 수교를 통한 식민지 지배 보상금에도 관심이 많았다. 김정은은 핵을 체제 보장이나 협상용으로 여긴 김정일과 다르다. 김정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담대하면서도 입체적인 전략을 내놓았다. 김정은이 손에 쥔 ‘핵사용 설명서’는 평화협정→미군철수→통일대전→북한 주도 통일을 가리킨다.



    “수렁으로 몰릴 것”

    “인민군대에서는 서울을 단숨에 타고앉아 남반부를 평정해야 한다. 전략군에서는 앞으로 태평양을 목표 삼아 탄도로켓 실험을 많이 해서 전략 무력을 실전화해야 한다.”(김정은)

    서울을 순식간에 평정하고, 핵과 미사일로 미국 핵우산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전시 미군 증원을 막겠다는 것이다. 자신감 가득한 야심가, 김정은은 핵무기를 완성한 후 협상장에 나올 것이다. 미국·중국과 ‘맞짱’ 뜰 핵보유국이 됐다고 선전할 것이다. 경제 제재를 해체시키고 경제 발전 재원을 마련하려 들 것이다. 핵-경제 병진 노선 성공을 이뤄내려 할 것이다. 김정은은 성공할 것인가.
     
    자오 전 교수는 이렇게 전망한다.

    “핵-경제 병진 노선이 한계에 다다랐다. 한계가 온 시점부터 3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3년이 지나도 이런 상황에 이어지면 김정은은 수렁으로 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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