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서울컬렉션을 보는 쇼퍼홀릭의 자세

  • 동아일보 방송사업본부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9-11-03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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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컬렉션을 보는 쇼퍼홀릭의 자세

    2009 추계 서울컬렉션의 피날레를 장식할 디자이너 지춘희씨의 지난해 쇼 모습.

    어떤 사람들은 ‘신상‘(신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탤런트나 가수라고 생각한다. 그 예로 가수 서 인영이나 탤런트 김혜수를 든다. 이런 인식은 상당히 그럴듯하다. 유명 연예인 같은 트렌드 세터들이 방송 등을 통해 스쳐 지나가듯 ‘노출’한 물건은 대중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는 잘 몰라보는 사람도 한눈에 신상임을 알아차리는 거다. 물론 여기에도 시스템이 작동하곤 한다. 예를 들면 유명인사가 자사의 물건을 든 모습이 찍힌, 파파라치의 (동)영상을 본 홍보담당자는 어떻게든 그 사진을 확보해야 한다. 홍보용으로 이만한 ‘대박’ 거리도 흔하지 않다. ‘평범한’ 검은색 가방을 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모 가방 브랜드 행사장에 커다랗게 걸린 이유다(그 홍보담당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을 누구보다 반가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신상의 기원’은 1년에 두 번 런던, 밀라노, 파리, 뉴욕에서 열리는 4대 컬렉션이다. 약 반 년씩 계절을 앞서 선보이는 4대 컬렉션에선 완전히, 절대로, 새로운 패션을 선보인다. 여기엔 심지어 신형 ‘태도’(요즘 이를 ‘애티튜드’라 부른다)와 반짝거리는 가십들도 포함된다. 수많은 짝퉁의 기원도 사실 4대 컬렉션에 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선보이는 건 완전히 새로운 상상력이다. 이것이야말로 컬렉션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설레게 하는 진정한 이유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 ‘5대 컬렉션’을 지향하는 서울컬렉션이 있다. 4대 컬렉션 다음으로 오는 컬렉션이 왜 도쿄나 시드니, 혹은 리우데자네이루가 아니라 서울일까? 상하이에선 가만있을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단지, 서울컬렉션이 ‘5대 컬렉션’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즈음이 서울특별시, 지식경제부, 문화관광부 등 여러 기관이 양팔을 걷고 한국패션산업의 세계화를 외치기 시작한 시기라고 이해하자.

    대한민국의 다가올 모든 새로운 패션을 선보이는 서울컬렉션, 즉 ‘2009년 추계 서울패션위크’가 10월16일부터 23일까지 열린다. 여기선 내년 봄여름을 위한 43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들이 선보인다. 가을에 열리니까 굳이 붙인 ‘추계’라는 말에서 어른거리는 관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다.

    직전인 10월 12,13일엔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의 회원 디자이너 13인이 참여하는 ‘스파서울컬렉션’도 열렸다. 서울에만 두 개의 컬렉션이 있다(양측 불화의 역사는 길고 복잡하니 다음 기회에). 게다가 행사장은 언제나 성황이다. 지춘희씨 같은 인기 디자이너의 패션쇼엔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발 디딜 틈이 없어 그냥 돌아가는 관람객도 많다. 또 내년 초 뉴욕컬렉션이 열리는 시기엔 뉴욕에선 처음으로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를 소개하는 쇼룸이 설치된다. 이는 문화관광부에서 준비하는 회심의 역작인데,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최근 한 일간지를 통해 보도되는 바람에 김이 팍 샜다는 후문이 돈다. 어쨌든 좋은 아이디어고, 쇼퍼홀릭에겐 반가운 이야기다.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컬렉션을 이야기할 때 잘못된 혼사의 신부처럼 한숨부터 쉰다.

    ‘컬렉션’은 견본시장, 즉 마켓인 만큼 전세계 옷장수들이 모여들어 신상을 보고 팔릴 만한 것을 주문해줘야 한다. 그런데 서울컬렉션의 관객은 바이어가 아니라 나처럼 그저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기껏해야 쇼퍼홀릭들이고 다수는 옷을 공부하는 패션 관련학과 학생이다. 도대체 의욕이 생기기 어려운 행사인 것이다. 관의 지원을 받지 않을 땐 말할 것도 없었다. 디자이너들은 종종 돈 때문에 컬렉션에서 빠졌고 컬렉션은 소금 빠진 콩나물국처럼 싱겁고 비린내가 났다.

    일종의 서울시 TF팀인 서울패션위크 조직위원회의 원대연 위원장(그는 공무원이 아니라 패션전문가다)은 솔직하게 문제점을 털어놓았다.

    “우리나라 백화점은 좋은 디자이너의 상품을 사서 팔아주는 유통업을 하는 게 아니라 장소만 빌려주고 수수료를 받아간다. 구조적으로 패션이 발전하기 어렵다. 해외 디자이너들도 서울컬렉션에 참여하면, 물건을 팔 수 있어야 자주 오지 않겠나. 사주는 백화점이 없으니 디자이너 교류가 어렵다.”

    패션전문가들 사이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한 젊은 디자이너는 “아무리 평론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아도 끊임없이 회의에 빠진다. 독창적인 디자이너일수록 한국에서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을 혼자 다 하려니 매일 한번씩은 좌절하게 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작은 가게, 새 아이디어에 대한 그녀의 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놀라운 상상력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옷들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어느 날 훌쩍 외국으로 떠나면 무척 허전할 것 같다. 하지만 파리에서 꽤 많은 물량을 주문받고 돌아와 올 겨울 내내 직원들 놀게 하진 않겠다며 기뻐하는 전화 통화에서 감명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패션 산업에서 막강한 ‘갑’인 백화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그동안 행사성으로 열린 서울컬렉션을 반성하며 비즈니즈 마켓이라는 본래 역할에 주력하겠다는 원 조직위원장의 역할에 기대도 해본다.

    패션계에는 패션 산업의 성패를 자기 일로 알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분야에도 ‘미쳐서 미친’ 사람이 많지만, 특별히 패션이란 산업에선 작고 ‘순수’한 동기들이 엄청난 결과물을 내놓는다. 패션이 예술이거나 산업이 아니라 예술인 동시에 산업이기 때문이다. 패션은 환상이지만, 공기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단단하게 짓듯, 환상을 견디게 하는 건 리얼한 현실이다. 서울컬렉션을 뜨겁고, 허전하고, 아름다운 현장에서 보면서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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