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국회 시절 이철용(62)의 별명은 ‘소란꾼’이었다. 도무지 조용할 때가 없었다. 돌아보면 등원 첫날부터 ‘소란’을 떨었다. 휠체어를 타고 국회의사당 계단 앞에 나타나 ‘올라갈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경위들이 달려와 ‘모시겠다’는 걸 다 뿌리쳤다.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라.’ 이틀 만에 국회의원 130여 명이 서명했고, 의사당에 경사로가 생겼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제가 국회에 들어간 이유가 뭐겠어요. 보통사람이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주라는 거잖아요. 왜 이렇게 튀냐, 가만히 좀 있어라 하는 얘기는 안 들었어요. 그러다가 찍혀서 다음부터 공천도 못 받았지만….”
‘의원 나리’일 때만 당당하게 산 건 아니다. 그전에도, 후에도 남 눈치 본 적이 없다. 눈치 보기 시작하면 주눅 들게 너무 많아서, 아예 멋대로 사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폐병쟁이’였다. 그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남겨준 건 결핵균뿐이었다. 돌도 되기 전 앓은 결핵성 관절염으로 그는 평생 한 번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지체장애 3급 장애인 ‘절름발이’ 아들을 키우느라 ‘청상과부’ 어머니는 행상을 했다. 그 사이 아이는 거칠게 세상을 배웠다.
절름발이 인생
“우리 어릴 때는 장애인을 놀리는 일이 많았어요. 내가 지나가면 다들 ‘저기 절름발이 간다’ ‘찐따 간다’ 그랬지요. 한번은 종로에 있는 한의원집 아들이 내 뒤를 따라오면서 막 흉내를 내는 겁니다. 하도 서러워서 집에 들어가 엉엉 울었어요.”
어머니는 단숨에 길을 나섰다. 한의원집에 쫓아가 대문을 다 부숴버렸다. ‘이제부터 누가 너를 놀리면 이렇게 부숴버려라. 바보처럼 울지 말고.’ 이 얘기와 함께 그의 유년기는 끝이 났다. 작고 기울어진 몸으로 살아남으려면 남이 각목 들 때 칼을 들어야 한다는 걸 배워버린 것이다. 눈 부릅뜨고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사주에 관심 가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우리 어머니는 왜 서른 살에 과부가 됐을까. 그런 생각이 막연하게 들곤 했어요. 또 어머니가 과부니까 우리 집에 놀러오는 친구 중에 그런 분이 많았어요. 같이 계신 걸 보고 있으면 다들 뭔가 비슷했지요. 이 느낌이 뭘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한번은 탄광촌 식당에 갔다가 어머니 친구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아주머니를 만났다. 무심코 ‘남편 몸조심 하셔야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6개월 전 갱도가 무너져 이미 세상을 뜬 상태였다. 그 기억은 오래갔다. 어쩌면 뒷골목 건달 생활을 하던 그가 빈민운동가 시절을 거쳐 국회의원의 삶을 누리다 역술인으로 자리 잡기까지, 멀리 돌아온 긴 세월의 첫머리에는 이날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전 의원과 마주 앉은 곳은 서울 안국동에 있는 역술원 ‘통(通)’이었다. 이 공간을 만들기 전까지 그는 말 그대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한국의 괴짜’로 소개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앞날을 짐작할 수 없이 사는 게 괴짜라면 내가 바로 괴짜”라며 크게 웃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세상으로 나왔어요. 나만 잘살면 된다, 돈만 있으면 된다 생각했지요. 돈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습니다. 나만큼 악착같은 놈이 없으니 내가 가장 잘 벌었지요. 구두소(所)를 수십 개 갖게 되니 나를 따라다니는 애들이 많이 생기더군요. 얘들 공부라도 좀 시켜야겠다 싶어서 1972년에 조그맣게 야학을 만들었습니다.”
1974년 그 학교에 ‘은성학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좀 더 규모 있게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새로운 삶에 발을 들이게 됐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 명문대 학생들이 선생으로 왔다.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도 만났다.
그 남자, 예수
13대 국회의원 시절 이철용 의원.
“예수라는 남자가 멋있었어요. 그의 삶이 뒷골목 조폭보다도 더 뜨겁고 활기차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이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잘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잘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처음 했어요.”
건달 혹은 뒷골목 보스에서 빈민운동가로의 극적인 전환이다. 삶을 증오하던 청년이 처음으로 꿈을 품자 세상은 모진 매로 응징했다. 수배와 도피, 구속과 고문이 이어졌다. 1976년 간첩으로 몰려 대공분실에 끌려가 40일을 지냈고, 1979년 YWCA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또 한 번 붙들려 고문을 당했다.
“1975년 1월20일에 결혼하고는 2월10일 날 구속됐어요. 나온 뒤에도 계속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느라 집에 제대로 들어가지를 못했죠. 그 틈에 어떻게 아들 둘을 낳았는데 생각해보니 남겨줄 게 없습디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습자지에 편지 형식으로 써나갔지요.”
1980년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어둠의 자식들’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가 자신의 빈민운동 경험을 담아 쓴 다음 책 ‘꼬방동네 사람들’까지 히트를 하면서 이 전 의원은 느닷없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민당은 그를 ‘도봉 을’지역구에 공천했다. 손수레에 책을 싣고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고, 헌정 사상 최초의 장애인 지역구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의 정치 역정에 대해서는 구태여 다루지 말기로 하자. 여러 언론에 보도됐듯 13대 임기가 끝난 뒤 그는 공천에서 탈락했고 무소속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한동안 세상을 주유했다. 희곡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음반을 제작해 콘서트 무대에 서고, 계속 책도 펴냈다. 그 사이 몇 차례 정치적인 재기를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생활 정치, 희망 디자인
“어느 순간 저절로 정치인의 꿈을 접게 됐어요.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 독재 타도 시대도 끝났다, 이제는 진짜 전문가가 국회에 가야 하는 시대라는 걸 깨달았지요. 하지만 정치를 떠난 건 아니에요.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지요.”
빈민운동을 하며 마음에 품었던 생활 정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 역학이었다. 이 배경을 설명하려면 시간은 다시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혹독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그에게 문익환 목사가 웅담을 선물했다. 캐나다 교포들이 문 목사를 위해 보낸 것에서 일부를 떼어준 것이다. 벼랑 끝 밧줄 잡는 심정으로 웅담을 받아 들었는데 놀랍게도 기력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의학의 신비함에 이끌려 침술, 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양오행에 관심이 갔고 자연스레 오래전부터 호기심을 가진 역학 공부에도 빠져들었다. 스승을 따라다니며 배운 건 아니다. 그는 책 쓰는 것도, 노래 부르는 것도, 심지어 정치도 뭐 하나 ‘사사한 게 없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누구한테 줄 서서 인정받는 게 싫어요. 열정으로 하는 게 진짜인 거죠. 누구 파다, 무슨 장르다 그런 거 자기들끼리 기득권 누리려고 하는 우스운 일 아닙니까?”
혼자서 책을 읽으며 사주를 파고들었다. 뭐든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에 제법 역학을 익혔다. 그가 점을 볼 줄 안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은 침을 놓아주고, 힘든 사람은 사주로 상담해주자 빈민운동이 훨씬 쉬워졌다.
“흔히 세상에서 얘기하는 점을 봐줬다기보다는 상담을 해줬다고 하는 게 맞겠죠. 다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들인데 거기다 대고 ‘당신은 팔자가 엿 같아서 안 되겠어’ 이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어렵지만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좋아진다,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줬어요. 신기한 게 그냥 ‘잘될 거다’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당신 사주가 이렇다. 그러니 힘내라’ 하면 믿는 겁니다. 그 믿음이 결국 일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요. 문득 이게 바로 생활 정치 아닌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나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성 정치에서 한계를 느낄 무렵,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게 진짜 정치였구나 하는 깨달음에 무릎을 쳤다. ‘의원 나리’ 대신 ‘점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본격적으로 이 길에 들어서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는 자신만의 분석 틀도 만들었다. 수천 년 전 농경시대에 만들어진 사주의 원리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심청이가 죽은 까닭은
이 전 의원만의 사주 풀이 비결을 듣기 전에 먼저 그의 심청이 얘기 한 토막을 들어보자.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빠졌을까요. 그의 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에? 난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심청이를 죽인 건 공양미 300석을 가져오라는 승려의 혹세무민과 자기 살겠다고 산 처녀를 물에 빠뜨리는 비윤리적인 기업가,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아무 보호 없이 방치한 당시의 사회 체제입니다. 심청이의 운명을 보려면 개인의 사주만으로는 풀 수 없다는 말씀이에요. 그가 살고 있는 세상, 그를 둘러싼 환경을 함께 봐야지요.”
그래서 그는 사주를 풀 때 역사와 환경을 함께 적용한다. 기자의 생년월일을 들려주자 그는 시스템에 입력해 곧 “당신이 태어날 무렵 김영삼씨는 신민당 총재직에서 사퇴했고, 미국에서는 카터가 39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미국의 바이킹 1호가 화성에 착륙했다. 그해에 몬트리올 올림픽이 개막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이스라엘 특공대의 인질 구출 작전이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개인의 삶에 미칠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사주를 제대로 풀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사주는 운명이 아니다. 혈액형이나 사상체질과 같이 통계적으로 분석되는 기질, 혹은 경향이다. 이 전 의원은 “역술가는 사람의 사주와 그를 둘러싼 환경을 관찰하고 ‘이렇게 될 것’이라고 조언하는 사람일 뿐, 그의 미래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존재”라고 했다.
“동방박사가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고 예수 탄생을 알았지요. 사주의 원리도 그겁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해, 달, 일, 시의 천체가 우리에게 준 기운을 읽는 거예요. 지금껏 사주가 역술가의 이익을 챙기는 도구로 활용돼왔기 때문에 ‘점쟁이’에 대한 인식이 나쁜데, 부적이나 굿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역술가가 아니에요.”
미래예보학
그래서 그는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예로 드는 것이 일기예보다.
“비가 언제 올 거라는 걸 미리 알면 우산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아예 집 밖으로 안 나가면 한 방울도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주를 알아야 하는 건 그렇게 내 미래를 관리하기 위해서예요. 10년 후에 당뇨나 성인병에 걸릴 기운이 있는 걸 알면 지금부터 소식하고, 천천히 먹고, 채식하면 돼요. 아무리 사주에 당뇨가 나와 있어도 건강관리 열심히 하면 걸리지 않고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사주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딱하다며 일본의 역술가 미즈노 남보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일찍이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18세에 출소했다. 앞날이 어찌 될까 싶어 역술인을 찾아갔더니 “칼에 찔려 죽거나 칼로 다른 사람을 찔러 죽을 운”이라는 답이 나왔다.
“남보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 미래가 너무 암울한 겁니다. 절에 찾아가 스님과 의논을 했어요. 스님은 앞으로 1년간 쌀을 먹지 말고 콩만 먹은 뒤 다시 찾아오라고 했지요. 1년 후 어떻게 됐겠습니까. 다시 찾아간 남보코에게 스님은 ‘다 끝났다. 이제 너는 칼에 맞아 죽지도, 다른 사람을 찌른 탓에 죽게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1년간 절제를 가르친 덕분이지요. 그걸 충실히 지킨 덕분에 남보코는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도무지 말이 멈춤이 없다. 물 흐르듯 흘러가면서 핵심을 짚어내는 언변이 기가 막힌다. 그도 빈민운동 시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구라’였다고 털어놓았다.
국회의원 시절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이철용 전 의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전 의원이 말하는 자신의 성향은 ‘생활 구라’다. 세상에 일어나는 갖가지 현상을 직접 보고 만져본 걸 기초로 이야기하는 구라, 그는 세상 모든 구라 가운데 이것이 가장 힘이 있다고 했다.
절제 웃음 보시
풍부한 생활 경험, 뒷골목 건달부터 국회의원까지 두루 체험한 뒤 하나하나 글로 풀어냈던 경험은 그가 역술가로 살아가는 데도 든든한 자산이다. 이 전 의원은 “나는 신 내림 같은 건 믿지 않지만, 보통의 경우 방문객이 문지방을 넘기 전에 그 사람의 고민이 뭔지 다 알아차린다. 각계각층 수많은 사람을 만나 수많은 얘기를 해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회의원을 하며 많은 이의 사주와 삶을 분석할 수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좀 조심스러운 얘기기는 하지만, 제가 국회에 있을 때 보건복지 쪽 일을 많이 했어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약 8000명의 환자 기록을 입수했죠. 이 중에 사주까지 완벽하게 확보한 건 1300건쯤 됩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분석했어요. 어떤 사주를 가진 사람이 어떤 사건, 사고, 상황과 만나 어떤 질환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 거죠. 아까 사주는 통계학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통계로 법칙을 만들면 기존의 사주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더 얻게 되는 겁니다. ‘통’을 연 뒤부터는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자기 데이터를 알려주고 있어서 데이터베이스가 더 풍성해졌어요. 지금 한 3000명 정도는 분석이 끝났습니다.”
그는 이 자료를 기초로 사주를 보면 장애를 갖게 될지, 혹은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길지 등에 대한 경향성은 거의 100% 맞힐 수 있다고 말했다. 확실한 답이 나온다 해서 반드시 그 일이 생긴다는 건 물론 아니다. 언동을 절제하고 분노를 절제하고 식탐을 절제하고 쾌락을 절제하면 모든 액운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절제, 달리 말하면 인간의 의지가 사주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라는 건 그의 굳은 믿음이다.
컬러 테라피
“탐욕을 절제하고, 악착같이 살면 된다는 얘기도 많이 합니다.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 열 중 다섯은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며 울고 갑니다. 그때마다 제가 하는 얘기가 지체 3급 장애인인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왜 못 사느냐는 거지요.”
한번은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돈 한 푼 없는 이혼녀가 찾아왔다. 사주를 보니 건강은 타고났다. 건강하면 못할 게 없다. “다리가 불편한 나도 사는데 사지 육신 멀쩡한 당신은 왜 못 사느냐”고 진단했다.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노점이라도 하시오.”
“경찰이 잡으러 올 텐데요?”
“유치장에 한 50번 잡혀 들어갈 각오를 해요. 노점을 폈다 잡히면 구류를 사십시오. 한 50번 유치장 들락날락하면 언론에 소문이 나고 그 다음에는 경찰도 함부로 못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희망을 처방한다. 절제 혹은 의지와 더불어 그가 또 강조하는 것은 웃음과 보시다. 절제보다 힘이 있는 건 웃음이고, 웃음보다 더 강한 건 나눔이란다. 그에 따르면 늘 나누고, 웃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굳이 사주를 보지 않아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사주의 예보가 도움을 줄 수 있다.
“60갑자는 계속 돕니다. 사주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언젠가 분명 기회가 온다는 거죠. 그때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삼재에 든 사람에게 늘 운동하고 공부하라고 해요. 안 좋을 때 미리 준비해둬야 나중에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컬러 테라피다. 그는 색깔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색과 맞지 않는 색이 있는데, 맞는 색을 곁에 둘 경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삶의 기운을 바꿔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입은 옷이 모두 청색 계열이라는 데 눈이 갔다. 그는 푸른색 셔츠에 푸른 니트를 받쳐 입고 푸른 머플러를 둘렀다. ‘통’ 내부 인테리어 역시 온통 푸른색이다. 한쪽 벽을 가린 커튼도, 장식물도, 심지어 명함까지. 그는 베갯잇과 이불도 푸른 계열이라고 했다.
“제가 목(木) 기운이 약해요. 파란색으로 그걸 보충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 때도 오행을 고려했어요. 예를 들어 ㄱ·ㅋ은 목(木), ㄴ·ㄷ·ㄹ은 화(火) 하는 식이지요. 색도 오행과 연결되는 특유의 힘이 있습니다. 검은색은 빛을 흡수하고 흰색은 반사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성향이 사람의 타고난 기질과 맞아들어가도록 하면 건강도 기운도 좋아집니다. 그래서 사주를 볼 때면 늘 곁에 두면 좋은 색, 피해야 할 색을 알려주지요.”
희망의 이유
기운을 채워주는 그림을 직접 그려주기도 한다. 일종의 신개념 ‘부적’이다. ‘통’ 안에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한 세 평 남짓한 화실이 마련돼 있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하는 건 결국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더불어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바람도 내비쳤다. 낙선한 뒤 모든 공식적인 사회 활동을 접은 그가 유일하게 맡고 있는 직함이 사단법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이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았고, 장애인임에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늘 노력하는 그에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절대적이다. 그는 자신을 보며 장애인들이 역학 공부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면 좋겠다고 했다.
“통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젊은 남자를 휠체어에 태운 채 데려왔어요. 알고 보니 그분은 스님이었는데 여자를 알게 돼 파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해 목 아래가 다 마비된 거죠. 그 사람 질문이 딱 두 개였어요. ‘마누라 도망 안 가나’ ‘내가 앞으로 뭐 해먹고 사나’. 딱 보니까 부인이 도망갈 사주였습니다. 하지만 본인 머리는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았다면 큰스님으로 족적을 남길 만한 분이셨죠. 그래서 그분께 ‘마누라 걱정하지 말고, 뭐 해먹고 살지만 걱정해라. 돈 있으면 마누라도 도망 안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주 쪽으로 공부를 하시도록 이끌었지요. 지금 역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계세요. 이분같은 장애인에게 사주공부를 시켜서 1, 2년 후 수료증을 주고 창업의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한 첫 단계로 그는 지금 역학 교재를 쓰고 있다. 이 전 의원은 “교육생은 엄격하게 뽑을 생각이다. 자기 밥벌이할 정도는 사는 사람이라야 혹세무민을 안 하니까 돈 벌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은 안 뽑을 거다. 장애인을 우선으로 뽑으려 한다. 일을 하고 세금을 낼 수 있게, 장애인 밥벌이를 만들어주는 방법으로만 활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크리스천이 웬 사주?’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도 당당할 수 있는 건 이것이 세상에 희망을 확산시키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장애인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격려하는 것이 나쁜 일이냐”고 되묻는다. 더불어 “한의원에서 진맥을 받으면서 왜 음양오행은 안 믿나, 이건 한의학보다 더 광범위하고 디테일한 통계학”이라고 설명해준다고 했다.
“60여 년 살아오면서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그 경험이 생활 정치를 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이제는 저 밑에서 저 위까지 희망 없이 사는 사람을 찾아내 희망을 안겨주고 싶습니다. 그게 국회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의미있는 정치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