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인물 발굴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전집 출간된 한국학 대가 이을호

  • 오종일 | 전주대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철학연구회장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3/4
이 책은 선생이 왜경의 감시를 받고 있을 때 어느 민가에서 발견했다. 멸망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저자 강항의 행적으로 자신의 위안을 삼았는데, 이제 해방된 나라에서, 선생이 세운 학교에서 직접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정국은 선생의 이런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고 헐뜯으면서 선생을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 난국은 선생의 교육의 꿈마저 빼앗아가버렸다.

1948년 봄, 선생은 많은 재산을 들여서 세운 학교를 미련 없이 버리고, 광주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장에 취임했다. 약제학을 강의하면서 다산 연구를 계속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여유당전서’를 탐구하면서 ‘간양록’ 번역에 착수했다.

1952년 가을, 드디어 ‘간양록’이 출간된다. 책 이름은 ‘임난실화(壬亂實話) 수은 간양록(睡隱看羊錄)’.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첫머리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청춘도 영광도 버리고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모든 순국선열의 제단 앞에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쓴 것이다. 형무소에서 나와 허허벌판에 던져진 몸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그 이상은 실현되지 못하고 국가의 앞날은 아직도 요원해 갈 길을 잃고 있었으니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약용 연구, 經典 한글화

선생은 이때부터 많은 글을 발표했다. 대부분 우리의 역사와 사상에 나타난 선현들의 지혜와 그 가르침이 어떻게 현실적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참다운 삶의 방향에 대한 모색이다. 그 생각의 중심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있었다.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우리의 사상과 문화, 의식의 바탕을 이루는 한국적 지혜가 무엇인지를 찾도록 했다.

다산학에 대한 본격적 탐구는 1955년부터였다. 선생은 ‘다산경학사상연구’ 서문에서 “을미년(1955) 정월 초순, 다산도 1801년에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영암의 잣고개를 넘어 강진에 들렀다”고 썼다.

다산학 연구의 첫 업적은 1958년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함과 동시에 나온 번역본 ‘한글 맹자’다. 이 책은 한글을 고집하고 정약용의 ‘맹자요의(孟子要義)’를 우리말로 옮긴 게 특징이다. 여기엔 선생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당시 학문적 주조(主潮)이던 유학은 중국의 사고(思考)에 중독돼 있었다. 특히 학자 대부분은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힘이 주자학에 있다고 여겨 우리의 사상으로서 중국의 유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중국의 경전도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의식으로서 다시 정립해야 하며, 나아가 중국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의 지혜로서 이뤄진 우리의 사상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전의 한글화는 이러한 작업의 출발이었다. 1959년에는 ‘한글 논어’가 출간됐는데, 이것 또한 ‘논어고금주’를 한글화한 것이다. 이어서 ‘한글 중용 대학’을 펴냈는데 역시 다산의 ‘중용자잠’과 ‘대학공의’를 바탕으로 했다.

1959년 동국대에서 백성욱 총장 회갑 기념 논문집을 만들기 위해 교수들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선생은 ‘유불상교(儒佛相交)의 면에서 본 정다산(丁茶山)’이라는 글을 썼다. 그 논문집 편찬위원장이 백낙준(1895~1985) 전 연세대 총장(당시 재단이사장)이었다. 백 총장은 선생의 논문을 보고 전남대 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용인즉 당신 학교에 있는 이을호 교수를 연세대 총장실에서 만나도록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영문도 모른 채 백낙준 총장을 만나게 됐는데, 백 총장은 미화 500달러가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당시 화폐가치로 매우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정약용 연구에 전념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선생은 이를 계기로 다산 경학 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다산경학사상연구’

1966년 봄, 드디어 ‘다산경학사상연구’라는 논문이 완성됐다.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백낙준 총장에게 연락하니 뜻밖에도 서울대 대학원장에게 그 논문을 제출하라고 했다. 당시 대학원장은 박종홍 교수였다. 박 교수는 논문을 보고 두말없이 박사학위를 신청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학원 위원들의 만장일치로 1967년 봄 학위를 수여했다.

‘다산경학사상연구’는 다산 사상의 핵심으로서 유학의 형성과정과 그 근본정신을 밝힌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다산에 이르기까지 한당학(漢唐學), 송명학(宋明學), 청조학(淸朝學)으로 발전했지만 그 어느 것도 공자학의 본령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대마다 성리학(性理學), 훈고학(訓고學), 문장학(文章學), 과거학(科擧學), 술수학(術數學) 등 공자학을 표방한 이념들이 나타났지만 공자의 학문과는 성격이 달랐다.

다산의 생각은,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처럼 공자 학문을 덮고 있던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참다운 공자의 정신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실천윤리학으로서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다산의 가르침을 계승해 한국적 사유로 형성된 한국의 유학을 재창조하려 했으니, 이를 밝힌 논문이 ‘다산경학사상연구’다.

선생에게 유학경전의 한글화는 우리 사상과 우리 환경에 맞는 한국적 유학을 창조하는 첫걸음이었다. 한국적인 유학을 정립해 한국적 사유로 이뤄진 우리의 사상을 밝히려는 정신이야말로 우리의 독창적인 의식과 사상을 찾아내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적 사유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 속에 자리하는,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서 우리의 정신으로서 미래 문화를 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자주적 사고로 이뤄진 우리의 학문, 그 사고로 형성된 한국의 사상과 문화, 이는 그 시대에 일컫던 국학, 조선학, 실학이라는 이름들이 말하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묻는 문제였다.

선생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적 사유와 선현의 지혜로 형성된 한국의 정신을 찾아 우리의 유학사와 사상사를 다시 구성하고자 했다. 그것이 1980년 펴낸 ‘한국개신유학사시론’이다. 개신유학이란 신유학을 바로잡은 유학이라는 뜻이다. 신유학은 성리학, 곧 주자학을 가리키는 것이니, 개신이란 성리학을 바꾼 유학으로서 우리의 실학이다. 따라서 실학적 사고로서 이뤄진 우리의 유학사가 ‘개신유학사’다.
3/4
오종일 | 전주대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철학연구회장
목록 닫기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댓글 창 닫기

2019/03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