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입력2004-01-29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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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6 당일, 유엔군 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데타군 진압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은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정권교체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태도를 180도 바꿔놓았다. 박정희가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朴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나섰다.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박태균 : 오늘은 ‘박정희 시대’ 얘기를 들어봤으면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이기도 합니다.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우리 현대사 전체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먼저 5·16 쿠데타 초기에 박정희에 대한 지식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박정희씨의 좌익 전력-이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크게 불거지기도 했는데-에 대해 지식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강원용 :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그게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씨가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겁니다.

    문제는 당시가 반공이 불가피한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어요.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반면에 우리는 내외적인 위협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더구나 4·19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 박정희씨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거죠.

    박 : 근소한 차이기는 하지만, 박정희씨는 윤보선측의 사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민주공화당에 합류한 지식인들의 태도가 그의 승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시 지식인들은 박정희씨를 어떻게 평가한 것일까요.

    강 : 저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몇 단계로 나눠서 이뤄져야 할 것 같아요. 특히 5·16 직후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그 이후의 평가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혁명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5·16이 나던 무렵은 도저히 나라가 유지될 수 없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4·19는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4·19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바람에 학생들도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했습니다. 오히려 혼란을 조장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지식인들 중에는 비록 바람직하진 않지만, 보다 건전한 생각을 가진, 애국심으로 충만한 군인들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이가 적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저는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보선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5·16이 좌익혁명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고, 박정희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보니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됐어요.

    ‘민생고 해결’ 다짐과 청렴함에 기대

    박 : 박정희씨를 처음 만나신 게 언제입니까.

    강 : 쿠데타 직후였죠. 그때 장도영씨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었고, 박정희는 부의장이었습니다. 육군 소장 군복을 입고 퇴계로 보훈처회관 3층에서 저를 만났습니다. 진솔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 내용이 ‘동아춘추’라는 잡지에 자세하게 나왔어요. 그때 제가 “독재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재는 군중을 끌어들일 만한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 하는 거다. 히틀러도 그랬고, 무솔리니도 그랬다. 신화 같은, 전설 같은 뭔가를 가져야 하는데, 이승만에겐 그런 게 있었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런 게 없다. 그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일개 군인일 뿐이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민주주의를 할 사람으로 보진 않았어요. 일정 때 대구사범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사람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그를 호의적으로 본 것은 혁명공약 중에 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내용(‘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씨는 정말 가난한 농촌에서 농민의 설움이 뭔지, 굶주림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래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면 자연히 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독재할 생각일랑 말고 민생부터 챙기라고.

    박 : 박정희씨가 왜 목사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뭔가 부탁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까.

    강 : 그때 박정희씨는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어요. 저를 만난 것은 아마 박창암씨(식민지 시기 만주에서 하사관 생활을 하다 해방 후 국군에 투신했으며, 5·16 쿠데타 후 혁명검찰부장으로 활동하다 반혁명 사건으로 군사정부에서 퇴출됐다)의 조언 때문이었을 겁니다. 박씨가 그때 박정희 바로 밑에서 특보실장을 했거든.

    박정희씨는 대화를 끝낸 뒤 “혁명 이후 지도층 인사 몇 사람을 만났는데, 내게 기탄없이 얘기를 해주는 사람은 강목사가 처음”이라면서 자기는 정치를 할 테니 저더러는 국민운동을 해달라고 했습니다(군사정부는 후에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고, 그 책임자로는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임명됐다). 저는 “국민운동은 국민이 하는 거지, 군사혁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국민운동을 하겠다는 거냐”고 반문했죠. “국민운동은 간판만 갖다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 자생적으로 일어나는 국민운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초기에 제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매우 청렴하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때 박정희 반대자들이 ‘박정희 집에는 피아노가 스무 대나 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건 다 중상모략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박정희는 우리 교회에 나오던 박덕혜 집사의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주 작은 기와집이었습니다. 5·16 후에도 거기서 살았죠.

    박 : 신당동 집 말입니까?

    강 : 그래요. 5·16이 일어난 뒤에 저도 가봤는데, 낮에는 집이 눈에 잘 띄지도 않았어요. 늦은 밤에 군인 몇 명이 그 앞에서 보초를 서는 걸 보고서야 박정희 집인 줄 알았죠. 제가 박정희에게 기대를 건 또 하나의 이유는 박정희라는 이름이 쿠데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당시에 육군 소장쯤 되면 모를 사람이 없었어요. 대부분 정치군인들인 데다가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았거든요. 우리 교회 옆에도 양모라는 육군 소장이 살았는데, 아침마다 그 집 앞 쓰레기통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예요.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남긴 갈비 같은 걸 가져갔어요. 장군들이 거의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라는 이름을 제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그만큼 돈 먹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미국, 한국민 반응에 당혹

    박 : 5·16이 터지자 ‘올 것이 왔다’고 하셨다는데, 윤보선씨는 그 말 때문에 쿠데타 1년 후인 1962년부터 지금껏 논쟁에 휘말려 왔습니다. 과연 그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요(윤보선 대통령은 1961년 5월16일 아침 혁명군 박정희 소장과 유원식 대령(훗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1년이 지난 1962년 5월 유원식의 진술로 밝혀졌다. 유원식은 이에 대해 “윤보선이 이전부터 쿠데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방조했다”고 주장한 반면, 윤보선은 이를 부인하며 “혼란한 장면 정부하에서 무슨 사태가 터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났다기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는 쿠데타에 대한 윤 대통령의 애매한 태도와 연결되어 현재까지도 논란을 빚고 있는 부분이다)?

    강 : 그 말이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윤보선씨가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거예요.

    박 : 사전에 쿠데타 모의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논쟁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강 : 윤보선씨가 공개적으로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요. 다만 당시 윤씨는 장면 정권의 실정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죠. 어떤 의미에선 쿠데타를 성공시킨 게 윤보선씨일 수도 있어요.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가 윤 대통령에게 “사인만 하시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윤보선씨가 “우리 한국에선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들어가서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박정희를 물리치려면 또 피를 흘려야 할 텐데 그건 못하겠다고 거절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그래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 아닙니까(당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그린 주한 미국 대리대사와 함께 1961년 5월16일 오전 11시 윤보선 대통령을 찾아가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거국내각 수립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는 장면 정부에 대한 윤보선 대통령의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주는데, 매그루더 사령관은 이러한 윤보선의 입장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이것을 곧 워싱턴에 보고했다-박태균·‘5·16 쿠데타와 미국’ ‘역사비평’ 2001년 여름호 참조).

    무성한 쿠데타說

    박 : 5·16 쿠데타와 관련해 여쭤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워싱턴에 보낸 문서들을 보면 한국의 상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 데도 한국인들이 조용하다는 거예요. 쿠데타가 일어나면 국민들이 합법 정부를 지지하고 쿠데타에 반대하는 소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당시 쿠데타 정부에 대한 지식인들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 : 제가 보기에는 상당수 지식인들이 지지했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럴 만도 했죠. 민주당 정부는 도무지 나라를 끌어갈 수 없는 정부였어요. 한마디로 완전히 카오스였습니다. 수습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오죽하면 ‘독재는 나쁘지만 무질서보다는 낫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러니 뭔가 일이 터져서 ‘정리’를 해야 선거라도 치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일반 국민 중에도 미국 사람들이 본 것처럼 쿠데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이들이 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때문에 그 무렵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세력이 박정희 외에도 여럿 있었어요. 내가 알기에도 두세 군데는 됩니다.

    박 :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강 : 가령 김홍일 장군은 저더러 “이러이러한 계획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고, 그밖에 이범석에게도 모종의 계획이 있다, 이한림 장군도 움직인다는 등의 말이 많이 돌았어요(실제로 당시 미 CIA 한국지부에서는 박정희와 관련된 쿠데타설 외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민족청년단의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저는 혁명이 어디에선가는 일어나리라고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혁명이 성공해서 그 사람들이 뭘 같이 하자고 하면 입장이 무척 난처할 것 같고, 실패해도 모의한 사람으로 연루될 것 같아서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일단 일본으로 떠났죠. 책에는 교회 일로 갔다고 썼지만.

    박 : 일본으로 가신 게 정확히 언제입니까.

    강 : 1961년 5월 초인 듯합니다. 1962년 4·19 2주년 무렵을 계기로 어디선가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주적인 국민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부가 선 지 8개월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걸 못 참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8개월 만에 민주당 정부는 완전히 죽을 쑨 겁니다. 의거를 일으킨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면서 민주당에 정권을 맡겼는데, 민주당은 자기들끼리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허구한 날 싸움판을 벌였습니다(신파는 장면 계열로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될 때 민주당에 합류한 원내 자유당 계열, 흥사단 계열 등으로 구성됐다. 구파는 1945년에 결성된 한국민주당과 1949년 한국민주당을 모태로 조직된 민주국민당의 주도세력들을 의미한다).

    결국 신파가 내각의 실권을 잡았는데, 신파 내부에서도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면서 자기들끼리 싸움하느라고 아무것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당에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이북 학생들을 만나겠다고 올라오질 않나…4·19로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쟁취했지만, 당시 서울 거리는 ‘데모크레이지(demo-crazy)’였어요. 매일같이 시위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북의 움직임이 걱정될 수밖에요. 그런 시점에 쿠데타가 터졌기에 군사혁명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은 있었지만, 식자들은 대부분 ‘당장은 할 수 없지 않겠나, 좀 기다려보자’는 태도였죠.

    박 : 쿠데타 직후 시기에 대해서는 너무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말씀이신 듯합니다. 즉 당시 상황에서는 쿠데타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 개인에게도 뭔가 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이후의 개인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강 : 처음에는 “질서만 회복하고 나서 곧 군인의 본 업무로 돌아가겠다”고 혁명군으로서 확실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안 지켰어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장기 집권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중앙정보부를 만들고는 어지간한 사람은 다 좌익이라며 잡아넣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결국 삼선개헌에까지 이르자 이거 정말 장기 집권으로 가는구나 하고 절실히 깨닫게 된 겁니다. 그렇게 장기 집권을 준비하던 시기를 2기 박정희 시대라고 할 수 있겠죠. 3기는 이른바 유신헌법 이후의 시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 토막으로 나눠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렇듯 시기별로 나눠 봐야지, 전체를 한마디로 어떻다 하고 얘기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시각입니다.

    ‘1기’는 높이 평가받아야

    박 : 저도 목사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박정희를 평가하면서 부정적이다, 혹은 긍정적이다 하면서 전생애를 한칼로 잘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강 : 그렇습니다. 뭐든지 일도양단해서 한 쪽만 보려하는 데서 역사적 평가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경제만 해도 그래요. 실제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우리 경제라는 건 경제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기아에 허덕이는 농업국가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박정희씨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양반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진심에서, 자신의 생래적 양심에 따라 이들 굶주리는 국민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이 제대로 벌어먹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려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경제발전을 위해 자기개혁을 독려한 것은 그 목적도 순수했고, 성과도 상당했습니다. 이런 점은 분명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5·16 쿠데타 후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을 예방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박 : 그런데 박 정권이 2기에서 3기를 거쳐가면서 그런 순수한 부분들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가려진 게 아닐까요?

    강 : 희석됐죠.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정권이든 초기에는 순수한 데가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나빠지는 거죠. 박정희씨는 경제에 대한 집념이 굉장히 강했는데, 그건 좋은 의미에서의 집념이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군인 출신이고 공산주의의 물을 먹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순수한 목적이 정치적으로 변질된 게 아닐까 합니다.

    박 : 그럼 목사님께서 ‘박정희 2기’로 규정한 시기에 대해 말씀을 나눠볼까요? 목사님 저서를 보면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해 일어난 1964년 6·3 사태 당시 목사님께서 박정희 정부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셨다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특히 이 문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관련해서도 흥미를 끕니다. 박정희는 1963년 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10만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역대 대통령선거 중 가장 적은 표차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이라는 난제에 직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목사님뿐만 아니라 야당 인사들도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잃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를 좀 해주시죠.

    강 : 그 부분은 박정희씨의 과거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히 알고 난 후에 미국 사람들에게 알려줬죠.

    박 : 미국도 쿠데타 직후에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박정희가 남조선노동당의 군내 조직 책임자였다가 여순사건 이후 숙청대상자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은 이미 5·16 쿠데타 직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 정보는 주로 한국군 핵심인사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얻어졌다. 그러나 당시 미국 문서들에 의하면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막은 1963년에야 주한 미국대사관 그레고리 핸더슨 참사관의 조사에 의해 알려졌다).

    미국에 박정희 親共경력 알려

    강 : 미국측은 제 얘기를 듣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부산 동아대의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박모라는 교수가 저와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 사람이 제게 박정희와 관련된 정보를 줬어요. 그 사람이 박정희가 좌익이라는 것을 알고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 4·19 학생의거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박정희가 부산에서 근무했잖아요.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보고 ‘이 사람 참 위험한 사람이다’ 싶어서 추적을 했답니다. 그래서 박정희의 전력을 밝혀낸 거예요.

    박 교수는 같은 동아대의 조모 교수와 함께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쿠데타 직전에는 서울에까지 올라와서 박정희를 따라다니는 이들을 추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패거리가 청진동 대동여관에 방을 하나 얻어 묵으면서 무슨 모의를 하더라는 거예요. 박 교수가 여관에서 일하는 여자 아이를 구슬려서 그들이 뭘 하느냐고 물어보니 무슨 글을 쓴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그 글을 좀 빼내달라고 했더니 찢어서 버리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라도 좋으니 갖다달라고 해서 찢어진 종이들을 하나하나 붙여보니 군사혁명위원회 성명서였습니다. 처음엔 긴가민가 했지만, 그 여관에 함께 머물며 지켜보니 야간 통행금지 뒤에 군 장교들이 여관을 자주 드나들어서 이게 진짜라는 걸 안 것이죠.

    그러다가 5·16이 일어났거든요. 그러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다 조사한 겁니다.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건물에 있던 대한교육보험 아래층에 방을 얻어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다니며 계속 추적했죠. 그렇게 자료를 다 모았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던 겁니다. 바깥에 발표하면 잡혀가 죽을 거고….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제게 전달한 거죠.

    박 : 그때가 언제쯤입니까.

    강 : 그게 북한에서 황태성이 넘어와 활동하던 무렵이니까 1962년쯤일 겁니다. 1963년 대선 전이었으니까.

    박 : 그러면 통화개혁(1962년 6월10일) 전후경이겠군요.

    강 : 아마 그쯤 될 거예요. 어쨌든 저도 이걸 들고 고민했죠. 어디다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냥 있으려니 그렇고…. 그래서 군사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한신 장군을 찾아갔습니다. 저와 친한 데다 믿을 만한 사람이었거든요(한신 장군은 당시 한국군 고위 장교 가운데 일본 육사나 만주군 출신이 아닌,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 5·16 쿠데타 후 감사원장을 역임하고 민정 이양시 군에 복귀했다). 한신 장군에게 “비밀 얘기를 하고 싶으니 만나자”고 하니까 오라고 했습니다. 한 장군은 식구들을 다 밖으로 내보내 집을 비워놓고는 방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두고 대화를 나눴어요.

    한신 장군은 제 얘기를 듣고 나더니 엄민영씨의 정체를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엄민영은 식민지 시기 규슈제국대를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군수를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경희대 법대 학장을 역임하고 4·19 시기 참의원에 당선됐다가 5·16 쿠데타 직후에는 박정희의 ‘정치교사’로 활동했다. 대구사범 시절 박정희와 같은 하숙집에서 지냈다). 한신 장군은 목숨을 걸고 조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 문제는 한신 장군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제가 미 대사관의 필립 하비브와 그 얘기를 하게 된 거죠.

    ‘백낙준·박병권·정일권’ 카드

    박 : 당시 하비브씨는 정치담당 참사관이었죠?

    강 :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문서를 전한 사람은 로버트 키니였어요. 키니는 본래 해방 후 하지 미군정 사령관 아래서 정보 책임자로 일했습니다(키니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의 스태프로 활약했다). 키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믿을 만했고, 이승만 정부 때 그가 미 대사관에서 정보 책임자로 일할 때 김규식 박사와 관련된 일을 담당했기에 김 박사와 가까운 저와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그 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문서를 줄 수 있냐고 해서 줬어요. 키니는 이것을 펜타곤에 특별기편으로 보내서 미 정부가 이에 대해 조처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1962년쯤인데-키니가 자기랑 조용히 만나자면서 뚜껑이 덮인 지프를 몰고 왔어요. 차를 탔더니 그는 여기저기를 빙빙 돌아서 마포 부근의 빈 건물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주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 자리에서 저더러 “미국은 군사정부에 대한 방침이 서 있다”며 “결국은 바꿔야겠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혁명적인 방법으로 바꾸지 않고 헌법에 근거한 절차를 거쳐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먼저 총리를 바꾸고 나서 마지막엔 대통령이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어요(1963년에 불거진 범국민신당 관련 해프닝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박태균·‘군사정부시기 미국의 개입과 정치변동’ ‘박정희시대 연구’, 백산서당 참조).

    그러더니 제게 세 사람의 이름을 내보였어요. 백낙준, 박병권(박병권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1관구 사령관, 제3군단장을 거쳐 쿠데타 직후에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박정희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정일권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적임자냐고 묻습디다.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가 보기엔 백낙준 박사가 제일 나은데 소심한 성격이라 군인들 사이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병권씨는 부인이 내 아내의 제자이긴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 정일권은 아무것도 안 할 사람이다. 그는 미국대사로 있다가 5·16이 나자 유럽으로 간 사람이다”(정일권은 민주당 정부 때 주미대사에 임명됐고, 5·16 후 잠시 귀국했다가 주(駐)브라질 대사 겸임발령을 받고 1961년 12월 중순 남미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박 : 정일권씨는 쿠데타 직후 잠시 하버드대에 있지 않았나요? 당시 미국 문서에는 워싱턴의 인사들이 박정희를 파악하기 위해 정일권을 하버드대에서 만난 것으로 나옵니다.

    강 : 제 기억에는 그가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렀어요. 그때가 소위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는 반혁명 사건이 일어난 직후예요(알래스카 토벌작전은 1963년 3월 일부 군인들이 박정희, 그리고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의 독주에 반기를 들었다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으로 쿠데타 주체세력 중 함경도 출신인 김동하, 박창암, 박임항 등이 구속됐으며, 이 때문에 함경도의 별칭인 ‘알래스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쿠데타에 반대하는 혁명이라기보다는 박정희가 군정 연장을 선언하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정일권씨가 서울에 왔을 때 알래스카 토벌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함경도 출신 군인들과 술을 같이 마셨어요. 이 자리에는 당시 감사원장이던 이주일 장군도 있었고, 서울시장이던 모 장군도 있었죠. 그때 정일권씨가 “야 이 새끼들아, 너희 친구들은 다 잡혀 들어가서 흠씬 매 맞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 밑에서 시장, 감사원장 하고 있냐!”며 술상을 엎어버렸답니다. 박창암씨 부인한테서 들은 얘기예요. 그러고 갔으니까 정씨에게 총리든 뭐든 주겠다고 들어오라고 해도 안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에 망명 권고

    박 : 알래스카 토벌작전의 시기를 고려하면 키니가 목사님을 만나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정일권씨가 주미대사에서 해임되고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1963년 6월 초인 듯합니다.

    강 : 그렇겠군요. 아무튼 제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키니는 “본인이 받겠냐 안 받겠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중에서 누가 나을 것 같냐를 묻는 거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일권이 외무부 장관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아, 미국 사람들이 이렇게 구도를 잡았구나 싶었어요. 그리고는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일권이 총리가 되더군요. 그래서 미국의 의도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있던 차에 6·3 사태가 터진 겁니다. 때문에 저는 미국이 6·3 사태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죠.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된 필립 하비브가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있다(1971년 10월).

    그때 서울 거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라디오를 들으니 미국대사와 유엔군 사령관이 데모대 때문에 청와대로 들어가지 못하자 헬리콥터를 타고 들어가 박 대통령을 만난다는 거예요. 그때 정보부에서 저를 찾아와 “유엔군 사령관과 대통령이 만나는데 이 대목에서 목사님이 박 대통령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이 박정희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것으로 알고 박정희를 향해 “더 미련 갖지 말고 타협해서 망명을 하든지 해라”고 얘기한 겁니다. 아, 그런데 그날 밤에 위수령이 선포되지 뭡니까. 그런 말을 했으니 무사하지 못하겠다 싶어 아내와 차를 타고 망우리 쪽으로 도망을 갔는데, 군인들이 와-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제서야 내가 미국한테 속은 거로구나 싶더군요. 저는 미국이 ‘헌법에 준한 변화’를 언급했기에 6·3 사태가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봤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후로 저는 미국 사람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게 됐어요.

    박 : 미 대사관 문서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이 미 대사에게 시위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문했는데, 미국은 이를 진압하는 쪽으로, 즉 군대 이동을 승인 또는 묵인하는 쪽으로 정책을 정했습니다. 4·19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 거죠. 아까 하비브 얘기를 꺼내셨는데, 그 분은 외교적으로 아주 뛰어난 분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강 : 그렇죠. 성격도 털털하고 말도 잘 통하는 사람이었어요. 로버트 키니처럼 아주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얘기는 허물없이 하는 사이였죠. 그런데 제가 하비브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윤보선씨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박정희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겸했을 때인데, 그때 대통령 직무대행 비서실장이 이동원(외무부 장관 역임)씨였습니다. 저와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그 사람이 반도호텔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더니 단성사 근처에 있는 한정식 집으로 데려가요. 들어가니까 하비브가 앉아 있습디다. 이동원씨는 저와 하비브가 모르는 사이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하비브와 눈을 깜박이면서 서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죠. 이동원씨는 하비브에게 저를 소개하더니 둘이 별별 얘기를 다 하더군요. 오가는 얘기를 들어보니 두 사람이 여간 가까운 게 아니야. 버럭 화가 나더군요. 미국대사관에서 저한테는 “박정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겠다”고 해놓고, 이렇게 박정희의 최측근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구나 해서요. 미국 관리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던데 이래서 그러는 거로구나 싶었죠. 그래서 이동원씨가 전화하러 밖에 나갔을 때 하비브에게 “더블 플레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마 욕도 했던 것 같아요.

    “朴정권 10년은 지지할 것”

    박 : 하비브가 처음 목사님을 만났을 때는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까.

    강 : 처음엔 저와 뜻이 같았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서 만났는데,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걸 보니 부아가 치민 겁니다. 그렇게 하비브와 헤어진 뒤에 그로부터 전화가 여러 번 왔어요. 전화를 받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았죠. 그런데 언젠가 아들과 반도호텔 앞을 지나고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 저기 좀 보세요” 해서 보니까 하비브가 대사관 앞을 걸어가면서 제게 손을 흔들고 있더군요. 본 체 만 체하고 그냥 왔습니다.

    그후 시간이 한참 지나선데, 오재경(5·16 쿠데타 후 공보부 장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 역임)씨가 몇 사람을 자기 집으로 저녁초대를 했어요. 누가 오냐고 물으니 홍종인(‘조선일보’ 부사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 역임)씨 등이 온대요. 그래서 갔더니 그 자리에 하비브가 쑥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서로 어색하게 대하다가 밥을 거의 다 먹을 때쯤 하비브가 제 옆에 와서 툭툭 치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자고. 그래 나갔더니 나무 그늘 아래서 “내가 한국 근무를 끝내고 내일 주베트남 대사로 가는데, 가기 전에 당신을 꼭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 그런데 도무지 만나주질 않아서 오재경에게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의리가 있지,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저더러 “감옥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어요. “일제시대 때는 가봤지만, 박정희 시대에는 안 갔다”고 하니까 “제발 감옥에 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더니 이런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한국은 독재국가라는 논리로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준 자료는 철저히 조사했으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그건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권력을 탐내는 한 사람의 정치가, 권력주의자다. 그래서 그에게 권력을 주는 대신 다른 것을 뺏기로 했다.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주는 대신에 사람을 바꾸라고 했다. 그 아래에 있는 좌파 인사들을 다 조사해서 바꾸라고 했다. 그래서 박정희와 그 사람들 사이에 ‘벽(정일권과 이후락을 지칭한 듯)’을 만들어 차단했다. 그러니 박정희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며 그저 한 권력자로 안주할 뿐이고, 따라서 미국은 그 사람 때문에 근심할 이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박정희 정권을 아마 향후 10여년 정도는 절대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지금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베트남 전쟁이다. 그런데 일각에서 베트남전을 백인 대 황인의 인종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이 인종전쟁 비난에서 벗어나려면 같은 황인종이 미국 편에서 전쟁에 가담하는 수밖에 없다. 즉 한국군이 참전해야 인종전쟁이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바뀐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하면 미국으로선 한국의 야당보다 박정희에게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박정희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보내기로 결정했으니 미국에 그보다 더 도움이 될 만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미국은 결코 박정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당신도 그걸 알고 조심해라. 당신에게 해줄 얘기가 많은데, 여기가 한국 땅이라 다 들려줄 수 없으니 외국 나갈 일이 있으면 사이공에 꼭 들르기 바란다.”

    하비브는 뒤에 한국대사로 왔는데, 그때도 저를 만날 때는 꼭 실내가 아니라 뜰에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김종필 라인의 속셈

    박 : 그 무렵 미국의 정치공작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는 없습니까.

    강 : 미국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공작의혹 사례가 하나 있어요. 1963년 선거에서 박정희씨가 10만여 표 차이로 당선됐는데,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그 선거에 야당에서 여러 명이 출마한 사실에 주목해야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했던 사람이 셋인데, 허정, 윤보선, 변영태였습니다. 그때 청년들이 연합해 박정희를 떨어뜨리기 위해 단일 후보를 내세우자고 나섰죠. 그래서 ‘이번에는 제일 연장자(윤보선)를 대통령후보로 뽑아 선거에 내보내고, 대신 4년이 아닌 2년 후에 다시 선거를 치르자’는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그 안을 들고 세 사람을 찾아갔는데, 허정씨가 참으로 용단을 내려줬어요. “나는 윤보선씨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청년들의 말이 옳으니까 뜻대로 하라”면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변영태씨는 사람이 달랐어요. 제가 그 사람을 찾아가 뜻을 전했는데, 엉뚱한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 아내가 세검정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이번에 네 남편이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고 계시했다는 거예요. 또한 선거에 안 나왔다가는 하나님이 노여워할 거라고 했답니다. 그후 전국 각지에서 변영태씨에게 지지 서신이 답지했어요. 그래서 “그게 중앙정보부 작품이지, 어떻게 그대로 믿습니까”라고 했더니 이 양반이 “정보부에서 보낸 편지가 어떻게 부산에서도 오고 김제에서도 오냐”며 펄쩍 뜁디다.

    제가 다시 설명을 했습니다. “당신이 윤보선씨와 나란히 출마하면 표는 아주 적게 얻겠지만, 그 표만큼의 차이로 윤보선씨가 지게 될 것”이라고. 그렇지만 변영태씨는 말을 듣지 않았어요. 결과는 예상대로였습니다. 윤보선씨는 변영태씨가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지고 말았습니다. 그 선거를 공명선거였다고 할 수는 없죠. 총칼로 빼앗은 정권을 어떻게 표로 이기겠습니까.

    박 : 시간을 좀 건너뛰어서 1969년 삼선개헌으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최근 공개된 미국 문서에 따르면 당시 상황에서 미국은 야당이 삼선개헌에 반대하더라도 박정희를 계속 지지하는 게 자기들에게 더 유리하고, 김종필이 정권을 잡는 것도 위험하다고 봤다는데요.

    강 : 제가 알기로는 이렇습니다. 5·16 쿠데타는 박정희가 주도해서 한 게 아닙니다. 사실상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주도했어요. 그런데 자기들이 앞에 나서기는 뭣하니까 박정희를 업은 겁니다. 그래서 그에겐 정권을 두 번만 맡게 하고 그 다음에는 김종필을 시키자, 그렇게 약속이 됐던 걸로 압니다. 때문에 1963년 선거와 1967년 선거까지는 박정희를 밀었죠. 그때 헌법에는 대통령을 한 번만 연임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타협이었죠.

    그런데 삼선개헌 전인 1967년 6월에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엄청난 부정선거였죠. 그래서 선거가 끝난 후 국회가 개원하기 전에 제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여야 지도자들의 대화 모임을 비공개로 열었어요. 시간도 무제한으로 이틀에 안 되면 사흘씩이라도 하자고 했죠. 사회도 여야가 다 동의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하자고 해서 고려대 오병헌 교수에게 맡겼습니다.

    그때 야당 사람들이 “이번에 선거를 치르면서 보니까 이 정권이 다음엔 삼선개헌도 불사할 것 같다”고 우려했어요. 그러자 민병권씨 등 당시 민주공화당 고위 인사들이 한결같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자식들이 있다. 나중에 손주들이 ‘너희 할아버지가 삼선개헌을 하는 데 가담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무슨 꼴이 되겠나.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자손들 볼 면목이 없어서라도 그건 못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나온 사람들 중 가령 예춘호씨 같은 사람은 “(삼선개헌)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고 그에 반대하겠다”며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후 결국은 삼선개헌 공작이 시작된 거죠. 당시 목소리를 높여 반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김종필 라인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좌파 사냥’

    박 :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김종필씨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지 않았나요?

    강 : 글쎄요. 제 기억에 적어도 제 주변 사람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어요. 그럴 만도 한 게, 그 양반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게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부터였거든. 당시 중앙정보부는 조금이라도 좌파 의혹이 있는 사람은 다 잡아들였는데, 약 3000명이 잡혀 들어간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도 비공산주의자는 물론 확실한 반공주의자들까지 끌려갔습니다.

    박 : 어쨌든 37세에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세상을 주물렀으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강 : 김종필씨는 그때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와서 저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죠. 그러던 사람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정치판에 버티고 있어요(웃음).

    박 : 윤보선씨를 비롯해서 당시 야당 인사들 얘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특히 요즘 이라크 파병 문제로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데, 당시 베트남 파병에 반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 :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베트남전은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어요. 6·25 때 미국이 우리를 도왔으니 우리도 미국을 돕는 게 옳지 않냐는 긍정론도 있었던 듯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국군이 외국 파병이 아니라 우리 국토를 지키기 위한 군대인데 왜 베트남에 보내냐는 부정론도 물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국민 다수는 베트남전 참전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지지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베트남 전쟁은 이라크 전쟁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놓고 비교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박 : 어떤 측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강대국의 간섭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현상으로 비칠 수도 있을 텐데요.

    DJ 대미정책 높이 살 만

    강 : 베트남전은 당시 동북아시아 상황 전체를 놓고 봐야 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하려다 결국 장제스가 쫓겨나고 마오쩌둥이 정권을 잡았고, 베트남전은 호치민의 하노이와 사이공과의 싸움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이 이뤄지면 다음은 한국 차례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저지해서 공산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닥칠 화를 막는 길도 된다는 점에서 지금의 이라크 전쟁과는 성격이 달랐던 겁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의 시점에서 하는 얘기지, 지금 시점에서도 꼭 그것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보면 모두 미국의 전쟁에 끌려다닌 것이지만.

    박 :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시절에나 지금에나 약소국이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은 듯합니다.

    강 : 우리는 미국을 양면으로 봐야 합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봐야 해요. 한편으로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잊을 수 없지만, 가령 지금의 쇠고기 수입 사태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우리 외교정책을 보자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는 김대중씨가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손을 잡으면서도 미국에 끌려가지 않았거든요. 미국이 MD니 뭐니 하는 데도 대답하지 않았고, 부시가 ‘디스맨(this man)’이라고까지 했지만 우리가 그냥 끌려가지는 않았거든. 그렇다고 해서 주먹질하지도 않았고. 할 일은 하면서 밀고 나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해요. 친미다, 반미다 해서는 안 돼요. 언제라도 국가 이익을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죠.

    박 : 장시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호에서는 야당과 재야세력,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대해 말씀을 나누기로 하죠.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 박태균 교수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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