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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을(乙) 중 을’ 대리기사 25시

  • 박은경 |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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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에 줄잡아 20만 명. 최근 발생한 ‘대리기사 폭행사건’에서 보듯 대리운전 기사들은 ‘을(乙) 중 을’의 생활을 이어간다.
  • 하지만 일 ‘대리(代理)’라고 인생마저 대리인 건 아니다.
  • 오늘도 밤길을 누벼야 하는 고달픈 그들의 눈물 어린 애환과 속내.
“지금도 어디선가 얻어맞고 있을 것”

서울의 대리기사 집결지 중 한 곳인 일명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

자정 넘은 시각, 한 대리운전 기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피 같은 시간이 10분을 넘어 30분을 지난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갈 즈음 저만치 거나하게 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대리기사는 “다른 기사를 불러라. 가겠다”며 돌아선다. 그때 무리 중 한 여성이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명함을 내민다. 마지못해 명함을 건네받은 대리기사는 “국회의원이 뭔데?”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9월 17일 불거진, 세월호 참사 유가족 등이 연루된 일명 ‘대리기사 폭행사건’의 전말을 그동안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내용으로 간략히 재구성한 장면이다.

날이 밝고 사건 소식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온 나라가 벌집을 쑤신 듯 들썩였다. 파장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일파만파로 번졌다. 사건을 맡은 서울영등포경찰서 홈페이지엔 부실한 초동 대응과 수사를 질타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글이 폭주했다. ‘힘없으면 잡아가서 밤새 조사하고 힘 가진 사람은 대리기사를 패고도 승합차 태워 경찰서로 모시고 와 조사도 하지 않고 보내고,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경찰의 평소 정당한 일처리 방식인가?’ ‘경찰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초동조치부터 잘못됐다. 국회의원은 초법적 존재인가? 법 적용도 신분에 차별을 두는가? 검찰에서 직접 수사하라!’….

사건 수사가 20여 일을 넘기면서 ‘국가정보원 개입’ 등 각종 음모론이 등장했는가 하면 이념 대결로 치닫는 양상마저 나타났다. 그뿐 아니라 사건의 실체를 둘러싸고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이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면서 사건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모른다. 특히 국민의 공분을 산 건 김 의원이 우리 사회 ‘을(乙) 중 을’인 대리기사에게 명함을 건네며 자기 신분을 과시한 점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말로 특권의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자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소위 힘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의 행태를 그동안 질리도록 봐온 국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성토하고 나섰다.

“네가 뭔데 깨워? ○새끼야!”

이번 사건과 관련해 누구보다 분노가 폭발한 이들은 20만 명을 헤아리는 전국의 대리기사다. 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터넷 카페 ‘달빛기사’와 ‘밤이슬을 맞으며’는 최근 하루 방문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곳에서 울분에 찬 대리기사들의 글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월호 유족대표 폭행사건 20만 대리기사 분노한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리기사를 공손하지 못하다고 폭행! 세월호 유가족이 벼슬 되었다.’ ‘국회의원님! 서민 중 서민인 대리기사를 집단폭행하고도 나는 잘못 없네,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쌍방폭행이라니…’ ‘폭력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용인돼선 안 됩니다. 대리기사 폭행사건도 연루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쏙 빠지도록 책임지게 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관련업계에 따르면, 20만 명의 대리기사 중 ‘투 잡’을 뛰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다. 40대 후반의 1년차 대리기사 정모 씨는 “이 일을 하면서 연구원으로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사람도 봤고, 덤프트럭 2대로 개인 사업을 하는 이도 봤다. 모 대학병원 직원도 있었다. 30대 중반의 일반 직장인 중에도 투 잡을 하는 알뜰한 친구들이 있다. 흔히 대리기사를 ‘인생 막장’으로 여기지만 그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이들”이라고 했다. 정씨 역시 무역업으로 번창해 중국까지 진출했다가 2000년대 중반 사기를 당해 사업에 실패한 경우다.

대리기사를 ‘업(業)’으로 삼은 이들 중엔 정씨처럼 사업에 실패한 최고경영자(CEO)나 명예퇴직한 대기업 임원, 무명배우 등 전직(前職)이 실로 다양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밑천 없이 맨몸으로 뛰어드는 곳이 바로 대리운전업계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삼촌, 친구, 동료인 평범한 이들임에도 일부에선 마치 처음부터 대리기사였던 것처럼 대리기사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며 얄팍한 특권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대리기사에게 국회의원이란 직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청소부나 국회의원이나 우리한텐 똑같은 손님일 뿐”이라는 40대 후반 대리기사 이모 씨는 젊은 시절 대기업에 다니다 사표를 내고 해외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3년 뒤 귀국해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밀려나 6년째 대리기사 생활을 한다.

이씨는 대리기사 생활 초반에 당한 몇 건의 수모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30대 중반의 남자 회사원 손님이었다. 목적지를 처음부터 정확히 가르쳐주지 않고 잠이 들었기에 집 인근에 가서 깨웠다. 그랬더니 ‘네가 뭔데 자는 사람을 깨워? ○새끼야!’ 하면서 욕을 하고 내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내렸다. 한번은 운전 중에 중년 남자 손님이 뜬금없이 노래를 불러보라기에 난감해서 못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점수를 매겨달라고 했다. 모 회사 사장이고 청와대에 연줄도 있다면서 좋은 데 취직시켜주겠다기에 나중에 연락해봤더니 ‘뻥’이었다. 손님 중에 대리기사를 하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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