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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논단

동서양 史料로 본 Corea, Korea 연원

‘Corea’ 되찾아야 민족 주체성 회복

  • 글: 오인동 의사, Korea2000 위원

동서양 史料로 본 Corea, Korea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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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의 영문명은 ‘Republic of Korea’다.
  •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한다.
  • 남북한 모두 Korea라는 영문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한 어느 쪽도 스스로 인정한 적 없다. Corea에서 Korea로 뒤바뀐 이유와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동서양 史料로 본 Corea, Korea 연원

1735년 장 당빌의 지도에는 조선이 ‘Tchao Sien’과 ‘Corea’로 함께 표기돼 있다.

필자는 1997년 ‘남과 북의 통일방안 비교고찰’이라는 글에서 ‘코리아 연방공화국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방안 중 하나로 우리의 국호를 조선도, 대한민국도 아닌 한글과 영어 공히 ‘코리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2002년 6월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월드컵대회 당시 ‘오-필승 꼬레아’의 함성을 듣고, 또 경기장 가득히 ‘Corea’라 쓰여진 피켓과 플래카드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 새삼 필자가 제안했던 ‘코리아’는 ‘꼬레아’로, ‘Korea’는 ‘Corea’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언제부터 Corea 또는 Korea로 서방세계에서 불리고 또 쓰여졌던 것일까.

四季 뚜렷한 신라는 ‘이상향’

이슬람 문화 전문가 이희수 교수(한양대·문화인류학)가 쓴 ‘한·이슬람 교류사’에 따르면 847년(신라 문성왕 9)에 출간된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후르다드베 이외에도 9명의 아랍학자가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신라의 역사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로마형 유리, 카펫, 세공예술, 공후(악기), 사자춤, 가면극 등 신라의 유물 속에서 이슬람 문물의 유입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신라시대에는 이슬람계 사람 상당수가 수도 경주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0년경에 나타난 색목인(서방인) 같은 ‘처용’이 바로 아리안계 무슬림으로 간주되고 있다. ‘처용가’는 처용과 신라여인과의 남녀관계를 읊은 노래다. 고려가 935년에 신라를 점령하고 통일을 이룬 후에는 아랍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에 있는 예성강 포구 벽란도를 드나들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024년(고려 현종15)과 그 다음해에 열라자, 하선 등 대식국(아랍) 상인 100여 명이 현종에게 공물을 바친 사실이 있다. 그 후 1040년(고려 정종 6)에도 보나합 일행이 수은, 용치, 점성향 등을 정종에게 바쳐 후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라비아쪽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1154년(고려 예종 8)에 출간된 아랍의 저명한 지리학자 이드리시(Al-Idrisi)의 저서 ‘극지횡단 모험가의 산책’에서 확인된다. 이 책에 “Shila(당시는 고려)에 온 여행자들은 좋은 기후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사의 지대에서 온 그들에게 사계가 뚜렷한 신라는 이상향(理想鄕)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몽골군이 이란(페르시아)을 정복하고 세운 일한제국(1256∼1353)의 의사이자 역사가 알딘(Rashid-al-Din, 1248∼1318)이 역사서인 ‘종합사’에서 처음으로 고려를 Kaoli로 표기했다. 그는 고려를 원나라의 1개 성으로 분류하면서 Kaoli와 Kao Kauli(고구려)로 구성돼 있으며 임금을 왕이라 부르는 변방이라 했다. 이 저서는 1300년대 초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해석을 반영이라도 하듯 고려는 원(元)의 부마국이 되어, 원 세조의 딸 후드르칼리 미쉬(제국공주)가 충렬왕비가 된다. 충렬왕비는 고려로 올 때 아랍인 시종 삼꼬(삼가)를 데리고 왔다. 이 삼꼬가 고려여인과 결혼해 귀화하자 왕은 장순용이라는 성명을 내리는데, 그가 덕수 장씨의 시조다.

이후 개경에는 아랍인이 많이 살게 돼 이슬람 사원과 회회(아랍)인 상점도 생겼다. 고려사 ‘악지’에 실린 가요 ‘쌍화점’은 만두가게 회회인과 고려여인과의 관계를 풍자한 자유분방한 노래다.

고려를 Kaoli로 표기한 두 번째 저서는 오스만투르크(터키)제국(1298∼1924)의 학자 아크바르(Ali Akhbar)가 1516년에 편찬한 중국여행기 ‘키타이서’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00여 년이 지난 후였지만 그는 고려가 중국의 12지역 중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풍요로우며 상인들이 아랍인을 우대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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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인동 의사, Korea2000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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