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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최성일의 논쟁적 책읽기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가” 되묻는 추리소설 ‘철학적 탐구’

  • 글: 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jjambo@nownuri.net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가” 되묻는 추리소설 ‘철학적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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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 소설이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은 역시 비트겐슈타인이다. 필립 커는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를 소설의 뼈대로 삼았고,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로 살을 붙였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무시하고 넘어가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그러한 독서는 ‘진귀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필립 커가 비트겐슈타인의 수고(手稿)인 ‘청색노트’와 ‘갈색노트’까지 소설적 장치로 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정신과 의사 토니 첸 박사가 최면을 통해 떠올린 코드명 비트겐슈타인의 인상착의는 바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그것이다. “키는 중간 정도, 갈색의 물결 모양 머리, 크고 날카로운 푸른 눈, 골똘해 보이는 얼굴 표정, 그의 이마는 항상 생각에 열중하고 있는 듯 날카로워 보여요. 코는 매부리코에 가깝군요. 입술은 다소 까다로워 보이는데, 여자 입술과 닮았다고나 할까요. 거울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야위었는데 건강해 보이지 않아요.”

최근 번역된 추리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개봉 영화의 내용을 발설하는 것만큼이나 잠재적인 독자에게는 김새는 일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500쪽이 넘는 소설의 내용을 두루뭉실하게 정리해보겠다. 소설의 배경은 2013년 영국 런던이다. 그러니까 SF 스릴러로도 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지명이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런던 경찰청은 연쇄살인사건을 추적중이다.

이 사건들은 이른바 ‘롬브로소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 ‘롬브로소 프로그램’은 유럽공동체 차원에서 마련한 일종의 예비검속 또는 범죄예방책으로, 남성의 호전적 반응을 억제하는 뇌의 ‘시상하부 배 안쪽의 핵(VMN)’이 결핍된 잠재적 범죄자를 첨단기술로 가려내 보호하는 프로젝트다. 말이 보호지 범죄 발생을 막기 위한 사전 예방적 조치인 셈이다. 2011년 이후 영국 거주 남성 400만명을 대상으로 VMN결핍검사를 시행한 결과, 0.003%(120명)가 반(反)VMN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쇄살인의 남성 희생자는 모두 반VMN 판정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 프로그램’이라는 한글판 부제목은 ‘롬브로소 프로그램’이라 하는 것이 더 나았을 성싶다.

마르크스 이론 강의도



희생자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의 신원 노출을 막기 위해 부여한 코드명이 서양 철학자의 이름이었다. 결국 제이코비치 경감과 런던 경찰청 수사관들의 활약으로 범인의 윤곽이 잡힌다. 물론 독자는 소설 속의 경찰들보다 먼저 누가 범인인지 알게 된다. 여성 연쇄살인범에게는 약간의 트릭이 설정돼 있다.

이 소설에는 ‘소설가 소설’로 읽히는 대목도 더러 있다. 추리소설 전문서점의 썰렁한 저자 사인회 광경도 그렇지만 제이코비치 경감의 독서취향에서 보여지는 추리 작가들의 외모 묘사는 더욱 그렇다. 책 날개에 실린 필립 커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다. 또 필립 커는 코드명 비트겐슈타인의 입을 빌려 연쇄살인범의 행동을 사적 유물론의 산물로 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 이론은 사회의 근본적인 희생자가 사회의 적대자로 변모한다고 설명한다.”

펭귄판 ‘자본론’의 서문을 집필한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이후)은 이러한 관점에서 범죄소설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만델은 추리소설과 범죄를 다루는 비(非)통속문학을 구분하는데, 그 기준은 작가의 주관성이다. “통속문학의 경우 이러한 주관성이 부재하고, 그 상업적 목적으로 인해, 독자들이 지녔을 것이라고 추정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한에서만 사회를 ‘반영한다’.”



그럼에도 나는 통속문학임을 부인할 수 없는 필립 커의 ‘철학적 탐구’에 진정한 문학의 면모가 담겨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은 기술 본위 사회의 암울한 미래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데 있지 않다. 이 소설의 진정성을 말해주는 징표는 다음 한마디로도 충분하다.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할 논리적 이유가 없어서 나는 살인을 한다.”

신동아 200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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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jjambo@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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