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이제 미국은 없다?

崇美에서 反美까지… 한국인의 복잡한 심리 분석

  • 글: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입력2002-12-31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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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관계는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이르렀다.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친미나 반미의식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지혜롭게 대응하는 용미(用美) 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미국은 없다?

    2002년 12월7일 광화문에서 1만여 명의 시민이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을 추모하면서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반미(反美) 열풍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여중생 사건’을 계기로 점화된 반미 열풍은 NGO(비정부기구)를 시작으로 대다수 사회조직은 물론 대선을 앞둔 정당까지 가세함으로써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반미 열풍이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2년 초 이른바 ‘오노 사건’을 계기로 이미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모은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노 사건’에 따른 반미 열풍이 주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면, 최근 진행중인 반미 열풍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국민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반미 열풍은 그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것이다. 여중생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에게 무죄 평결을 내린 것은 굳이 한국 국민이 아니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한미 관계라는 특수한 정치·군사적 조건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권의 시각에서 먼저 접근해야 할 문제다. 사건의 전후가 명백한 데도 이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것은 상식적인 시각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다.

    최근의 반미 열풍에는 미국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 변화가 감지된다. 어느 때부터인가 미국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반미의식이 확산된 반면 숭미(崇美)에 가까운 친미의식은 약화됐다.

    압도적인 미국 선호도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한국전쟁과 경제 기적, 또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동아시아의 크지 않은 국가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미국은 해방 이후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압도적인 호감을 가졌던 미국에 대한 태도가 왜 이렇게 변화됐을까. 반미의식은 최근 갑자기 분출했다기보다 1980년대 이후 꾸준히 확산돼 왔으며, 그 의식의 내면 또한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다.

    먼저 한 자료를 보면 최근 전세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호감도가 하락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인간과 언론을 위한 퓨 연구센터’가 2002년 7월부터 10월까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대미 호감도는 2년 전에 비해 5% 정도 떨어진 53%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지난 2년 동안 부시 행정부의 공세적인 대외 정책이 대미 호감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지만, 친미의식의 이런 약화는 해방 이후 특수한 한미 관계를 고려해볼 때 주목할 만한 변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에 대한 우리 국민의 호감도는 1980년대까지는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의 실시와 남북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 우리 현대사의 향방을 가른 중대한 사건들에서 미국이 끼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단체제가 고착된 이후 미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됐는데, 막대한 규모의 군사·경제 원조와 주한미군의 존재는 많은 국민이 미국은 한국 최고의 ‘우방’이자 ‘맹방’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친미의식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미국은 서양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 국민에게 서양은 곧 미국을 의미했는데, 서양 제도는 미국 제도, 서양 경제는 미국 경제, 또 서양 문화는 당연히 미국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는 미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시기였으며, 많은 한국인에게 미국은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국가로, 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나라로 받아들여졌다.

    1965년에 미국 공보원이 서울 인근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는 당시 친미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자료에 따르면 ‘어느 나라를 제일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8%가 미국을 지목했으며, 미국이 싫다는 사람은 1%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에 이어 좋아하는 나라로 손꼽힌 국가는 일본(12%), 인도(7%) 등이었으며,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는 중국(78%)이 지목됐다. 이 조사 결과는 1960년대 당시 냉전 시대 분위기가 반영돼 있는 것이지만, 미국에 대한 선호도 내지 친밀감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이런 높은 친미의식은 현실적이고 이념적인 근거를 모두 갖고 있었다.

    먼저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한과 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은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로 인식됐으며, 미국으로부터 제공된 막대한 원조와 차관은 한국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입안과 추진 과정에 절대적인 조언자였으며, 미국 시장은 가장 중요한 수출시장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우산 속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재생산돼 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미국은 없다?

    1982년 3월 문부식씨가 주동이 돼 일으킨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현장 검증 장면

    당시 친미의식은 이런 현실적인 근거만 갖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인 조건 못지않게 이념과 사상에서도 미국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와 동의어였으며, 우리가 뒤쫓아야 할 이념적, 정치적 모범으로 생각됐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 현대사에서 중대 사건이 벌어졌을 때 미국이 가졌던 위상이다.

    예를 들어 1960년 4월 혁명에서 미국의 태도는 혁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혁명 초기 시위에 침묵을 지킨 미국이 4·19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관련자 제거, 선거법과 국가보안법 개정 등을 촉구하고, 무엇보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함으로써 혁명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70년대 초반까지 긴밀하게 유지돼 온 한미 관계는 이른바 1976년 ‘박동선 사건’으로 촉발된 ‘코리아 게이트’를 기점으로 불편한 관계로 바뀌었다. 이 불편한 관계는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 행정부 당시 절정에 달했는데,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포함해 한미 관계의 긴장이 고조됐다.

    이런 긴장을 낳은 주요 원인으로 유신체제라는 독재정권에 대한 카터 정부의 거부감을 먼저 지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역학 구도에서 냉전시대의 한미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여하튼 이 긴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카터의 재선 실패로 곧 수그러들었다.

    주목할 것은 상황이 이렇게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음에도 친미의식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1981년 ‘동아일보’가 전국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미국은 60.6%로 여전히 수위를 차지했다. 미국 다음으로는 스위스(9.4%), 이스라엘(7.7%), 영국(4.3%), 프랑스(2.4%) 등이 꼽혔지만, 그 선호도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북한(59.4%), 일본(21.9%), 소련(9.9%) 등의 순으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런 친미의식은 1980년대 이후 서서히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손꼽혔던 미국은 2002년 갤럽이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서는 선호도 13.2%에 머물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호주(14.2%), 미국, 캐나다(8.5%), 스위스(7.6%), 중국(6.6%), 일본(6.2%) 등의 순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단순한 항목이기는 하지만, 이런 비율의 변화는 우리 국민이 미국에 대해 갖고 있던 친화적인 이미지가 빠른 속도로 감소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반미의식은 언제 본격화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을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아래서 학생운동은 크게 NL(민족해방)계와 PD(민중민주주의)계로 분화되면서 발전해 왔는데, 이 가운데 NL계는 분단의 책임을 미국에 귀속시키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미의식을 유포시켰다. 또한 이들은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는 데 미국이 방조했으며,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진압부대가 미국의 승인 없이 동원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반미운동을 전개했다.

    학생운동이 주도한 이런 반미운동은 해방 이후의 한미 관계를 돌아볼 때 일대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3월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으며, 1983년 9월에는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이, 1985년 5월에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으며, 대학가에 반미의식이 학생운동의 주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1980년대 수입된 종속이론과 주변부 자본주의론은 반미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이론은 미국이 제국주의의 중심부 국가로서 한국 경제의 파트너가 아니라 지배자 내지 착취자이며, 따라서 미국 자본주의와 단절하는 것이 자립경제를 위한 일차적인 과제임을 강조했다. 사회주의와 밀접히 관련된 이 이론들은 강의실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지만 강의실 밖에서는 이른바 서클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토론됨으로써 학생들의 대미의식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85년 서울대생을 상대로 이뤄진 ‘미국에 대한 인식 조사’는 당시 학생들의 대미의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 결과를 보면, 한미 관계에 대해 ‘대단히 불만’을 가진 학생의 비율이 47.2%에 달했으며, ‘다소 불만’의 비율은 33.7%를 기록했다. 반면 한미 관계에 대해 ‘다소 만족’한 학생은 4.4%였으며, ‘매우 좋다’는 학생은 0.6%에 불과했다.

    학생들의 미국에 대한 불만은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관찰됐다. 정치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미국 이익 우선’이라는 견해가 55.0%, ‘대체로 미국 이익 우선’이라는 견해가 40.0%를 차지했다. 경제관계에 대해서는 ‘미국 이익 우선’이라는 견해가 91.2%를 차지했다. 문화의 경우에는 ‘미국이 한국 문화를 거의 지배하고 있다’는 견해가 56.7%인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대학생들의 이런 대미의식은 일반 국민들의 대미의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학생들의 이런 문제 제기가 그동안 보여왔던 숭미에 가까웠던 일방적인 친미 의식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전후로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재정권을 옹호해 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 또한 친미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선별적인 수입규제 조치를 취하는 동시에 수입시장 개방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이런 경제 조치들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영원한 친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했다. 국제사회에서 어느 나라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며 미국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은 일방적인 친미의식에 의문을 갖게 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고압적인 통상 압력은 서서히 반미의식을 싹트게 만들었다.

    여기에 주목할 것은 친미의식과 반미의식의 이런 변화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80년대를 경유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어느 정도 달성한 우리 국민들이 갖기 시작한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은 이제까지 종속적인 관계를 암묵적으로 당연시해 온 대미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미국을 적대시하거나 추종한다기보다도 미국은 미국이며 우리는 우리라는 의식이 나타났다. 이런 의식은 특히 1988년 올림픽 개최를 통해, 그리고 이후 민주화 과정에 서서히 강화했다. 이런 대미의식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제는 우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더 이상 미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1980년대 반미와 1990년대 반미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 것일까. 먼저 1980년대 반미의식은 학생운동 내지 사회운동의 ‘이념적 반미’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념적 반미란 반자본주의라는 이념의 프리즘으로 한미 관계를 새롭게 파악함으로써 미국을 거부하려 했던 것을 말한다. 이 이념적 반미는 미국의 또 다른 실체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없지 않았지만, 극단적인 반미의식을 고취했다는 점에서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세대가 가졌던 이런 반미의식은 그들이 사회에 진입하면서 다소 약화되기는 했지만, 그 기조는 계속 이어져왔다.

    1980년대 반미의식과 비교해 1990년대 반미의식은 ‘논리적 반미’와 ‘정서적 반미’가 결합돼 있다. 여기서 ‘논리적 반미’가 한미 관계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의식을 말한다면, ‘정서적 반미’란 제도와 문화를 포함한 ‘미국적인 것’을 정서적으로 거부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미국의 물질적 지배에 저항

    후자의 ‘정서적 반미’는 비단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비 서구사회에서 광범위하게 관찰되는 것으로, 미국의 물질적 지배가 강화되면 될수록 이에 비례해 의식적 측면에서 ‘미국적인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화돼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질적인 지배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우월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나라들로는 흔히 이슬람 국가들이 꼽히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1990년대 이후 강화돼 왔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2월 갤럽이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주요 국가 선호도는 반미의식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먼저 조사 결과를 세대별로 보면, 30대의 경우 미국이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은 각각 2.2%, 19.0%인 반면에,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38.4%, 35.6%였다. 20대의 경우에는 미국이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은 4.8%, 18.3%인 반면에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은 28.8%와 41.4%였다. 40대의 경우에는 미국이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은 11.1%, 29.8%인 반면에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은 26.0%와 29.4%였다. 그리고 50대 이상에서는 미국이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이 18.6%, 31.4%인 반면에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은 22.5%와 16.9%였다.

    세대 구분에 따른 이 조사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른바 386세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반미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386세대를 예외로 한다면 나이가 많을수록 반미의식이 감소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각 세대가 겪은 개인적 경험들이 반영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20대의 반미의식이 30대 못지않게 높다는 점으로,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이 세대 또한 미국 문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미국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 점에서 최근 반미 열풍에 20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반미 정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의 이런 반미의식은 이 세대의 특징으로 지목되는 서구적인 개인주의 의식과 일견 모순돼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앞서 지적한 정서적 반미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세대에 대한 미국적인 것의 압도적인 영향력이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반발의식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 반미라 해서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바람에 크게 영향을 받는 의식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가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자료는 교육 수준에 따른 반미의식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중졸 이하에서 미국이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은 52.0%였으며,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은 33.3%였다. 고졸에서는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이 29.4%였으며,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이 64.8%였다. 대재 이상에서는 ‘아주 좋다’와 ‘약간 좋다’는 사람이 28.4%였으며, ‘약간 싫다’와 ‘매우 싫다’는 사람이 68.2.%였다. 조사 결과는 학력이 높을수록 반미의식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을 많이 알면 알수록, 미국과 접촉이 많으면 많을수록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지난 1980년대부터 본격화한 반미의식은 몇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학생운동에서 비롯된 반미의식은 이제 전사회적인 담론으로 확장됐다. 둘째, 1980년대 반미의식이 이념적 반미에 가깝다면, 1990년대 반미의식은 논리적 반미와 정서적 반미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나이 든 세대보다 젊은 세대의 경우가 대체로 반미의식이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최근 ‘여중생 사건’으로 반미의식이 크게 확산됐지만, 대체적으로는 반미의식과 친미의식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반미의식과 친미의식의 공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때 지난 몇년간 반미의식이 확산돼 왔다고 해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한 것은 아니다. 문화의 세계화가 가속화하면서 미국 문화의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돼 왔기 때문이다. 조기유학 열풍은 그 단적인 사례이며, 할리우드 영화나 팝 뮤직 등을 필두로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은 다른 나라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미국적인 것은 ‘표준적인 것’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란 다름아닌 ‘아메리칸 스탠더드’를 의미하고 있다.

    반미와 친미의 공존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과 미국을 좋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문제는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공적 영역에서는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사적 영역에서는 미국을 추종하는 역설적인 의식이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이를 약소국의 비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미의식과 친미의식의 역설적인 공존은 미국에 대한 우리 한국인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역설적인 의식을 낳게 한 주요 원인은 일차적으로 미국의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태도에 있다. ‘여중생 사건’으로 돌아가보면 정상적인 한국인이라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건은 사과를 받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기존의 태도를 고수하는 한 반미의식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 명확하다. 또한 이런 태도는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이익에도 결코 이롭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소파(SOFA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포함해 새로운 대한 정책을 전향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한미 관계는 새로운 전환의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도 미국을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현대사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미국에 대한 애증은 불가피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정서적인 애증 병존을 넘어서 새로운 한미 관계의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한미 관계란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지속하는 데는 극단적인 친미의식이나 반미의식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용적인 친미와 실용적인 반미를 포괄하는 이른바 용미(用美)의 방법이다. 용미의 방법은 미국에 지혜롭게 대응함으로써 우리의 국익과 미국의 국익이 포지티브섬(positiv-sum) 게임이 될 수 있게 하는 전략을 말한다. 이 용미 전략을 펴기 위한 전제조건의 하나는 아마도 반미와 친미를 넘어서 미국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그리하여 지혜롭고 당당하게 대응하는 용미의식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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