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도 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건 상당히 부유했다는 뜻일 텐데요.
“그렇지요. 내가 열네댓 살 될 때까지 우리집은 제법 잘살았어요. 동네 사람이 다 한집안이라 늘 관심의 대상이었고.”
이어령은 1933년 생이다. 충남 아산군 온양읍 좌부리가 고향이다. 그는 좌부리에서 태어났지만 우봉 이씨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용인에서 살았다. 증조부·조부가 서울 정계에 진출한 경력을 가진, 시골 살림을 살면서도 ‘대처사람’다운 합리성과 균형감각을 지닌 지식인 집안이었다.
동네 아이들과는 처지가 다르고 감수성이 달랐던 그는 주로 형제들과 어울렸다. 안온하고 평화롭고 지적인 세계였다.
-맏형과는 16세나 차이가 나는데, 형들이 무섭거나 억압적이지는 않았나요.
“무섭기야 무섭지요. 그런데 형님들이 잘 놀아줬어요. 큰 형님은 함께 산책하면서 옛날 얘기를 해주시고, 둘째 형님은 기타를 가르쳐주시고, 셋째 형님은 운동을 하니 복싱을 가르쳐주고. 넷째인 누나는 문학 소녀라 같이 네잎클로버도 따러 다니며 정겹게 지냈지요. 참 그 쪼꼬맣고 유치한 애를 데리고 뭘 할 게 있다고. 하여튼 형제끼리 앉아 철학, 문학, 영화 얘기를 많이도 했어요. 그런 것이 다 나에게는 지적 원천이 됐어요. 큰형님만 해도 16년 앞선 그 인생을 빌려 체험한 셈이니까.”
-대개 위대한 예술가는 콤플렉스 속에서 성장한다는데, 선생은 적어도 가난과 관련한 콤플렉스는 갖지 않아도 좋았겠군요.
“근데 그게 아니에요. 나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10대 후반부터 한 5~6년간은 적빈의 삶을 살았어요. 그야말로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사흘, 나흘 가도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는 나날. 또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리 대단한 고통은 아니었겠지만, 곱게만 자란 나로서는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어요.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대가족이 완전히 해체돼버린 것이었고.”
아직 외가, 친가는 이전의 기세를 잃지 않았던 때다.
“거기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기와집이고, 하지만 나는 끼니도 못 이을 상황이니까. 그 자의식 때문에 잘사는 친척집에 가도 밥상이 나오면 슬그머니 빠져 나오곤 했어요. 때때로 뒷동산에 올라 보면 밥때가 돼도 우리집 굴뚝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거든. 그럼 그냥 안 들어가요. 가봤자 밥도 없는 걸.”
“나의 보수성은 휴머니즘”
이어령은 1952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부산 피란처에서 뒤숭숭하게 보내고 2학년 가을이 되어서야 서울 동숭동 교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울대 문리대 시절은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만이 수북한 파괴와 고통의 지대에서 이어령과 그 친구들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전복과 반역의 꿈을 키워갔다. 이들은 게걸스레 흡수한 서양 이론과 폭발하는 젊음을 무기로, 남북으로 갈려 빈약해질대로 빈약해진 기성문단에 독침을 쏘았다. 대학교 3·4학년 시절, 이어령은 이미 평단의 ‘무서운 신예’로 부상해 있었다.
-문리대 시절 얘기 좀 해주시죠.
“그때는 한국인이라거나, 아시안이라거나, 20대라거나, 그런 나에게 씌워지는 일체의 관사를 다 벗어버리고 싶었어요. 이상(李箱·본명 김해경)이 왜 성을 갈았는지 알겠더라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모든 것을 난 믿지 않았어. 신분증으로 설명되는 모든 걸 거부한 거죠. 중요한 건 실존적인 나니까. 그래서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에 심취하고, 또 엘뤼아르 같은 저항시인들 좋아하고. 지적 유목민이라는 게 바로 그런 거여.
근데 그건 내 개인의 성격이라기보다 시대의 성격이었어요. 조국이 일본이라 생각한 게 엊그제 얘긴데, 그야말로 “일본 군대가 졌다”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비칠 정도로. 우리 원수고 지배자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산 내 어린 시절. 바꿀 수도 없고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는 그 쓰라린 과거. 근데 또 얼마 안 있어 인민군이 들어오고 중공군이 들어오고 미군이 들이닥치고. 여기저기서 잡아가고 잡혀가고, 그런 세상에서 정신 올바로 박힌 놈이 어떻게 이게 내 신념이라 자신할 수 있겠어.”
그는 자신이 쓴 ‘전쟁 데카메론’을 예로 들었다.
“그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다 그때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지. 한 소녀가 겁탈을 당해 혀를 물고 죽습니다. 그 소녀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것이 국방색 내복 단추 하나요. 그러니까 범인은 군인이란 소리지. 근데 미군인지 국군인지 중공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가 없어. 그래 소녀 아버지가 그 단추 하나를 들고 온데를 헤매요. 그때 누가 말해줘. ‘왜 그걸 찾아다니시오. 미군이면, 인민군이면, 중공군이면 또 어찌하리요. 전쟁이란 그런 단추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거라오.’
전쟁에 정의가 어디 있고 불의가 어디 있어. 국군은, 인민군은 학살 안한 줄 압니까. 양쪽이 다 참혹하게 죽고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내가 어느 편에 서겠어요. 누구다, 무엇이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전쟁은 똑같다는 거, 전쟁은 해선 안되고, 나를 압도하는 것이고. 그러니 어떤 전쟁이든 반대할 수밖에. 다만 한국이 피란 가라 그러면 난 북쪽 아니고 남쪽으로 갔다 이거지.”
그는 자신에게 ‘보수성’이란 휴머니즘이라고 했다.
“전쟁 때 부역한 사람들 잡아다 깜깜한 데 가둬놓고 나에게 보초를 서라 그러면, 갇힌 사람들이 그렇게 안돼 보일 수가 없어요.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싶다며 안달들인데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그래 불이랑 담배를 구해다 주면 그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고…. 그럼 난 기분이 좋으냐? 그냥 누구 편이어서가 아니 인간적으로 불쌍해 그렇게 한 것뿐인데, 한편에서는 박수를 보내고 또 다른 쪽에서는 “너 사상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을 하고. 양쪽으로부터 오해받는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겠소. 그렇게 이념보다 휴머니즘이 앞서는 것이 나의 보수주의라면 보수주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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