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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5)|코소보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인종청소’ 비극 품은 발칸의 핏빛 휴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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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위기는 1990년대 초 유고연방이 분열될 무렵부터 이미 조짐을 보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코소보 위기가 유고연방 균열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나 코소보 사태는 보스니아 내전에 가려 국제적인 눈길을 끌지 못했다. 보스니아 내전이 격화하기 시작한 1992∼93년에 코소보의 긴장을 덜어보려는 외교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 보스니아 내전에 묻혀버렸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을 끝내기 위한 데이튼 평화협상에서 코소보 문제가 다뤄지지 않자 그동안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판단한 일단의 젊은 코소보 분리주의자들은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어내기 위해 극단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그것은 코소보 항쟁의 주역으로 ‘KLA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하심 타치가 필자와의 코소보 현지 인터뷰(2000년 6월)에서 밝힌 대로 “세르비아군 및 경찰과 무장 충돌함으로써 그에 따른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희생을 국제사회의 핫이슈로 만드는 극한처방”이었다. 타치는 “폭력만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했다.

1997년부터 코소보 해방군의 주도 아래 소규모의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하심 타치가 예상했던 대로 세르비아는 무자비하게 코소보 알바니아계의 저항을 진압했다. 1998년 2월 알바니아계 주민 58명이 코소보 프레카제 지역에서 무참히 학살된 사건은 코소보 내전을 본격화한 발화점이었다. 국제사회는 발칸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 시각에서 보면 발칸전쟁은 서유럽 국가들에게 난민 홍수와 새로운 비용 지출을 의미할 뿐이었다.

코소보 위기는 두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1단계는 1998년 2월부터 1999년 3월까지의 코소보 내전 기간, 2단계는 코소보 내전이 다국적 군사 개입을 불러일으킨 끝에 1999년 3월24일부터 6월11일까지 78일 동안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으로 코소보 전쟁이 벌어진 시기다.

1단계에서는 코소보 해방군의 무장투쟁과 이에 대한 세르비아 보안군의 강경대응이 거듭되면서 코소보 사태가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이 기간에 코소보 알바니아인 가운데 약 1000명의 사망자와 40만명의 난민이 생겨났다. 난민들은 세르비아 보안군의 체포와 학살을 피해 보따리를 싸들고 코소보 지역의 외딴 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1998년 10월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특사 리처드 홀부르크가 밀로셰비치와 긴급회담을 가진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르비아 당국은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이들을 코소보 해방군 용의자나 ‘협력자’로 몰아 체포했다.

코소보 전쟁의 2단계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세르비아 보안군과 준군사조직의 조직적인 인종 청소 작업으로 약 1만명이 죽임을 당했고, 보스니아 내전 때처럼 조직적 강간과 고문, 약탈이 자행됐다. 이로 인해 약 86만명의 난민이 이웃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몸을 피했고, 코소보 지역내 난민도 59만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된다.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는 3·24 나토 공습 뒤 더욱 기승을 부렸다. 나토는 공습에만 의존하고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고통을 한때나마 오히려 가중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인종 청소’ 촉발한 나토 공습

코소보 전쟁을 지휘한 당시 나토 사령관 웨슬리 클라크 대장의 회고록 ‘현대전쟁 벌이기(Waging Modern War·2001)’에 따르면 나토 지휘부는 공습을 할 경우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밀로셰비치가 랑부예 협정안(나토군의 코소보 진주를 뼈대로 한 코소보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 판단은 틀렸음이 드러났고, 공습은 무려 78일 동안 이어졌다. 공습 막판에 초조해진 클린턴 미 행정부와 펜타곤 지휘부는 미국의 지상군 파견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를 저울질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나토의 또 하나 잘못된 판단은 “우리가 공습을 하면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무장세력이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을 더이상 억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습은 세르비아 보안군과 민병대의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를 더욱 자극했다.

코소보 전쟁에서는 세르비아 쪽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밀로셰비치는 나토의 폭격으로 2000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나토 사령부는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를 약 500명, 세르비아군 사망자를 5000명으로 추산했다. 세르비아측은 세르비아군 사망자가 576명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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