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컴퓨터보다 정확한’복리계산법 개발한 김병채 옹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입력2003-04-28 1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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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이들도 머리 아파하는 고등수학을 풀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팔순 노인 맥당 김병채 옹. 그는 40여 년 연구 끝에 컴퓨터도 처리하지 못하는 복리계산법을 개발했고 길이와 부피의 한자표기법도 찾아냈다.
    • 지금도 넓이의 한자표기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수학박사’ 김옹의 ‘수’와 함께한 80년 인생사.
    “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방 구들장을 베개 삼아 누워지내야 할 노인이 컴퓨터보다 정확한 복리계산법을 개발하고 길이와 부피의 한자표기법을 찾아냈다. 수학이 좋아 젊은이들도 머리 아파하는 고등수학을 풀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는 81세의 노인 맥당(麥堂) 김병채(金炳采) 옹이 그 주인공.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39번지에 사는 김옹은 전주대 이병훈(60) 교수의 지적대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교수는 자신의 수필 ‘맥당 아저씨’에서 김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작은집 사랑채에 초등학교 선생님 한분(맥당 김병채)이 들어와 사셨다. 그분은 할머니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아저씨라고 부르며 지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와 수수께끼, 수학문제 등을 내주곤 하셨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으로 전봇대가 지나가는 숫자를 세어보고, 전봇대 사이의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여 기차의 속도를 알아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면서 이치에 맞게 풀어주신 분이다. 그런 분이 지금도 변함없이 수학 공부와 문학 탐독, 한문 공부를 계속하고 계신 것을 보고 놀랐다.”

    개나리가 노랗게 펴 봄내음이 물씬 느껴지는 날 그를 만나러 떠났다. 부안읍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털이 부수수한 삽살개와 변종 발발이가 반갑게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이 그리웠던지 낯선 사람이 찾아와도 짖지를 않고 꼬리부터 흔든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김옹이 나와 악수를 청한다. 그런데 필자의 손에 잡힌 김옹의 손이 좀 수상하다. 악수를 끝내고 보니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뭉툭 잘려나갔다.

    -손가락이 상당히 잘려나갔는데 무슨 곡절이 있는가요.



    “암시랑도 안허요. 인공(人共) 시절 우리집(전북 고창)에서 머슴살이하던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가버려 내가 대신 소여물을 썰어댔지요. 그러다가 작두에 손가락이 잘린 것이로고만.”

    김옹의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판소리 가락처럼 리듬이 실린 말씨가 정겹다.

    -당시 김선생님 댁은 지주 세력이었나 보군요.

    “암만, 부르주아라고 봐야제. 우리는 산중 논으로 80마지기를 벌었소. 여그 들녘 논으로 치면 200~300마지기는 되뿔제. 이 고장 울김(울산 김씨)이 다 그렇게 사요.”

    두 노인부부만 살고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층 양옥은 마을을 내려다볼 정도의 언덕에 세워졌다. 안채 앞 뜨락에는 100여 분의 화분이 2열 횡대로 가지런히 놓였는데 모두 밑둥이 잘려나갔다.

    “요것들은 모두 국화 화분들인디. 분갈이를 하고 전지를 해준 것이요. 여름부터 가을까지 국화가 한번 피면 우리 집은 국화향이 가득하제.”

    각종 전자계산기 가득한 서재

    김옹의 독서 공간인 행랑채는 온통 묵은 한서와 족보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앉을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책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책상머리에는 10여 개의 전자계산기가 놓여 있다. 케케묵은 한서와 현대정보가 가득 들어 있는 전자계산기. 아무래도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전자계산기도 처리하지 못하는 복리계산법을 개발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것입니까.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놀라운 복리의 위력’이라는 5페이지짜리 유인물을 검은색 서류가방에서 꺼냈다.

    “내가 40년 전부터 연구해온 것인디, 원금이 1원에 연리 20%로 50년간 복리로 계산하면 9100.48315원으로 불어나는 계산법을 만든 것이요.”

    그러면서 50년 전에 구입한 전자계산기를 비롯해 가지각색의 계산기를 꺼내놓는다. 계산기마다 다른 기능과 계산법을 유인물에 정리해놓았다. 필자에게는 도무지 암호문자 같은 첨단 계산법을 80 노인이 연구해 집적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LOG=공통 대수, SHIFT 10X=공통 진수, LN=제자리 대수, SHIFT EX=제자리 진수, YX(XY)=근(ROOT), SHIFT=제2 기능 지정키…. 이처럼 해설을 붙여놓은 부호들이 30개는 넘어 보였다.

    -이런 계산법들이 실제 생활에 유익하게 쓰이는가요. 아니면 효용성과는 상관없이 선생님 혼자서 무료하니까 이것저것 개발한 결과물인가요.

    “이것으로 전주의 은행 직원들을 상대로 1999년 12월23일부터 27일까지 강의를 했싱개. 신용금고 사람들을 상대로 강의도 했고 말여. 컴퓨터에 안 나오는 계산법을 누구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 것이여.”

    김옹은 ‘재미있는 숫자공부’라는 유인물을 새롭게 꺼내놓았다. 유인물에는 정수와 소수, 연치(年齒)에 관한 내용이 정리돼 있었다. 정수의 경우 일 십 백 천 만 조 경 해 자 양 구 간 정 재 극 항하사 이승기 나유타 등으로 수의 무한대함을 적고 있다. 소수점 역시 분(부) 리 모 사 홀 미 섬 사 진 애 묘 막 모호 준순 수유 순식 탄지 찰나 육덕 허공 청정 등 헤아릴 수 없는 소수점 이하의 용어를 적어놓았다. 연치에 관해서도 1세부터 121세까지의 연령을 구분하고 관련 용어들을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연령에 따라 유아(영아) 유년 소년 학령 청소년 청년 장년 중년 부년 망육 갑년 회갑 망칠 진갑 망팔 망구 내수 망백 백수 기젼 다수 왕수 중갑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 1~20세에 죽으면 조천(조사, 조세), 20~29세는 요절(단절, 요유, 요격), 30~62세까지는 향년, 70 이상은 수(壽)라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넓이, 부피, 무게 등의 한자용어들도 찾아냈다.

    “밀리미터는 쌀변(米)이 들어가고 부피에는 설변(立)이 들어갑니다. 그런디 넓이는 무엇이 들어가는지 도무지 찾들 못허겄소. 그래서 5년 전 전국에 현상공모를 내부렀어. 옥편에서 찾아내는 사람은 500만원을 주겠다 했는디 아직도 안 나와. 그래서 시방 1000만원으로 올려뿌렀소. 한 1년 지났는디 아직도 나오덜 안혀. 답답한 일이란 마시.”

    -도량형의 한자 표기법이나 정수, 소수, 한자풀이가 들인 노동력에 비해 가치가 없는 일은 아닐까요.

    “아니여. 시방 대학 교수들이 내가 만든 도량형 표기를 쓰고 있소.”

    김옹의 저작과 탐구욕구는 퍼내도 차오르는 샘물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이런 저작활동을 한 것일까.

    조부의 저작 읽으며 한문 공부에 심취

    김옹은 1990년 정년 퇴임하면서 조부 경암(敬庵) 김노수(金魯洙,1878~1956) 선생의 저작을 독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경암 선생은 규장각의 사료를 뒤적여 ‘조선사’ 20권을 저술했다. 왕조실록 등 사료를 통해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한 것. 그러나 18, 19, 20권이 일제 검열에 걸려 경암 선생은 경찰서에서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18~20권에는 고종, 순종 연대로 일제의 조선침략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조부님은 규장각을 35년간 출퇴근하면서 조선사를 정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게 썼다고 왜경에 붙들려가 실컷 두들겨 맞아 가지고는 8개월 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는데, 나도 조부님을 간병했지요. 해방이 되자 조부님은 일제가 빼앗아간 18~20권의 내용을 기억을 더듬어 다시 썼는디 그것이 ‘한감강목(韓鑑綱目)’이제. 후학들이 연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전에 후손인 내가 먼저 보아야 한다고 보고 한문공부를 시작한 거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문을 익히긴 했지만 정년퇴임 후 본격적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논어와 사서삼경을 뗐다. 옥편만 40여 권 가지고 있다는 그는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고어사전, 숙어사전을 이 잡듯이 뒤적여 그 글자를 알아냈다.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까 내가 평상시 좋아했던 수치 용어가 많이 나오더랑개. 그것을 취미 삼아 정리해본 것이 수사(셈씨)해휘(數詞解彙)고, 도량형 한자 표기고, 연치 발견이지.”

    -언제부터 숫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햇수로 44년간 근무를 했소. 정년 때까지 교원 19년, 교감 25년 하고 교장으로 퇴직했소. 그란디 나는 수학을 가르칠 때 제일 재미있었어. 소싯적에도 산수공부가 가장 즐거웠고. 교원 시절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13년, 6학년 담임을 3년, 5학년 담임을 3년 했는디 모두 내 반 아이들 산수성적이 다른 반 애들보다 평균 30~40점이 더 높아. 그래서 전북 도교육위원회에서 ‘이상한 징조다’ 해서 시범교육까지 했당개. 교육위원회 장학사들도 강의법이 특별한 것도 아닌디 성적을 보면 신묘하다는 것이여.”

    -정말 신묘하네요. 왜 그런 성적이 나왔을까요.

    “자, 보시오. 1+1=2와 같은 더하기, 빼기의 수식개념은 기계적인 숙지법이고, 암기법이요. 이치를 모르고 매양 외는 것이여. 그런디 나는 그렇게 허들 안허요. 기초개념으로 가르친다는 것이여. 많다 적다, 크다 작다, 높다 낮다, 무겁다 가볍다, 밝다 어둡다, 두껍다 얇다, 멀다 가깝다 요렇게 나가는 것이요. 수학도 그래. 1 2 3 4 5라는 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본 원리를 깨우쳐 준단 말이지. 이럴 때 아그들이 처음에는 다른 반 아그들보담 사정없이 성적이 떨어져부러. 하제만 반년만 가면 다른 반 아그들을 평균 성적 30~40점씩 따돌려부리지.”

    “한문 공부하다 보니 셈법이 보입디다”

    한시와 족보로 가득한 김옹의 행랑채에는 뜻밖에도 각종 현대식 전자계산기가 놓여 있다.

    그는 모든 숫자는 완벽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게 기억해내고 외고 있었다. 그의 교사 임명에서부터 정년까지의 각 학교 근무 연수, 전근 일자를 외고 있었다. 즉 1947년 3월30일 고창 무장 중앙국민학교 부임, 2년간 근무하다 고수국교로 전근, 8개월 근무했으며 1949년 11월6일 부안 상서국민학교 근무… 이런 식이다. 하지만 교사시절에는 무용과 음악을 잘 가르치는 교사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나는 공업학교 출신인데 사범학교 출신보다 더 풍금이나 피아노를 잘 치요. 학예회 때는 저학년이나 고학년 무용 연습을 내가 시켰당개. 피리, 하모니카, 아코디언, 기타, 피아노, 트럼펫 다 잘 불었제. 그래서 부안국민학교에서 내가 창설한 밴드부원이 전국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받기도 했거든. 지금도 전국 최고 밴드부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디, 내가 지휘한 후에도 세 번이나 최고상을 받았다고 하덩만. 그랑프리제.”

    -수리에 밝은 분은 정서적인 측면이 약하다는 말을 듣는데 어떻게 그런 재능까지 겸비하셨네요.

    “아그들을 잡는 밑천은 음악과 무용이 최고여. 내가 그것을 배우려고 개인지도 받음서 월사금깨나 바쳤제. 그런디 나중에는 내가 학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원장보다 더 잘하는 연주자가 되어뿌렀어.”

    -교사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교사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적은 없어. 선생이 내 천직이라 느껴지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은 아무래도 6·25 때라고 할 수 있지. 6·25 전후해서 산사람(빨치산)들이 우리 집을 습격해 부안 처가 쪽으로 이사를 와버렸당개.”

    이때 그는 선친을 공산당에 잃을 뻔했고 자신 역시 총살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다.

    “선친이 우익인 한민당 고수면 당위원장이었소. 좌익이 동네를 접수한 후 선친을 비롯해서 동네 사람 50명 가까이 빨갱이한테 잡혀부렀소. 일부는 밤에 도망을 가버렸는디, 그 분풀이를 도망 안 간 사람들한티 하는 판이여. 선친은 점잖은 분이라 도망갈 생각을 안허고 꼼짝없이 묶여 있는디, 이자들이 죽일라고 하는 것이여, 그래서 나가 공산당 군단위 위원장인 유원종이를 찾아갔어. 나하고 고창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거든. ‘사람을 죽이면 느그덜 투쟁에 도움이 안 된다. 너희들이 궁지에 몰리고 산에서 식량이라도 떨어져봐라. 보급투쟁시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니까 살려달라고 했제. 유원종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만. 그리고 상부하고 뭐라고 연락을 하더니만 모두 풀어주라고 하는 것이여. 내 덕에 선친은 물론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나부렀제. 유원종이는 나하고 사상이 달랐을 뿐 똑똑하고 냉정하면서도 깊은 정이 있는 놈인데, 전쟁이 끝난 후 영영 이별을 하게 됐어. 총살당해 버렸거든. 부인은 자살했고 집구석은 흔적도 없이 쑥대밭이 되어버렸지.”

    또 그는 마을 사람 7명과 함께 총살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빨치산들이 각 마을의 동향을 살피러 경찰 복장으로 위장을 하고 고창군 고수면 송정마을로 들어왔어. 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경찰이 왔다고 태극기를 들고 동구 밖으로 나가 이들을 환영했지. 하지만 그 길로 7명 모두 위장한 빨치산에 체포돼 즉결처분을 받게 됐어. 이때는 죽이고 죽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가볍고 쉬운 일이어서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거든. 머리에 총구를 겨눌 때 온몸이 짜르르 감전이 된 것처럼 전율이 오면서 머리 속이 텅 비는 것을 느꼈지.”

    하지만 이때 외출중이던 면단위 위원장이 돌아왔다고 한다. 천운인지 그 사람은 김병채의 바로 1년 선배이자 그와 유원종 군단위 위원장이 친구 사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7명 모두를 석방했다. 함정을 파서 양민을 희생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 석방 이유였다.

    -김선생님도 친구의 권유로 좌익활동을 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여. 나는 군에서 알아주는 부르주아인디, 공산당을 하고 싶다고 해도 넣어주들 안혀. 어느 면에서 그들도 나를 이용했는지도 모르제만, 나는 이념에 상관없이 인간으로 통하면 서로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

    현재 김옹은 수학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다. 부안군내의 교사 퇴직자 모임인 삼락회 회장과 울산 김씨 부안 김제 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문중 일도 열심히 보시는데, 요즘 세상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보십니까.

    “가치가 있다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혈족간에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고 봐야제. 나는 문중 일을 하면서 매년 400만~500만원씩 지출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자’는 것이 나의 신조요. 현재 울산김씨가 부안에 58가구, 정읍에 100가구, 고창에 350가구 살고 있는디, 나는 이 사람들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하고 싶어.”

    긴 대화를 나누다 보니 80 노인보다 필자가 더 지쳐버렸다. 좁은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고 봉창한 뒷문을 다 열어놓아서 춥기도 했다. 그래서 잠시 마당으로 나와 휴식을 취한 후 안채 서재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젊은 사람이 힘들어 허요? 나는 매일 담배 한 갑 반을 피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집에서 담근 술을 맥주잔으로 한잔씩 마시요. 거기에 소주 한잔만 더 들어가면 대취해버리지만, 그래도 건강은 괜찮허요. 오히려 눈썹이 까맣게 되고, 얼마 전까지 머리털이 많이 빠졌었는디 근년에는 가운데 머리카락이 많이 나서 신묘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김옹의 골상은 장군 스타일이다. 건강이 천부적이란 인상도 든다.

    -식사로 특별히 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채식하는데 젓갈을 무지하게 좋아허요. 갈치 속젓, 뱅어젓, 토하젓 이런 것들이 비위에 맞어. 그란디 밥은 안 들어가. 작년 5월초 이후 오늘까지 밥은 280그릇밖에 안 먹었소.”

    역시 밝은 수리 계산법에 의한 설명이다.

    지난해 5월초 이후부터 4월1일까지라면 약 11개월, 삼시 세끼라면 330 곱하기 3 해서 990그릇이 된다. 말하자면 990그릇이 정상인데 그 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밥을 먹고 있다는 것.

    -80 평생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한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나도 가출을 세 번 했소. 선친과 뜻이 맞지를 않았어. 선친이 조부님한테 대들고, 어머니한테도 안좋게 해서 나 역시 불만이 많았제. 그래서 객지로만 8년을 떠돌다가 일본 가서 공업학교 다니다 완성을 못하고 돌아와부렀어. 따지고 보면 후회 안 되는 일이 없어. 특히 둘째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유독 심약했고 염세적이어서 음독 자살까지 시도했던 그의 둘째아들은 20여년 전 가출해 지금껏 소식이 없다.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는 말도 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풍문도 들었다. 그런 아들의 가출벽도 자신의 가출벽을 닮았는지 모른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주택공사 다니는 우리 큰아들놈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오. 논을 사거나 물건을 살 때도 언제나 동생 몫을 챙기요. 어느 때든지 오면 준다고 동생 몫을 따로 맹글어놔요.”

    한문 배워야 산다

    -노인정은 안 나가십니까.

    “유림회도 다니고 노인학교도 나가고, 강의도 하지만은 나하고 비위가 잘 안 맞어. 비생산적이란 말이여. 화투나 치고, 자기 허물은 20가지나 되는디 남의 허물만 잡고 늘어져. 그런 것이 못마땅혀. 언젠가는 공부 좀 하자고 책 500권을 구비해 노인당에 갖다 놓았더니 벌레가 생긴다고 고물상에 넘긴다고 그래. 그래서 그 길로 문화원에 기증을 해뿔고, 지금은 아예 담을 쌓아부렀어. 늙었더라도 사람은 무엇인가 찾아서 일을 혀야 혀는디, 시비나 할라고 하고, 허물이나 보려고 허니 당최 비위가 안맞어.”

    그러면서 그는 ‘남 괴롭히지 않을 것’ ‘자기가 맡은 일은 반드시 스스로 처리할 것’ ‘남을 배려하는 인성을 기를 것’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가질 것’ 등을 생활 철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어린 아이들에게 한문 공부를 시키는 것. 현재 초등학생인 두 손자에게 직접 회초리를 들며 한자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말 두 외손주가 한문경시대회에 나가서 1등, 3등을 했어. 나가 경시대회 날 얼마나 떨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요. 막내딸이나 사위, 그리고 집사람도 회초리를 든다고 걱정 반 추궁 반을 했는디, 그런 가운데 혹시 성적이 형편없어봐. 내 교육방법이 틀렸다고 비난할 것이고 또 교육자로, 할아버지로서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밤잠이 오들 안혔어. 그란디 장원을 한 것이여. 그때사 안도의 숨을 쉬었당개. 이젠 우리 손주뿐 아니라 많은 어린 아이들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싶어. 그래서 맥가이버 칼을 공부하러 오는 아그들에게 선물로 줄라고 준비하고 있소.”

    -굳이 선물까지 주면서 아이들에게 한문공부를 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암만해도 우리는 중국과 가까이 지내야 할 운명이오. 중국은 압록강하고 붙어버렸싱개 미국보다 오히려 숙명적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요.”

    김옹이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싶다는 것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한문공부도 완성하고 싶다는 의지로 보인다. ‘80 젊은이’라는 말이 그에게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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