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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아버지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을 택하라

  • 글: 안강민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을 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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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바로 전해인 1949년 여름, 지리산 빨치산의 습격으로 거창 군청이 전부 불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이 터졌다. 정부는 빨치산 토벌로 ‘백두산 호랑이’란 명성을 떨쳤던 김모 대령을 급파했는데 김대령은 공비와 접선한 주민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정이 좋지 않던 주민들이 서로 밀고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섞여 들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께서는 김대령을 막아서서 항의했다. 김대령은 권총을 뽑아 협박하였으나, 아버지는 “차라리 군수인 나를 쏘시오” 하며 대항하셨다고 한다. 당시는 군수라고 해도 한 순간에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입을 다물고 계셔도 그 침묵을 향해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사람이 없던 때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던 것이다. 김대령은 그 결연한 의지에서 진실을 읽었는지 결국 상당수 주민들을 풀어주었다. 후일 거창군민들은 그 일에 대한 고마움으로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이를 고사하셨다.

아버지께서는 1959년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인 부산MBC 사장에 취임하여 10년간 재직하시면서 1961년부터 서울MBC, 울산MBC, 진주MBC, 마산MBC 등 민간방송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고 여수MBC를 인수해 회장을 지내셨다. 또한 영남과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로터리 제 366지구를 창설해 초대 총재에 올랐다. 그뿐인가. 숨을 거두신 1987년까지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실행하시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오셨다. 아버지의 정의감은 부산MBC 사장을 할 때 크게 꽃을 피웠다.

아버지는 매우 단호한 분이셨다. 1960년 3월 마산에서 3·15 정·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첫 시위가 일어나고 그와 동시에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시위는 점점 격렬해졌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을 단행했다. 부산MBC 생방송 팀을 마산에 급파해 현장 소식을 생중계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정은 부산MBC 사장직을 걸고 내린 것이었다. 이로써 마산 시위는 일파만파가 되어 전국으로 퍼지고 급기야 4·19 혁명을 발생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정이 많은 로맨티스트였다. 강한 자에게는 강했지만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분이셨다. 한때 아버지를 모략하고 못살게 굴었던 고위 관리 한 분이 퇴임 후 사업을 하다가 망해 끼니가 어려워지자 아버지께서는 쌀 두 가마를 보내 위로하신 일도 있다. 그 일로 어머니와 크게 다투기까지 하면서도….

고집이 복이 되어 돌아오다

사회생활을 해보면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하게 대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인지상정이 되어버렸으니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행적으로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로 가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초스피드 시대인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둔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나 또한 어쩌면 ‘둔한 사람’의 부류에 속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가슴 한 켠이 뿌듯해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나는 평검사 시절 상사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다 혼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74년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는 검사장이 석방해 주라고 하는 피의자를 구속 기소했다가 하루아침에 특별수사부에서 송무 담당 검사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뚝 같은 내 고집이 빚어낸 일이었지만 그 고집이 복이 되어 돌아온 때도 있었다.

7년 가까운 지방검사 생활을 마치고 올라와 서울지검 형사부에 배속되었을 때였다. 억울하게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된 청소년 세 명을 석방하려다 차장검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 그 충돌로 나는 ‘시골 검사’라는 불명예(?)를 벗게 됐고 상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차장검사와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 부장검사는 내 인상을 보고 “당신 시골 구석의 농고 출신인 줄 알았는데 경기고등학교 나왔더구만” 하고 농담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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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강민 변호사·전 서울지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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