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전적지 건립공사를 한 국군 5사단은 또 건립 이유를 이렇게 밝혀 놓았다.
‘세상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가/ 기억하는 이는 점점 세상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를 되묻고 있다.’
아침 햇살이 전적비 그림자를 백마고지 쪽으로 드리웠다. 새들이 일제히 지저귀기 시작한다. 문득 민통선 안 논둑을 바라보니 고라니 두 마리가 무엇에 놀란 듯 재빨리 달리고 있다. 철새들은 이미 북쪽으로 돌아갔을 계절인데 독수리 한 마리가 휘- 원을 그리며 고라니 위를 날고 있다. 이것이 정녕 근 2만 명이 스러져간 50년 전 격전지의 풍경인가
월정역, 철길의 잡초
백마고지 전적지를 나와 민통선 안으로 3번 국도를 타고 들어가면 월정역에 닿는다. 경원선의 간이역이던 이곳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붙어 있다시피 한 최북단 종착역이다. 물론 지금은 안보관광객들에게만 공개될 뿐 역의 기능은 잃었다. 역사 안쪽 입간판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구호와 함께, 서울 부산 목포 평강 원산 함흥 청진 나진까지의 거리가 표시돼 있다.
앞뒤로 끊어진 철길 위에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가 남아 있다. 앞머리는 사라지고 객차부분만 세 덩이쯤 남았는데 온통 깨지고 찢어지고 구멍난 데다 시뻘겋게 녹이 슬었다. 6·25당시 국군의 북진에 밀린 북한군이 도망가면서 버리고 간 것이라니, 50년 넘게 풍찬노숙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말이 객차지 사실상 고철덩어리인 차 안에는 구조물이란 한 점도 없고 자갈과 잡초가 뒤섞여 황량하기 그지없다.
플랫폼과 철길에도 잡초는 무성하다. 만지면 부스러질 듯 삭아버린 기차바퀴와 철길의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내민 잡초들은 쇠를 갉아먹고 자라기라도 한 듯 푸르죽죽하다. 월정역에서 북쪽 가곡역까지 거리는 약 5km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 안에 묻혀 있을 철길이 온통 잡초에 갉아먹혀 사라진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에 풋- 쓴웃음이 나온다.
월정역사 옆에는 김일성고지 등 북한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4층 건물 ‘철의 삼각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 바로 앞으로 길게 뻗은 철책선이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다.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 2km씩 폭 4km의 비무장지대는 휴전 후 50년간 월정역 철길을 갉아먹는 잡초 끊긴 지역이다. 수만 개의 지뢰가 매설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