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사라예보 시내를 내려다보는 트레베비치산 언덕의 파괴된 집. 세르비아계는 이 언덕에서 시내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② 내전으로 파괴된 건물 옆을 지나가는 보스니아 병사. ③ 보스니아 회교도들은 인종청소란 명목으로 집단살해당했다. 페허가 된 거리를 지나는 무슬림 여인.
미국은 지난 1991년 석유가 걸린 걸프지역에 대해 ‘지구촌 평화를 지키는 세계경찰론’을 내세우며 개입했다. 그러나 이렇다 할 이해관계가 없는 보스니아에선 대량학살이 자행되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다 뒤늦게 군사개입을 했다.
보스니아 내전(1992년 4월∼1995년 12월)은 1980년대말 90년대초 동베를린장벽 붕괴, 구소련연방 해체와 맞물린 유고연방의 분해과정에서 일어난 종족간 분쟁이다. 3년 반 동안 끌었던 보스니아 내전은 대량난민, 인종청소(ethnic cleansing),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과 나토군의 군사적 개입, 비정부 민간 구호단체들의 개입, 그리고 언론보도의 집중 등 기존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래서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내전을 ‘새로운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이 인류문명을 얼마나 뒷걸음질시키는가를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보스니아를 가보면 된다. 수도 사라예보는 지난 1984년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곳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폭 50∼100m의 밀야츠카강을 끼고 옛 건물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도시였다. 하지만 내전을 치르면서 사라예보는 철저히 파괴됐다. 락토 믈라디치 장군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의 유고연방군이 건네준 중포화기로 사라예보를 마구 포격했다. 1993년 7월23일에는 16시간에 걸쳐 3777발의 포탄이 사라예보 시내에 떨어졌다(‘뉴욕타임스’ 1993년 7월24일자).
철저히 파괴된 사라예보
사라예보는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트레베비치산을 비롯, 사라예보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들에 포진한 락토 믈라디치군이 마구잡이로 쏘아댄 포격은 사라예보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장에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저격수들은 평화롭게 시가지를 걸어가는 시민들을 향해 마치 사냥이라도 하는 듯 총을 쏘아댔다. 이로인해 약 1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대 전반기 사라예보를 휩쓴 포격으로 파괴된 병원, 호텔, 신문사, 관공서 건물들은 내전이 끝난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구되지 않은 채 흉한 몰골로 서 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넘는 아름다운 보스니아 국립도서관이 파괴되고 그 안에 있던 귀중한 서적들이 불태워진 것도 보스니아 내전 때였다. 사라예보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주변은 내전의 포화를 말해주듯 지금도 보기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라예보를 처음 찾는 방문객들은 ‘이곳이 정말 동계올림픽을 치렀던 도시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시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숙소로 지어진 고층아파트들도 일부는 벽이 허물어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에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다. 400만 인구의 40%가 살던 집을 떠나 고달픈 난민 신세가 됐고 40%의 집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25만∼30만명의 시민이 내전으로 죽었다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1995년 6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때 그는 “내전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내전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