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유행했던 명예퇴직 바람이 경기침체 장기화로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경직된 노동시장, 명퇴는 불가피한 선택
명예퇴직제도는 능력주의와 사회보장제도가 구축된 선진국에서는 보기 드문 제도이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연공서열제와 정년제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명예퇴직제도가 생겨났다. 명예퇴직제는 정년에 도달하기 전에 근로자가 자발적인 의사결정으로 일정액의 보상을 받고 미리 퇴직하는 형태를 말한다. 명예퇴직제는 기업에 따라 희망퇴직제, 조기퇴직제, 선택정년제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명퇴의 역사는 1974년,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명퇴제도는 공기업 부문으로 확산되어 1985년에 대한주택공사가 처음으로 실시한 이래 한국통신, 한전, 한국도로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도입하였다. 이어서 1992년에는 조흥은행을 선두로 한일은행, 상업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 등 금융권이 명퇴를 실시하였다.
이처럼 조용히 진행되던 명퇴가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한 것은 1996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그룹의 한 제조업 계열사가 종업원의 25%를 명퇴라는 이름으로 감원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명퇴 바람이 들불처럼 확산되어,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전방위적으로 실시되었다.
당시 우리 기업들이 명퇴를 도입한 배경으로는 인력관리와 임금관리의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세계화, 정보화시대가 태동하면서 저임금 고성장의 이점이 사라지고 고임금 저성장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뒷받침돼야 했다. 그러나 노조의 반대로 정리해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노동시장은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기업의 임금체계 역시 연공급이 주류였기 때문에 연령과 근속 연수에 따라 인건비가 증가함으로써 임금의 동기유발기능이 상실되었으며 승진적체 현상으로 사기 또한 저하되어 있었다.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건비와 비효율적인 인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하여 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의 일환으로 명퇴제도를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올 하반기에 들어서도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섬에 따라 명퇴 바람이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통신업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맨 먼저 군살빼기에 나선 KT에서는 5500명을 명퇴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엄청난 파문을 던져주었다. 가계대출 부실로 고전하고 있는 은행권에도 명퇴 바람이 불고 있다. 외환, 우리, 국민은행 등에서 대규모 감원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기대만큼 신청자가 많지 않아 고민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두산중공업, 포스코, 대한항공은 이미 명퇴를 실시하였고, 삼성, SK 그룹 등에서도 연말까지 구조조정을 단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경기에 대한 전망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또 한 차례 외환위기 당시에 준하는 감원태풍이 밀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990년대의 명퇴와 최근의 명퇴는 유사점이 많지만 그 차이점도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