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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鄕記

이역 땅에서의 풍찬노숙(風餐露宿) 27년

失鄕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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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끝모를 추락이었다. 모스크바에 돌아온 지 얼마 안 있어 장군이 나를 불렀다. 최종적인 망명 허가가 났으니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범대학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매우 안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슈켄트에는 고려인들이 많으니 적당한 고려인 처자를 골라 빨리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광활한 대륙에서 왜 하필 시골 변두리인 우즈벡인가’ 하고 못내 실망스러웠다. 당초 예정됐던 ‘이즈베스챠’ 신문과의 인터뷰도 취소됐다. 장군은 내게 그곳 KGB와 연락을 할 때는 베르크트(노어로 독수리라는 뜻)라는 이름을 쓰라고 했다. 한국에서 학이었던 나는 소련에 와서 독수리가 되었다.

장군이 나를 위해 여러 방면으로 무진 애를 쓴 사실을 알기에 헤어질 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망명자에게 주는 무국적증과 타슈켄트 KGB 전화번호, 소련 적십자사에서 주는 2000루블을 받고 울적한 심정으로 타슈켄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타슈켄트는 무척 더웠다. 타슈켄트의 무덥고 건조한 기후가 나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나는 시베리아 찬바람 대신 무더운 모래바람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타슈켄트 사범대 총장을 찾아갔더니, 총장이 선생을 소개시켜주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두 달 동안 영어, 노어, 역사(소련과 공산당사) 선생을 붙여준 것이었다. 나로 인해 방학에 차질이 생긴 선생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영어 선생은 유태인 여자였다. 한 달쯤 강습을 받자 세 선생이 이구동성으로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총장에게는 3학년으로 편입시키라고 건의했다. 내가 1학년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결국 2학년으로 타협을 봤다. KGB에서 치란차르라고 불리는 주택단지에 12평쯤 되는 집을 구해줬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내가 속한 2학년 B그룹은 나를 빼고는 모두 여학생들이었다. 김 아뉴타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의 고려인 3세 여학생이 한 명, 우즈벡 원주민 한 명, 우크라이나인 한 명 외에는 모두 러시아 처녀들이었다. 모두 술, 담배를 잘하고 건장하며 명랑하였다. 처음에는 외국인이라고 나를 경계했지만 이내 친해졌다. 그들은 공부에는 대체로 관심이 없어 영어 숙제로 내 것을 베끼다 들통난 적도 있고 공산주의 사상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계속되는 KGB의 감시



고온건조한 기후의 우즈벡은 목화 재배에 최적지였다. 10월 목화 수확기에는 일손이 달려 대학생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목화 따는 데 매달려야 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외된 나는 텅 빈 학교 도서관과 집을 오가며 독서에 몰두하였다. 고려인 모임이 여럿 있는 것을 알았지만 뭘 자랑할 만한 입장도 아닌 나는 일부러 교류를 피했다. 두부와 김치 등 한국 전통 음식을 파는 타슈켄트 교외 ‘꾸이륙 시장’으로 부식을 구하러 갈 때를 빼고는 고려인의 얼굴을 볼 기회가 도통 없었다. 한번은 집에서 밤늦게 책을 보는데 지방 KGB 직원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근처에 있는 친척집에서 놀다 가는 길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잠깐 들렀다는 것이다. 뭔가 부족한 것이 없냐고 해서 나는 조로사전이나 노조사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GB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동무처럼 머리를 싸매가며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충고를 했다. 며칠 뒤 그는 “노조사전은 구할 수 없었다”며 대신 야스기가 지은 노일사전을 들고 왔다. 나는 무척 고마웠지만 내가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보다 열 살 아래 급우인 김 아뉴타는 KGB가 나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하라 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중앙아시아 사막에 유배된 듯한 생활

잠깐 사이에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졸업을 두어 달 남겨둔 어느 날 KGB에서 나를 부르더니 졸업한 뒤 도쿄나 홍콩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일단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북한에 한 번 보내줄 것과 레닌그라드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할 수 있게 해줄 것. 두 번째 조건은 북한행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 내건 것이었다. 나는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북한은 때가 되면 보내줄 것이고 대학원은 타슈켄트면 몰라도 레닌그라드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타지로 여행하려면 원래 일주일 전 민경(경찰)과 KGB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화가 난 나는 아무도 몰래 모스크바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찾았다. 나의 사정을 들은 북한대사관측은 일단 돌아가 있으면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겠다고 했다.

타슈켄트로 돌아와 보니 문 안쪽에 김 아뉴타가 집어넣은 쪽지가 있었다. 졸업 시험이 시작됐는데 어디 가서 뭘 하고 있느냐는 메모였다. 내일까지 안 나오면 학교측에서 KGB에 연락할 것 같은 분위기라고 했다. 일단 나는 졸업 시험을 치렀다. 최우등은 아니지만 우등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북한대사관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하긴 소련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북한에 뭔가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졸업을 했다고 졸업장이 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장학금을 받으며 사범대학을 다닌 나는 의무적으로 2년간 시골학교에서 근무해야 했다. 어느 일요일 나는 내게 배정된 시골학교로 침낭과 가방을 들고 찾아갔다. 학교에서 소사일을 보는 한 노인이 숙소로 안내해줬다. 밤에 잠을 청하는데 숙소 주변에 외양간이 있는지 냄새가 심하고 모기가 극성을 부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침낭 등을 내버려둔 채 타슈켄트로 돌아와 곧장 사범대학 교무주임을 찾아갔다. 나는 다짜고짜 졸업장을 내놓으라고 했다. 교무주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90코페이카를 달라고 했다. 졸업 배지 값이라는 것이었다. 내던지듯 돈을 주고 대신 졸업장을 받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스스로 내 자신을 중앙아시아 사막에 유배시켰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내 삶에 빛을 던진다고 한 일이 오히려 나를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넣은 셈이었다.

나는 냉방장치를 모두 꺼버리고 수인(囚人)처럼 갇혀 지냈다. 패널로 벽을 친 집이어서 한여름 밖의 열기가 집 안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자신에게 화가 난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식음을 전폐하고 가끔 물만 마셨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김 아뉴타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대와 겨루어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며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젊은 날의 혈기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던가 하는 자각이 나를 아프게 했다. 가시덤불은 가시덤불일 뿐이었다. 그 가시덤불의 덫에 걸려 내 날개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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