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北 도주자 1명은 2000년 송이 들고 서울 온 박재경 인민군 대장”

  • 글: 엄상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gangpen@donga.com

    입력2004-01-29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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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62)씨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당시 북한으로 도주한 1명의 무장공비가 북한인민군 대장 박재경 총정치국 부총국장이라는 것. 박 부총국장은 2000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전달했던 인물로 북한 군부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이다.
    • 김씨는 또 “남북정상회담과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의 방북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1·21사건 책임자를 모두 숙청했다고 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며 “1·21사태를 주도했던 책임자들은 지금까지도 북한 군부 실세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684북파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실미도’가 흥행가도를 달리며 보름 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이것은 한국영화사상 최단기간이다. 이 영화를 있게 한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다.

    1968년 1월21일 밤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중무장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남하했다. 이들은 한미 군·경합동수색대와 교전중 대부분 사살됐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씨. 그가 없었다면 북파특수부대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실미도 특수부대원 반란사건’도, 영화도 없었을 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김신조 역을 맡은 연기자는 군인들에게 체포돼 입에 재갈이 물리고, 잠시 후 기자회견장에서 섬뜩한 한마디를 내뱉는다.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

    1968년 사건 당시 신문보도 내용에 따르면 김씨는 1월22일 새벽 3시에 생포되었고 16시간 뒤인, 같은 날 오후 7시부터 30분간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다.

    -성명과 연령, 본적, 주소는.

    “김신조, 27세입니다. 본적은 함북 청진시 어항동이고, 주소는 청진시 청암3구역 청양동 제3반입니다. 생년월일은 1942년 6월2일.”



    -소속과 계급은.

    “조선인민군 제124군부대, 소위입니다.”

    -북한에 부모는 있는가. 그 밖의 가족들은.

    “부모님은 청진시에 계십니다. 아버지는 김중엽, 어머니는 이분옥인데 직조공장 노동자입니다. 경숙 등 3명의 누이동생이 부모님과 같이 삽니다.”

    -자하문에서 경찰과 충돌하기 전까지 군·경 수색대를 본 적은 없는가.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간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초 계획대로 내려왔는데 막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번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를 떼고, 수하간부들을 총살하는 것입니다.”

    -청와대 습격작전 계획은.

    “31명이 5명 내지 7명씩 6개조로 나뉘어 1조에서 5조까지는 청와대의 1층, 2층, 경호실, 비서실, 정문위병소의 격파를 분담하고 나머지 1개조는 습격이 성공했을 때 청와대 수송부의 자동차를 탈취해 문산까지 나가 임진강을 도강하는 것입니다.”

    -성공할 줄 알았는가.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고, 만약의 경우 죽음은 각오했습니다.”

    -지금 심경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좋습니다. 여기 인민들에게는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난 체포되지 않고 투항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김신조씨는 남양주성락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다. 김씨는 영화 ‘실미도’가 흥행하는 것이 무척 못마땅하다. 특히 자신의 이름이 다시금 언론지상에 오르내리면서 일반인의 주목을 받는 것 자체를 무척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함께 남파됐다 사살된 부대원들의 시체 등 악몽 같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까닭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아픔도 겪어야 했다. 김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화 ‘실미도’ 때문에 아들이 파혼당했다”며 “이 영화를 보면 어린 외손자들이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태산”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김씨는 또 “남북 대치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개인이 희생당한 사건이 많지 않았나. 사건 발생 36년이 지난 후 상업적으로 제작된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아픈 과거가 되살아난다면) 행복하게 살아온 가족들에겐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영화내용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군·경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투항한 것이라는 게 김씨의 주장. 그는 1994년 발간한 자전적 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서도 사건 당시 군 당국이 ‘생포’라고 발표한 것에 대해 “체포된 것이 아니고 손을 들고 순순히 투항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김씨는 영화로 인해 받게된 정신적 피해와 왜곡된 내용에 대한 법률적 대응을 위해 변호사에게 자문했지만 현행 국내법상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을 듣고 법적 대응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연말, 한 송년회 모임에 참석한 김씨는 매우 새롭고도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했다. 이날 초청강사로 나선 김씨는 영화 ‘실미도’를 의식한 듯 1·21사건 당시 상황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원래 남파조는 5개조, 76명으로 구성됐었습니다. 1조는 청와대, 2조는 미 대사관, 3조는 육군본부, 4조는 서울교도소, 5조는 서빙고의 간첩수용소를 각각 목표로 삼았었지요. 그런데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실제 남파공작원은 31명으로 축소됐던 거예요. (청와대 습격당시에) 남한 군과 경찰의 방비는 정말 허술하기 짝없었어요. 만일 당초 예정대로 5개조가 모두 내려왔다면 서울 시내는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김씨는 열변을 토하면서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일부 내용은 사실과 상당히 달랐다”며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희생자는 일반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30명 전원이 사살됐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북으로 도주한 공비가 한 명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의 내용은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직간접적인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다. 김씨의 자전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에도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하지만 뒤이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내용은 기자의 귀를 의심케 했다.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그때 도주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 사람이 바로 (몇 해 전)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 땅을 밟은 사람이에요. 참으로 어이없지 않습니까. 청와대를 치러 왔던 사람이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송이버섯까지 들고 버젓이 찾아왔으니…. 나를 좀 만나게 해주지, 왜 그냥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씨의 너스레에 장내에선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참석자 상당수가 뜻밖의 내용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30여년 전 남한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무장공비가 송이버섯을 들고 다시 서울을 왔다갔다니 쉽게 믿기지 않을 만도 했다.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000년 9월11일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던 북한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 박재경 대장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당시 박 부총국장은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용순 당 중앙위 대남담당비서 일행원 중 가장 주목을 받았다.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시기인지라 그의 방문으로 남북한 군 당국자간에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조성태 국방장관의 정책보좌관 김종환 중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고, 조 장관과의 만남을 제의했다. 그러나 박 부총국장은 이를 거절하고 송이버섯만 우리측에 전달한 채 단 6시간 만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김씨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1·21사건 책임자들을 숙청했다고 말한 것으로 압니다. 얼마 전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방북했을 때도 김 위원장은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숙청? 웃기는 이야기예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북한은 목숨을 걸고 작전을 수행하는 충성스런 군인을 쉽게 숙청하지 않아요. 한번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씁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충성하겠어요. 그때 나를 지휘했던 사람들, 지금도 중요한 위치에 있어요. (북한 군부를 이끌어가는) 실력자들이죠.”

    김씨는 강연이 끝난 후 사석에서 자리를 함께한 몇몇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언급한 ‘송이 들고 서울을 방문한 사람’이 박재경 부총국장이라고 확인시켜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 살아서 북으로 도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함께 훈련받고 남파됐던 김씨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북한이라면 몰라도 남한에서는. 과연 김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박재경은 민보성 정찰국 전력

    국정원과 국내 북한관련 사이트의 북한인물정보에 따르면 박 부총국장은 1933년 6월10일 함북 출생으로 김일성 정치대학을 졸업했다. 총정치국 선전부 지도원, 부과장, 과장, 부부장 등을 거치며 선전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한 언론사 북한인물정보 사이트에 기록된 박 부총국장의 프로필이다.

    “군부의 실세로 군내 선전선동사업의 총괄 책임자. 선전부 사업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 ‘음악정치’에 발맞춰 인민군협주단, 인민군공훈합창단 등을 조직하고 중대급 예술조소공연을 활성화시켜 김 위원장에 대한 찬양과 인민군 사기진작, 사상교양사업 등을 활발히 벌여 김 위원장으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이종석 NSC 사무차장)에서 1998년부터 1999년 9월까지 북한 고위인사의 김정일 위원장 현지지도 등 공식행사 수행 횟수를 집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박 부총국장은 현철해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의 80회에 이어 73회로 두 번째로 많다. 1985년 2월 소장으로 진급한 이래 정상적으로 승진을 해오다 1993년 11월 중장, 같은 해 12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 1994년 6월 상장으로 빠르게 진급하면서 그해 9월 부총국장이 됐고, 1997년 2월에 대장이 됐다. 차분한 성격으로 말이 없는 편이며 술은 어느 정도 하나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가족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 부총국장은 1968년, 김씨와 같은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이어야 맞다. 그런데 박 부총국장의 경력사항은 1985년 이후 기록뿐이어서, 정작 중요한 1968년 1·21사건 당시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른 곳의 인물정보도 마찬가지였다.

    1·21 청와대 습격사건 생포자 김신조 전격 증언

    2000년 9월11일 신라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북측 박재경 부총국장이 남측 김하중 외교안보수석에게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하고 있다.

    국내 북한인물자료에 나타난 기록으로만 본다면 박 부총국장이 1·21 사건 당시 도주한 남파무장공비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는 셈이다. 김씨와 박 부총국장의 나이를 비교해보면 가능성은 오히려 희박하다. 김씨는 1942년생이고 박 부총국장은 1933년생으로 두 사람은 아홉 살 차이가 난다.

    사건 당시 남파된 무장공비들은 조장 대위 1명, 부조장 중위 1명, 나머지 29명은 모두 소위였는데, 조장과 부조장이 모두 사살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으로 도주한 공비는 김씨와 같은 소위 계급이라야 한다. 계급이 같은데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 사정에 정통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북한 특수부대의 경우 현역군 복무를 마친 이들 가운데 열성당원을 선발하는데 당성에 따라 입대가 늦어지는 경우가 있어 같은 계급이라도 나이차이가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이와 계급은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이 관계자는 이어 김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다. 1990년대 중반, 귀순한 북한 대외연락부 출신 고위급 탈북자로부터 “박재경 부총국장이 과거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김씨가 쓴 책 내용을 보면 그가 오래 전부터 박 부총국장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책 내용 중 일부다.

    “같이 내려왔던 31명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후에 (북에서) 남으로 온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로는 그는 북에서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영웅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지금쯤은 투스타(인민군 중장)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책 발간 시기(1994년 9월)를 감안하면 김씨가 집필한 시기는 대략 1993년 말 전후로 추정된다. 박 부총국장은 1993년 11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다면 북한 군부 내 1·21사건의 책임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5월11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에게 1·21사건과 관련해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지른 것이고, 그 책임자는 죄를 받았다”고 말했다고 박 의원이 전한 바 있다. 김씨는 이처럼 모두 숙청했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당시 1·21사건을 주도했던 인물은 오진우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허봉학 중앙위 대남사업 총국장, 최광 군 총참모장, 김창봉 민족보위상, 김정태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이재형 124군 부대장(대좌), 우명환 6기지장(중좌)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오진우는 인민군 원수 겸 국방위 제1부위원장으로 김일성 주석 다음인 당 서열 2위까지 올랐다가 1995년 암으로 사망했다. 허봉학, 최광, 김창봉, 김정태 등은 1969년 1∼2월에 ‘군 간부화정책 반대’ ‘유일사상체계 문란’ 등의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1·21사건 때문에 숙청당한 것은 아닌 듯하다. 최광은 사건 직후인 1968년 2월, 김정태는 9월 각각 영웅칭호를 받았다.

    최광은 곧바로 복권돼 인민군 원수까지 진급했다가 1997년 사망했고, 김정태도 1980년대에 복권돼 대흥관리국 부국장을 지내다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봉학과 김창봉의 숙청 이후 활동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치범수용소 수용설, 사망설 등 소문만 무성하다.

    실무책임자였던 이재형 우명환과 관련해서는 1968년 이후 정보가 전혀 없다. 북한인물정보에 등재된 이들 두 사람에 관한 기록은 사실 김신조씨가 전해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은 내부 인물, 특히 군 주요간부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대외비로 취급한다. 국내 정보기관들은 탈북자들을 통해서 그나마 신뢰할 만한 수준의 정보를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을 통해 확인된 정보는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 북한은 신상정보가 외부로 노출됐다 싶으면 이름 자체를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제발 좀 가만히 놔두세요”

    이 같은 전후상황을 고려해 살펴보면 1·21사건 핵심 책임자였던 당시 군부 실세들이 사건 발생 1년 후인 1969년 숙청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1·21사건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북한정권 내부의 파워게임의 결과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1·21사건의 핵심 지도부였던 김정태 정찰국장과 최광 군 총참모장이 영웅칭호를 받은 것을 감안하면 이재형, 우명환 등 실무책임자들이 숙청당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숙청당하지 않고 군부 실세로 남아 있다는 김씨의 주장은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일까.

    기자는 김씨와의 인터뷰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그는 “더 이상 언론에 등장하고 싶지 않다”며 자체를 완강히 거절했다. 기자가 남양주성락교회까지 찾아갔지만 그의 부인으로부터 거절 의사를 전해들어야 했다. “제발 좀 가만히 놔두셨으면 해요. 상처가 너무 커요. 앞으로 언론과는 일절 만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제발 가 주세요.”

    한편 1·21사건 당시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가 몇 명인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군 당국의 공식발표는 ‘생포 1명, 30명 전원사망’. 일부 언론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김씨를 제외한 남파무장공비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1명 생포, 29명 사살, 나머지 한 명의 생사는 지금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정리했다.

    김씨는 1명이 도주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1·21무장공비침투로’를 관광지로 개발한 문산, 연천 등의 지역민들도 1명이 도주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3명이 도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의 한 언론사에서 정리한 보도참고기록이다.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월 북한의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부근에 침입해 한국경찰관과 총격전으로 이어진 무장게릴라사건. 특수부대원 27명이 사살되고 3명이 도주, 1명(김신조)이 체포됐다.”

    생포자 김씨를 제외하고 전원 사망, 1명 도주, 3명 도주 등 혼선을 빚고 있다. 이처럼 사망자 수가 다른 이유는 사망사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물증인 ‘시체’가 일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1사건 당시 김씨를 직접 조사했던 백동림 전 보안사(기무사) 수사과장(당시 방첩부대 수사계장·대위)은 “당시 대대적인 공비소탕작전을 벌였다. 대부분 사살하거나, 동사한 경우 시체라도 확인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까지 3구의 시체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 상 도주에 성공한 사람은 1명뿐이었을 것으로 군 내부에서는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백 전 과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시체 3구는 미확인

    -‘실미도’라는 영화를 봤나.

    “아직 보지 못했다. 그때는 대북공작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한 사건이 많았다.”

    -첫 장면에 김신조씨가 강제로 체포되는 장면이 나온다. 김씨는 스스로 투항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생포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가.

    “포위되니까, ‘나 북한 장교다. 쏘지 말라’면서 투항한 것이다. 해석하기 나름인데,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도주할 곳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강제 체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북한식으로 하면 자결이나 자폭해야 하는데 김신조는 그러지 않았다. 투항해서인지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그래서 수사관들에게 대우를 받았다.”

    -1·21사건 당시 김신조씨를 제외한 30명 전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는데.

    “공비소탕작전을 1주일 이상 벌인 결과 처음에는 전멸된 것으로 알았다. 전방 부대에 뚫린 징후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미 군·경합동수색대가 편성돼 도주로를 완전 차단하고 샅샅이 수색했다. 교전과정에서 세게 저항해 아군측 피해도 있었지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결코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생포된 김신조를 제외한 30명 전원을 소탕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의 수에 대해 논란이 있다. 군 당국의 최종 판단은 몇 명이었나.

    “기관에서도 무척 궁금했었다. 내부적으로 처음에는 3명 정도 살아나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구의 시체가 끝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잘 이해되지 않았다. 빠져나간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시체는 없고….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한 군인의 이름과 그를 영웅시하는 내용을 북한방송을 통해 확인하게 됐다. 그래서 한 사람만 살아갔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우리의 최종판단은 한 명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너무 오랜 일이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기록도 없나.

    “당시 (북한방송 및 정보) 분석반들은 너무 바빴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여서 하나의 사건에만 매달려서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관련 기록도 남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분석반에 접수된 북한 정보 가운데 북한이 김신조 사건 관련자들을 숙청했다는 정보를 들은 바 있는가.

    “기억에 없다.”

    남·북은 지금 정보전쟁중

    1·21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36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분단현실은 그대로지만 서로의 경계는 무척 완화됐다. 총칼을 겨누며 북은 남으로, 남은 북으로 공작원을 보내던 일은 이제 옛일이 됐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남북경제시찰단이 상호 방문하면서 경제협력 방안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는 게 현재의 남과 북이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한 사이에 불신은 남아있고, 보이지 않는 고도의 신경전과 정보전쟁은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들과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됐다가 미수에 그친 채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가 30여년 만에 다시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다가 되돌아갔다는 김씨의 주장에 왠지 모를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남북간의 현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정원이나 기무사 등 국내 대북 정보기관은 1·21사건의 유일한 도주자가 누구인지, 당시 실무책임자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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