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는 불과 두 세 작품으로 평생 영화배우가 되는 이들이 있다. 제임스 딘이 그랬고 이 여자 윤여정이 그렇다. 1971년 ‘화녀’로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지난해 ‘바람난 가족’으로 18년 만에 컴백하기까지 그녀가 주연한 영화는 다섯 손가락을 간신히 헤아린다. 그러나 ‘화녀’를 본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으리라. 섹스를 생각할 때마다 두 손 두 발을 뒤틀고, 음흉한 눈길로 남의 집 침실을 엿보던 가정부 명자를.
순진하면서도 명민한 그녀의 얼굴은 신화가 되기에는 ‘1인치’ 모자랐으나 그 자긍심이나 연기력은 여타 여배우들보다 ‘1인치’ 높은 잣대를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청바지 차림으로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과 어울려 카페 ‘쎄시봉’을 드나들던 당대의 ‘문화 지식인’인 그녀가 부박한 영화판을 등지고 더 부박한 미국 생활을 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후 13년, ‘1960년대의 김희선’에서 사랑과 이국생활 모두에 진력이 나버린 중년부인으로 변해 갑자기 나타난 윤여정은 전설과 현실이 부정교합된 브라운관의 틈바구니에서 기어올라와 다시금 안방을 무혈점령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김수현의 배우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윤여정은 노희경의 배우이기도 하고 인정옥의 배우이기도 하며, 무엇을 해도 윤여정 그 자체인 그런 배우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속사포처럼 한 무더기의 대사를 집어삼키며 팔팔 뛰어도, ‘내가 사는 이유’에서 인생이 아프다고 울부짖는 주인공에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만 피며 위로할 때도, 그녀는 삶의 질긴 열정과 텅 빈 허망함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배우였다. 연기의 밀물과 썰물을 동시에 가르며, ‘여배우의 주름살은 삶이 주는 훈장’이라는 명언을 입증하며, 그 충만한 에너지와 자의식으로, 신경질적이면서도 바늘 끝에 서 있는 듯한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그녀는 대한민국의 중견 탤런트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임을 줄기차게 예증하고 있다.
내가 그녀를 인터뷰 한 날도 그녀는 변함없이 TV 드라마를 찍은 후였다. 30여년 전 긴 생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처녀였던 그녀는 아직도 청바지를 입고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았다.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탤런트
-저는 두 가지 면에서는 윤여정씨를 존경합니다. 첫 번째는 당시로는 드물게 자의식이 있는 여배우상을 보여줬다는 거고, 또 하나는 어쨌든 10년 넘게 일을 안 하실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하고, 또 그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 멋지게 재기한 점.
“다른 배우는 자의식이 없나요 뭐. (웃음) 한국에 돌아올 때는 저도 고민 많이 했어요. 가정적으로도 실패했고, 잘 안 돼서 돌아간다는 것도 우습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연기자로 다시 설 수 없었을 거예요. 그 무렵에는 단역이래도 나오라는 대로 다 나갔어요. 돈이 급했으니까요. ‘애들을 벌어 먹여야 되는데, 깍지 끼고 평생을 살자고 맹세했던 사람한테도 당했는데, 돈 주고 나오라는 곳을 내가 왜 안 가나’ 그런 마음이었어요.
결혼하자마자 연기를 그만뒀던 것도 그래요. 내가 배우가 된 동기가 사실 참 불순했어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거든요. 내가 이화여고를 나왔는데 명문대에 못 들어갔어요. 웃기는 얘기지만 그때는 그러고 나면 동창들 사이에서건 집에서건 낙오자 취급을 받던 때였어요. 후기로 대학을 갔는데 엄마한테 등록금 달라기가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아르바이트 삼아 나가기 시작한 게 텔레비전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얘기 막 해도 되는 건가. (웃음) 그래서 늙는다는 게 참 좋아요. 내가 마흔만 됐어도 이런 얘기 안 했을 텐데 요즘은 뭐든 다 얘기해요.”
-원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사람이 그런 거예요. 우습지만 그때 나는 배우가 된 동기가 불순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원래 배우가 될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우리 때만 해도 여배우가 뜨면 ‘선데이서울’에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하지만 난 그걸 한번도 안 했어요.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못 하겠더라고요. 여기를 빨리 떠나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 수단이 결혼이었어요. 행복하게 결혼했기 때문에 일에는 아무 미련이 없었어요.”
-다른 아르바이트도 많은데 왜 하필 탤런트였어요?
“그 무렵에는 TV 탤런트라는 게 신종 직업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서울대 나온 이순재, 이낙훈 선생님이 탤런트 하는 걸 보며 ‘저걸 하면 조금 덜 창피하지 않을까’했어요. 내 딴에는 많이 고민해서 짜낸 아이디어였다니까요.”
윤여정이 데뷔한 1960년대 후반, 여배우들은 결혼을 선택했고 그들을 대체할 만한 스타는 나오지 않았다. 바야흐로 절대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 이 시기 영화계의 스타 부재는 영화산업의 불황과 검열이라는 시대적 족쇄 탓도 있었지만 영화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TV라는 대중매체도 무시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여배우들 입장에서는 노출에 대한 부담감이 적고 스튜디오라는 편안한 공간에서 연기할 수 있는 TV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여정이 등장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새로운 시기였다. 1930~40년대 전옥 같은 여배우들이 악극단 출신이었다면 1950~ 60년대의 김지미 등은 전 세대와는 달리 정규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윤여정은 TV 탤런트인 동시에 영화배우로도 연기를 펼친 첫 케이스였다. 이전까지 TV에서 출발한 여배우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1970년대 초반에 등장한 배우 중 김영애, 박원숙, 이효춘, 김자옥 등은 이후 모두 TV와 영화를 겸업하거나 TV 탤런트로 안착한 케이스들이다. 그 중에서도 윤여정은 특히 톡 쏘는 말투와 일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여성 스타도 탈신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여준 첫 케이스였다. 돌이켜보면 그녀가 국내 최초의 오란씨 모델이었다는 점도, 산업화의 물결이 TV를 통해 각 가정에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 그녀의 탈신비화된 이미지가 산업적으로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리라.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윤여정씨가 신화적인 미모를 가진 여배우는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건 그렇죠. 그 때문에 내가 김기영 감독하고 얼마나 싸웠는데요. 김 감독님이 여성지에다 ‘윤여정, 모든 사람들한테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인물’이라는 글을 썼어요. 내가 전화를 걸었죠. ‘감독님 전데요’ ‘왜 또?’ ‘여원에다 그런 말을 했다면서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 봐, 사람들이 벌써 미스윤한테 동정을 하잖아. 나를 욕하고. 그러면 미스 윤이 이긴 거야.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니까.’ 그러데요. 그 사람 참 괴짜죠?”
-저는 윤여정씨가 ‘신화적인 미모를 갖지 않은 여배우’의 선두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엔 오히려 지나치게 뛰어난 미모가 방해가 되잖아요. 문소리씨만 해도 빼어난 미모 대신 연기력과 지적인 능력으로 배우의 길을 개척하고 있고요. 남자 배우로는 1970년대 하재영씨와 80년대의 안성기씨, 여배우로는 윤여정씨가 그런 현상의 선봉에 선 게 아니었나 합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듣고 보니 그럴 듯하네요. 그 시절엔 여배우들이 참 예뻤죠. 누가 저보고 그랬대요. ‘한국의 누벨 바그’라고. (웃음) 제가 1966년 대학 1학년 때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수험생 대부분은 잘생겼거나 예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제가 뽑힐 수 있었던 건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었다더군요. 시험장에서 실기를 하는데 제 대사가 무척 빨랐다죠. 연출자들이 앉아서 ‘원래 저렇게 해야 맞는 건데’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지금도 계속해서 TV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를 하고 있는데, 차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흔히 텔레비전 작가들은 영화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배우 쓸 만하면 다 영화 하러 간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라도 영화 한다.’ 영화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여유를 배우한테 주잖아요. TV는 절대 그럴 수 없죠. 그냥 찍어내야 돼요. ‘바람난 가족’ 찍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가 안 오는 거야. 왜 안 오나 하고 봤더니, 자전거 타다 내리는 장면이라 숨차게 하려고 뛰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내가 굉장히 놀랐어요. TV에서는 숨찬 장면이라고 하면 무조건 숨찬 척해야 돼요, 사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인데도. 배우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죠.”
‘3분의 앤’
-영화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1972년 작품인 ‘화녀’로 데뷔했는데, 이 첫 영화로 윤여정씨는 시체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습니다. 참 대단한 일이었죠. 20년 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뭔지도 잘 모르는데 자다가 소식을 들었다’고 그러셨더군요.
당시 신흥 영화제였던 스페인의 시체스 영화제는 지금은 전세계 공포영화제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으로 성장했다. 윤여정의 수상은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이 일천했던 당시의 한국 영화계로서는 커다란 경사이자 화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상패는 제작사인 우진필름 대표였던 정진우 감독이 갖고 있어요. 나한테는 보여주기만 하더라고요.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왜 대표가 갖고 있는지 참 이상하죠? (웃음)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몹시 시끄러웠어요. 신인배우가 대종상 주연상을 받았잖아요. 발칵 뒤집어졌죠. 다음날부터 영화배우협회에서 반환을 하라고 난리가 났어요. 내가 협회에 등록이 안 돼 있다는 거였죠.
청룡상을 받을 때도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시상식이 시민회관에서 열렸는데 김기영 감독님이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잊어먹고 시상식 날 오후에 조영남씨랑 ‘천일의 앤’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누가 손전등을 비추면서 나오라는 거예요. 너무 놀랐죠. 덕분에 조영남씨는 두고두고 ‘천일의 앤이 3분의 앤이 됐다’고 놀렸고요.
나가봤더니 잘 알고 지내던 신문기자였어요. 그가 대뜸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빨리 미장원 가서 머리를 하라느니, 잡지 표지를 찍어야 한다느니 하는 거예요. 속으로 ‘조영남하고 스캔들이 나서 그러나 보다’ 하고 있는데, 내가 영화제 상을 타게 됐다고 귀띔해주더라고요. 그 기자가 청룡상을 주관하는 신문사 소속이었으니 믿을 만 했죠. 당연히 신인상을 받나보다 했어요.
부랴부랴 머리를 하고는 시민회관으로 달려갔는데, 신인상 후보에서 내 이름을 안 부르는 거에요. 혹 조연상인가 기다렸는데 거기도 없어요. ‘큰일났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디 있나’ 쩔쩔 매고 있는데 여우주연상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에요. 거의 기절할 뻔했죠.
나중에 뒷이야기를 듣고 나서 상이라는 게 참 운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도 상에는 뒷말이 많지만 당시에는 심각했어요. 심사 따로, 상 따로였으니까. 그 해에 청룡상 주최신문사 사장이 갑자기 ‘시상자 결정이 너무 썩었다고 들었다. 무조건 심사결과대로 하라’고 그랬다죠, 아마. 덕분에 탤런트 출신 초짜가 주연상을 탈 수 있었구요. 그런 옛이야기가 있답니다.” (웃음)
운명적인 감독, 김기영
- ‘화녀’는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김기영 감독이 먼저 제안했던 거겠죠?
“내가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하는데 어떤 아저씨하고 아주머니가 와서 쳐다봐요. 처음에는 몰랐어.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하루는 그 사람이 날 보자고 그래요. 자기가 김기영 감독이라며 ‘화녀’ 대본을 주더라고요.”
윤여정씨가 말하는 ‘어떤 아주머니’는 김기영 감독의 부인인 김유광씨다. 치과의사였던 그녀는 김 감독의 평생 제작자였고 동반자였다. 덩치 큰 남편에 비해 자그마했던 이 여인을 김 감독은 늘 존경하고 어려워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연은 김기영 감독이 부산 영화제에서 ‘재발견’되고 베를린 영화제 회고전을 앞두고 있던 1998년, 자택이던 혜화동 한옥에서의 화재로 인해 한 날 한 시에 나란히 이승을 떠나는 기연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녀’ 대본을 보니 찍고 있는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외국 영화 같고. 찍고 있던 영화 필름값을 물어주고 ‘화녀’를 하기로 했죠. 그랬더니 김 감독님이 조건이 있대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자기랑 만나야 된대요. 이상한 사람이다 싶었죠.
어쨌든 우리 집에서도 만나고 김 감독 집에서도 만나고 커피숍이나 극장에도 갔어요. 사실 나는 재미없었죠. 중년 남자랑 매일 한 시간씩 뭘 하겠어요. 그래서 일주일쯤 지난 뒤에 윤형주, 이장희 같은 친구들한테 시켰죠. ‘잠시 있다 우리집 문을 두들기고 수영 가자고 해라….’ 다방에서 만날 때도 누구를 미리 오게 해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고 그랬어요. (웃음)
김 감독이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촬영 들어가서야 알았어요. 촬영을 준비하다 보면 막힐 때가 있는데, 그러면 김 감독이 그러는 거예요. ‘그때 나하고 미스 윤하고 어디서 뭐 할 때 그때 웃었던 바로 그 웃음 있잖아, 그렇게 웃어봐.’ ‘화녀’ 첫 부분에 보면 제가 아주 이상하게 웃거든요. 그런 표정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한 달 동안 나를 만나면서 김감독은 연구한 거죠. 내 손짓이며 발짓 같은 거, 다리를 어떻게 하는지, 앉을 때는 어떻게 앉는지 다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그제서야 ‘그냥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좀 특별한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죠.
영화 계약할 때 또 하나 이상한 조건이 있었어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연애를 하면 안 된다는 거였죠. 처음에 그 얘길 듣고는 ‘이 감독 정말 변태구만’ 그랬었는데,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어요. 여배우가 연애를 하면 영화에 집중이 안 돼서 영화를 망친다는 거죠. 그 직전에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는 영화를 찍었는데, 여배우가 연애를 하는 바람에 영화가 망했다는 거예요.”
사디즘, 집착, 카리스마
-그러고 나서 몇 년 만에 재기작으로 고른 영화가 본인 작품이었던 ‘하녀’의 리메이크작인 ‘화녀’였군요. 혹시 오리지널인 ‘하녀’와 비교된다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별로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여배우가 참 매력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이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 김 감독님에게 만날 저 사람 어떻게 됐냐고 물었죠.”
윤여정씨의 회고에 따르면 1969년작 ‘하녀’의 주연배우였던 이은심은 이후 그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이성구 감독과 결혼했다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뒤 브라질로 건너갔다고 한다. 1941년에 태어난 이은심은 일본 나고야 출생으로, 채 열 편도 되지 않는 영화에 출연하고 사라져간 1960년대 초반의 여배우다. 데뷔작이었던 ‘조춘’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의 강렬하고 퇴폐적인 체취는 ‘하녀’의 히로인으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다.
① 1971년작 TV 드라마 ‘장희빈’. ② 1972년작 ‘충녀’. ③ 2003년작 ‘바람난 가족’. (자료제공·한국영상자료원)
-김 감독은 윤여정씨를 왜 뽑았다고 하던가요.
“그 무렵 내가 TV에서 발랄함의 상징이었어요. 요즘으로 치면 김희선쯤 되었다고 할까. 날 왜 뽑았느냐고 물으니까 김 감독님이 낄낄낄 웃으면서 ‘청승맞아서 골랐다’고 그러는 거예요. 고개를 갸웃했죠. 그 시절에 나보고 청승맞다고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김 감독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이혼하고도 한참 지나 드라마 ‘관촌수필’을 하고 있을 때였을 텐데, 우연히 내가 나를 화면에서 보게 됐어요. 근데 참 청승맞더라고요. 정말 청승맞았어요. 그때 퍼뜩 김 감독이 했던 말이 떠오르데요. 그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구나, 20대에게서 청승맞은 구석을 미리 보다니. 나는 나에게 청승맞은 구석이 있다는 걸 진짜 몰랐어요. 봐요, 지금은 전혀 발랄하지 않잖아요. 내가 나를 봐도 청승맞은 데가 있고.”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보다 보면 다분히 가학적이고 인간에 대해 굉장히 냉정한 면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촬영감독 정일성씨 말로는 다른 감독은 카메라를 잘 모르지만 김기영 감독은 잘 알고 있었대요. 기이한 구도를 많이 사용했죠. ‘충녀’를 찍을 때예요. 소품으로 유리로 된 테이블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정일성 감독이 그 밑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 테이블 위에 색색가지 사탕을 뿌려놓고는 나보고 검정팬티를 입고 그 위에 올라가 앉으라는 거예요. 스물 몇 살 먹은 어린 애가 그걸 어떻게 해요. 또 싸움 나는 거죠, 울고 불고. 그런 일이 많았어요. 나보고 늘 성질이 못돼서 망할 거라고 그랬거든요.
하루는 나한테 침대에 누워만 있으면 되는 장면이라고, 오늘은 화낼 것도 없고 신경질 낼 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하얀 시트에 나체로 드러누워 눈을 감으니 ‘레디 고’를 외치더군요. 그러고는 갑자기 천장에서 흰 쥐를 떨어뜨리는 거예요. 무슨 연기가 필요했겠어요? 아마 진짜로 기절했을 거에요. 그러니 영화장면이 사실적일 수밖에 없죠.”
-영화를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었군요.
“말도 마세요. ‘화녀’에 보면 남궁원씨와 내가 뒤엉켜서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와요. 그때 남궁원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못 내려간다고 할 정도였어요. 나도 등에 상처가 엄청나게 났죠. 찍을 때는 또 어떻게 했느냐 하면 광목을 층계 위에서부터 묶어놓고는 카메라맨한테 그 위로 떨어지라고 그랬대요. 카메라맨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자빠지면 머리통이 깨지는데. 그런데 김 감독은 결국 현장에서 그걸 다 하게 만들어요. 그게 카리스마였죠.”
-김기영 감독과의 두 번째 작품인 ‘충녀’는 어땠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을 꼽는다면.
1972년작 ‘충녀’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노이로제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이 교수는 혼외정사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과 함께 수용된다. 어느 날 그는 한 환자로부터 혼외정사때문에 급기야는 정부에게 살해된 어느 골동품 수집가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해 듣게 된다.
술집 호스티스였던 명자(윤여정)는 부인의 경제력에 밀려 무위도식하고 있는 김 사장(남궁원)을 만난다. 명자를 만난 뒤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된 그는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인다. 어느 날 김 사장과 명자는 냉장고 속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하여 키우게 되지만, 명자는 아기가 고양이와 쥐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보게 된다. 어느 날 저녁, 명자는 집 안 냉장고 속에서 아기의 시체를 발견하고 다음날 그것을 교외의 땅 속에 묻어버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밤중 냉장고 속에서 아기의 시체를 발견한 김 사장은 명자의 변명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아내의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에 명자는 면도날로 김 사장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자살을 기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그 뒤 형사들과 신문기자에 휩싸여 현장을 재연하던 명자는 냉장고 속에 있던 아기가 다시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김 사장 부인의 운전수 박씨는 이 모든 일이 그녀를 위해 자신이 계획한 일이었음을 밝히며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거절하는 그녀를 향해 운전수 박씨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움직인다(이 시놉시스는 ‘김기영 시나리오 선집 1’(김기영/집문당/1996) 중 ‘충녀’ 시나리오를 기초로 하여 작성한 것임).
“재연 장면이 끝나면 현실세계인 정신병원에서 남궁원씨는 환자고 나는 간호사예요. 그러니 그 반전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어요. 내가 특이한 웃음을 지으면서 남궁원씨를 바라보는 게 마지막 장면이었을 거에요. 내가 지금 기억하는 건 그래요.”
‘윤여정이 부잣집 딸이라더라’
-‘화녀’하고 ‘충녀’를 비교하면 어떠세요, 분위기라든가 본인 연기라든가.
“연기는 ‘충녀’ 때가 나았겠죠. 김기영 감독하고 의사소통도 잘 됐고. 그런데도 관객들에게는 ‘화녀’가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에요. 그 영화가 더 충격적이었으니까요. 사실 ‘화녀’를 찍으면서 다시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약값이 없는 상황이면 몰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여기저기서 제의가 와도 안 하겠다고 하니까 충무로에 ‘윤여정은 굉장한 부잣집 딸이라더라’는 소문이 났었대요.
그런 상황에서 한진영화사에서 영화 제의가 들어왔어요. ‘여대생 또순이’라는 거였죠. 제작자가 한갑수씨였는데 감독하고 둘이 저희 집까지 쳐들어와서 설득을 하는 거에요. 귀찮은 마음에 내가 출연료 100만원을 불렀어요. 당시 내노라하는 윤정희, 신성일씨가 50만원을 받을 때니까 어마어마한 돈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10만원짜리 수표 열 장을 내놓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에는 자동차가 없어서 못한다고 핑계를 댔죠. 감독이 자기 피아트를 집 앞에 갖다놓더라고요. 무슨 핑계를 대도 안 통하니 결국에는 찍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시작한 영화니까 촬영에 들어가서는 후회가 많았죠. 참 한심하더라고요. 김기영 감독하고 작업한 게 있어서 그랬는지 다른 방식은 눈에 안 차는 거에요. 촬영을 나가면 여배우가 감독을 불러서 뭐라고 해요. 좀 있으면 또 남자주연이 부르죠. 그러면 콘티를 다 바꾸는 건가 봐요. 처음에는 나는 이미 돈 받았으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더빙할 때 보니까 엔딩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원래 시나리오에는 분명 내가 엔딩이었는데 다른 배우로 바뀌었던 거죠.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뭐 영화도 아니구나 싶었죠. 김기영 감독은 누가 와서 콘티를 보자고 하면 그래도 ‘볼 것 없어’ 그러고 치워버리거든요. 그래서 더빙작업에는 참여를 안 하겠다고 했죠. ‘충녀’도 아마 김기영 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안 했을 거예요.
김 감독님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다음에 참 많이 죄송했어요. 내가 이혼하고 나서도 전화를 많이 주셨거든요. 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하면 좋은데 김 감독님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왜 그렇게 됐어? 어떻게 좀 잘 참아보지’ 그럴 텐데, 김 감독님은 딱 전화해서는 대뜸 ‘손해야, 손해. 그놈을 왜 놔줘, 그걸. 도장을 찍어주지 말지’ 그러는 거예요. 옳건 그르건 그 상황에서는 그런 말이 너무 싫잖아요. 어쩌다가 연극이라도 할라치면 꼭 객석에 와 앉아 있어요. 끝나고 나면 또 골지르는 말만 하는 거에요. ‘좀 잘하지 그걸 연기라고 했어?’ 몇 년에 한번씩 꼭 그러니까 나도 신경질이 나잖아요.”
‘한 넝쿨에 호박’
-윤여정씨는 영화도 영화지만 TV 드라마에서 더 눈부신 활약을 했죠. 그 가운데 가장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 ‘장희빈’이었고요. 이전 드라마의 발랄한 이미지와는 달리 표독스런 면이 강하게 부각된 드라마였습니다.
“머리를 위로 빗어 넘겨서 나온 이마가 강조되니까 이미지가 굉장했었죠. 그야말로 공전의 히트였어요. 아마 MBC가 제대로 시청률을 올린 첫 프로였을 걸요. 당시만 해도 TBC의 위세가 참 대단했어요. MBC는 후발업체였고. 그때 제가 동아제약의 오란씨 첫 모델이었는데 1년 하다 잘렸잖아요. 사람들이 포스터만 보면 ‘나쁜 X’이라며 눈을 찔러놨거든요.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지금 생각해보면 잠깐이었어요. 어쩌다가 이름만 반짝 난 거였지. 이혼하고 돌아와서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연기가 참 안 되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연기를 못하나 곰곰이 따져보니까 결혼 전에 연기를 워낙 짧게 했어요. 1967년에 데뷔해서 1972년에 미국에 갔으니 5년밖에 안 한 거잖아요. 당연히 고생을 할 수밖에요. 배우들, 이름 나는 거 하나도 좋아할 거 없어요. 그 허망한 이름값을 꼭 해야 하거든요. 이름은 높은데 연기가 안 되면 본인만 괴로운 거예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했던 결혼이 깨진 뒤에는 꽤 힘든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혼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나요?
“솔직히 나는 재혼한 사람은 참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흔히들 결혼상대는 꼭 자기랑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잖아요.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다시 남자를 골라도 비슷한 남자를 만날 것 같더라고요. ‘한 넝쿨에 호박’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외모는 어떨지 몰라도 두 번째 만나는 남자도 속은 같은 남자겠거니 싶었죠. 나는 자신 없어요. 또 만나면 큰일이지. 한번은 누가 묻길래 내가 그랬어요. ‘내 안목이 조영남을 고른 안목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이 안목을 믿고 재혼상대를 고르겠소’ 하고요.”
-두 분이 처음 결혼할 때는 조영남씨의 무엇에 반했던 거예요? 자유분방함이나 재주 많음에 끌렸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나 보죠?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나도 가만히 생각을 해봤죠. 우선 내가 정말 노래를 못해요. 완전히 음치라서 드라마 작가들에게 ‘다른 건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겠지만 노래하는 건 쓰지 마세요’ 하고 부탁하곤 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노래 잘하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요.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천부적인 게 없어서 늘 노력으로 버티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끼가 많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어요,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그 사람은 굉장히 재주가 많았죠.”
“이혼 없었으면 연기도 없었다”
-제가 느끼기에는 연애나 신혼시절 두 분이 열렬히 사랑했을 것 같아요.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은 절보고 참 독하고 용감한 여자라고 그랬어요. 미국에서 우리 이웃이었던 분들은 슬퍼하기도 해요.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떻게 헤어질 수가 있느냐는 거죠. 솔직히 나는 거의 기억을 못해요. 결혼생활은 아예 잊어버리자고 작정을 했었거든요. 계속 그렇게 다짐을 하면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정말 까맣게 잊어버려요. 남들이 ‘그때 그랬지’ 그러면 ‘내가 그랬어?’ 하고 되물을 정도니까요. 딴 사람 얘기 같아요.
미국에 있을 때 나랑 친하게 지냈던 분 얘기로는 내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살았대요. 아기 잘 때 동화책 읽어주고, 놀이터에 나가서 데리고 놀고, 커튼을 직접 만들어 달아놓고, 수건에 수도 놓고. 심지어… 조영남씨가 두부를 좋아하거든요. 우리가 미국에서 살 때는 두부를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내가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는 거 아니에요, 별을 따다 바치는 심정으로.
그랬는데, 이제는 내가 굉장히 메마른 사람이 됐어요. 아마 한번 그런 삶을 끝내고 나니까 다시는 안 하기로 작정했나 봐요. 지난번에 노희경 작가가 한 영화잡지에 나에 대해 쓴 글을 읽다가 ‘젊은 나이에 이혼…’ 어쩌고 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중에 희경씨한테 ‘너 내가 젊은 나이에 이혼한 줄 어떻게 알았니?’ 하고 물었더니 ‘뻔하죠’ 그러는 거예요. ‘내 기사를 보다 내가 울다니 나도 참 늙었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한테 그랬어요. ‘되새겨보니 내가 이혼을 서른 몇 살에 했더구만, 그러면 중매라도 하지 어떻게 그렇게 그냥 놔두냐? 이 나쁜 것들아!’ (웃음)
이혼했을 때 나는 내가 쉰 살쯤은 된 줄 알았어요. 모든 게 끝났다, 미래를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정통으로 느낀 슬픔이었거든요. 한번은 캐스팅 중에 ‘다른 사람이 하면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안 나타나는데, 윤여정이가 하면 그게 살아난다’는 말을 들었어요. 물론 칭찬이었죠. 그렇지만 나는 ‘내가 정말 가슴 찢어지게 살았나 보다’ 싶더라고요.
어려서 영화를 할 때는 공포, 슬픔, 눈물, 그런 연기를 잘 못했어요. 최무룡 선생님한테 ‘선생님은 어떻게 우세요?’ 하고 물었을 정도니까요. 감정의 오르내림을 타는 그런 연기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이혼을 하고 나자 그런 연기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동료들한테 칭찬도 많이 들었죠. 생각해보면 내가 조영남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인생을 끝냈기 때문에 배우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나 보다 싶더라고요.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잘 못 우는 배우였을 거예요. 그러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가 좀 안됐다 싶기도 하고….”
뒤늦은 여우조연상
-이혼 후에는 조영남씨와 말도 안 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참 못난 사람이죠. 정말 성격차이로 이혼을 했다면 또 모르지만 우리처럼 이혼했을 때는 그게 잘 안 돼요. 된다면 거짓말이에요. 솔직히 아직까지도 용서가 잘 안 돼요. 물론 밖에 나가서 떠들고 다니지는 않아요. 제 얼굴에 침 뱉기니까요. 이혼한 사람들끼리 서로 치고 받으면 그게 또 무슨 꼴이겠어요. 어른스럽다는 게 다른 게 아니잖아요, 참는 사람이 어른이지.
-조영남씨 인터뷰를 보니 윤여정씨에게 굉장히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누구처럼 회고록 쓰지 않아 고맙다고요.
“고마워해야 될걸요. (웃음) 소설가 최인호씨가 나나 그 사람과 모두 친해요. 그런데 최인호씨가 나를 만나면 ‘××네 출판사가 요즘 책이 안 나가서 어렵대. 네가 좀 도와줘라’하고 농담을 해요. 내가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나요. 자기가 그 동안의 이야기 전부 대필해서 출판사도 살리고 돈도 벌고 그러겠다는 거예요. (웃음) 지금은 줄었지만 예전에는 회고록 쓰자는 전화가 많았어요. 처음에는 화를 내고 그랬는데 김수현씨가 옆에서 보더니 ‘그걸 왜 그렇게 힘들게 거절하니? 3억만 불러, 그러면 다시는 전화 안 올 거다’ 그러더라고요. 3억은 너무하다 싶어 2억을 불렀더니 정말 다시는 전화가 안 오던데요.”
-미국에 있을 때 찍은 ‘코메리칸의 낮과 밤’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그 영화를 찍게 된 과정도 참 재미있어요. 원래 제작사에서는 윤정희씨를 염두에 두고 섭외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그 무렵에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북 미수사건’이 터졌어요. 윤정희씨가 미국에 나오기 어려워졌죠. 그래서 급히 저를 찾아온 거예요.
미국 이민의 비애를 다룬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별로 좋아하는 출연작은 아니에요. 완성도가 없는 작품이었어요. 대본이고 촬영이고 전부 다. 비극을 만들자니 여주인공을 죽여야 하잖아요.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으로 설정은 했는데, 병원에 알아보니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맞는 피가 없어서 죽는 것으로 설정을 바꾸었죠. 근데 사실 그것도 미국 현실과는 많이 다르거든요. 억지로 꿰어 맞추느라 감독하고 나하고 무척 고생했던 생각이 나네요.”
-‘바람난 가족’ 얘기를 해볼까요. 오랜만에 출연해 여우조연상도 타고, 아주 행복한 경험이셨을 것 같은데요.
“조연상에 대해 얘기하자면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임상수 감독이 술 먹고 나서 그러더라고요, 조연상은 김인문 씨가 타야 옳았다고. 정직한 얘기예요. 나도 맞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왜 윤여정이 탔느냐, 내가 기가 세기 때문에 김인문씨가 밀린 거다’ 내가 술 먹으면서 다 얘기했어요.”
대담한 성적담론과 사회에 대한 질타와 도발로 유명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시어머니부터 며느리까지 두루 바람이 난 어느 가족의 집단 불륜기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람난 가족’은 바람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페미니즘, 일부일처제, 불륜과 간통의 질곡에 기대어, 임상수는 자신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성이 아닌 죽음과 죄의식, 특히 ‘몸’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바람난 가족’의 주인공 모두는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마다 손을 베이고 몸을 다치고 피를 토하고 마사지를 하고 요가를 하며 춤을 추고 등산을 한다. 감독은 이야기한다. 인간은 몸을 위해 살고, 몸이 마음을 배신하고, 몸이 늙으면 죽어버린다고.
‘자유부인’ 이래 불륜을 다룬 영화들은 그 시대의 여성관이나 가족관 등 여러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해왔지만, ‘바람난 가족’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누가 보아도 급진적이다. 가족의 해체는 전적으로 호정과 시어머니 두 안주인의 손에 달려 있고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을 막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윤여정이 맡은 인물은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도 ‘내 몸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급진적인 시어머니로, 1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윤여정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자의식이 넘치는 특유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윤여정의 바람난 시어머니상은 죽어가는 김인문, 즉 나쁜 피를 쏟아내는 남성들의 과거와 대비되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새로운 ‘할머니’상의 등장이기도 하다.
“그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사실은 ‘조용한 가족’ 출연제의가 먼저 들어왔죠. 내가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김지운 감독이 미용실까지 쫓아왔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리 대본을 읽어보려고 해도 도무지 읽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끝내 마다했죠. 그때 참 많이 미안했어요,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피할 정도로. 그렇게 영화랑은 멀어지나 생각했죠.
한참이 지나서 이번에는 임상수 감독이 ‘바람난 가족’을 들고 왔어요. ‘내가 첫 번째요?’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래요. 원래는 정혜선씨를 생각했다더군요. 내가 솔직한 것에는 약하잖아요. 감독하고 제작사인 명필름 사람들이 열심히 설득하는 걸 보고 ‘김지운 감독한테처럼 무식한 짓은 안 하리라’ 결심을 하고 대본을 읽었죠. ‘조용한 가족’보다는 쉬웠지만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죠. ‘고딩’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내가 임상수 감독에게 물었어요. ‘거기서 애는 왜 느닷없이 죽어요? 참 기분 나쁘대요’ 했더니만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다 느닷없이 죽잖아요?’ 이 친구 바보는 아니구나 싶었죠. 다시 ‘좋소, 그러면 섹스에는 왜 이렇게 매달려요?’ 그랬더니 ‘제가 잘 못하니까 그렇죠’ 그러더라고. (웃음)
처음에는 역할이나 비중이 큰 것도 아니고 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었죠. 촬영하면서 몇 번이고 하기를 잘했다고 되뇌었어요. 그리고 ‘내가 아직도 정말 구시대적인 생각을 하고 사는구나, 역할비중이나 따졌다니’ 그런 생각도 했어요.
지금은 ‘바람난 가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 기회를 놓쳤으면 내가 알고 있던 1970년대 영화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말았을 거예요. 영화가 좋아서 미친 듯이 작업을 하는 똘똘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겠죠. 그 사람들을 보고 ‘얘네들은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참 좋은 경험이었어요.”
-TV와 영화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자면 뭘까요.
“솔직히 얼마나 박수를 받았느냐보다는 얼마나 고생했는가에 따라서 기억에 남는 강도가 달라져요. 내 경우에는 ‘관촌수필’이 참 기억에 남아요. 워낙 이문구씨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팔자에 없는 사투리를 하느라 고생 많이 했거든요. 영어 못하는 사람이 한글로 적어서 외우듯 그렇게 연습했어요. ‘사랑이 뭐길래’처럼 박수를 많이 받은 작품은 그만큼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별 느낌이 없어요. 누릴 만큼 누렸으니까. 하지만 ‘관촌수필’은 본 사람도 얼마 없거든요. 그러니 그 작품을 봤다는 사람만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는 거예요.”
-흔히들 윤여정씨를 ‘김수현표 드라마를 가장 잘 소화해내는 배우’라고 합니다. 사실 김수현씨 드라마가 연기자들 사이에서는 힘들기로 악명 높잖아요. ‘완전한 사랑’에 출연했던 김희애씨도 소감을 물었더니 ‘대사가 너무 많아 고생했다’고만 하더군요.
“너무 많아요.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할 여지 없이 오로지 대본하고 연기만 생각하며 가야 돼요. 조금만 덜 썼으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한번은 (김)혜자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김수현씨 드라마 잘 쓰고 참 재미있는데, 배우를 너무 가둬놓기 때문에 그 분량에 치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조금만 여유를 주면….’ 그 말을 김수현씨에게 했더니 ‘나는 그런 꼴 제일 보기 싫어해. 배우가 노는 모습은 절대 못 봐’ 하고 딱 자르시더군요.”
-김수현씨 대본을 보면 지문도 아주 세세하게 쓰여있죠.
“그러니까 연출가들도 많이 힘들죠. 은퇴한 드라마 PD 한 분이 예전에 김수현씨랑 작업을 하다가 이런 말 한 적이 있었어요. ‘아니, 감독이 무슨 노예야? 내가 노예는 아니잖아?’”
-김수현씨 드라마는 빨랫줄 같으면서도 총알 같은 면이 있어요.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내적인 상처가 가족관계에 투사되면서 굉장히 가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교훈을 남기려고 하고요. 또 김수현씨 특유의 오만함, 당당함이 배어나죠. 그런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가 윤여정씨인 것 같아요.
“솔직히 김수현씨 드라마는 형벌이에요. 엄청나게 많은 분량을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돼요. 내가 제일 괴로웠던 게 ‘목욕탕집 남자들’ 하면서 시 외울 때였어요. 시인이라는 시인은 다 죽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자기네 마음대로 문법 같은 건 무시하고 떠오르는 시상에 맞춰서 쓴 건데, 나는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하면서 대사 중간중간에 다 해야 되잖아요.
반찬을 놓아가며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 반찬을 놓는 시간이랑 대사가 끝나는 시간이 딱 맞아야 돼요. 김수현씨 드라마를 하면서 배우들이 낭패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냥 앉아서 대사를 외우기 때문이에요. 일단 외우기는 했지만 일어서서 모션을 같이 취하면 달라지거든요. 연습하지 않으면 절대로 함께 안 돼요. 저는 일어나서 동작을 하며 같이 외워요. 다림질이면 다림질, 빨래 널기면 빨래 널기…. 다른 배우들은 농담 삼아 ‘상당히 열심히 하는데 생색은 안 나는구먼’ 그러죠.
다음날 김수현씨 드라마 녹화가 있으면 나는 잠을 못 자요. 대본을 1페이지부터 달달 외워서 그 흐름을 꿰뚫고 있는지 되뇌는 거예요. 한군데라도 막힌 곳이 있으면 또 봐야지 그냥은 못 자요. 밤새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니 김수현씨가 저에게 ‘네 얼굴이 곱게 나오겠냐, 가뜩이나 피부도 좋지 않은데’ 그러죠. 그럴 수밖에요. 그렇게 안 하면 내가 여유를 가질 수가 없거든요.
대신 좋은 건 이제는 그게 습관이 돼서 다른 작가 드라마를 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사실 다른 건 훨씬 여유롭거든요. 그렇다고 누구 껀 열심히 하고 누구 껀 설렁설렁하자니 죄책감이 들더라고요. 채찍이죠. 솔직히 김수현씨 작품은 내가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채찍이었던 것 같아요.”
“여정씨도 대사 외워?”
-그럼 윤여정씨는 스스로를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세요?
“많이 노력하는 편이죠. 예전에는 그걸 창피하다고 생각했어요. 타고난 게 없으니 노력하는 것 아니냐 하고요. 그런데 캐서린 햅번이 쓴 ‘미인’이라는 자서전을 읽으면서 생각을 바꿨어요. 그 여자가 스펜서 트레이시한테 반한 게 그 사람은 타고난 배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래요. 반면 자기는 늘 노력하고 연습해야 하는 배우고. 그렇지만 여러 가지 스타일의 배우가 필요하지, 꼭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건 다른 배우들이나 동료들은 제가 타고난 배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나한테 와서는 ‘여정씨도 대사 외워? 그냥 한번 쓱 보고는 줄줄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어요. 그건 절대 아닌데.
다른 게 있다면, 나는 남들하고 똑같은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드라마에서는 고정된 유형의 연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전화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갑자기 끊으면 꼭 수화기를 한번 쳐다보는 식이죠.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게 안 하잖아요. ‘끊었구나’ 생각하고 그냥 돌아서버리고 말죠. 그런 고정화된 유형이 젊은 연기자들에게도 전달이 돼서 또 그대로 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부분이 있으면 속으로 한참 다짐을 하죠. ‘절대로 보지 말아야지, 그냥 탁 끊어야지’ 하고. 그런데 촬영현장에서 마음먹은 대로 하면 PD가 그러는 거에요. ‘전화기를 한번 봐주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럴 땐 굉장히 속상해요. 나는 애써서 다르게 하려고 노력한 건데, 보는 사람은 그냥 성의 없이 연기를 하는 것으로 보는 거니까요. 대신 가끔 그런 걸 알아보는 젊은 감독이 있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죠, 그 디테일을 알아준다는 게. 내가 그렇게 예민해요.
동료들이 자주 그 예민함을 지적하곤 하거든요. 좀 과장하자면 핍박을 받았다고 할까. (웃음) ‘윤여정이는 너무 예민해서 살도 안 찐다더라’ 등등. 처음에는 내가 인격적으로 부족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고 굉장히 미안해했어요. 거기에다 이혼하고 나서 열등의식이 덧붙여졌죠. 내가 잘못 살았나 보다, 이제부터 모든 걸 고쳐야겠다, 성격도 모난 데가 많다, 그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다구요.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마음을 바꿨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가 늙어 죽는 게 낫겠다고. 예민하지 않으면 어떻게 배우를 하겠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예’자가 들어간 일을 하려고 하냐고요. 그게 싫으면 다른 일을 하면 돼요. 아마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공도 예민해야 할걸요. 그래서 이제 안 고치기로 했어요. 이젠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싫다’고 대놓고 얘기하죠.”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게, 젊은 시절의 윤여정씨 얼굴은 귀엽고 순진한 면이 드러나거든요. 꿈꾸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명민함 같은 게 담겨 있었는데, 많은 풍상을 거치면서 지금은 약간 메마른 얼굴로 변했어요.
“사실이에요. 많이 드라이해졌어요. 나도 그걸 혼자서 서글퍼하곤 해요.”
“그것이 내 업이라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윤여정씨는 지금까지 많은 동료 연기자들과 여성적인 연대를 이루며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렇다면 무슨 힘으로 이제까지 살아오셨어요?
“애들을 키워야 된다, 애들을 공부시켜야 된다는 다급함이었죠. 그게 나한테 큰 원동력이었어요.”
-아이들 둘이 있으면 항상 한 애는 엄마를 닮고 한 애는 아빠를 닮잖아요. 자식에게서 헤어진 남편의 모습을 본다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큰애는 나하고 똑같아요, 작은애는 아버지하고 똑같고. 내 업이려니 생각하죠. 큰아이는 공부를 굉장히 잘 했어요. 나도 여유로웠고. 다른 학부형들이 애들 성적 걱정을 하면 ‘신경쓰지 마세요. 그거 하루 다그친다고 되는 거 아니니까 그냥 내버려두세요’ 그랬거든요. 그런데 작은아이는 공부를 진짜 안 하더라고. 그러니 이제는 내가 급해져서 다른 집에 물어보게 되는 거야, ‘걔는 몇 점 받았수?’ 하면서. (웃음) 그러고 나니까 남의 애 흉을 못 보겠더라고요.
이제는 그걸 즐기기로 했어요. 내가 싫어했고 미워했고 그래서 결국은 끝낼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아이가 다 갖고 있는데, 내 애니까 그게 모두 사랑스럽게 보이잖아요. 그냥 ‘이게 내가 받는 죄구나, 그 사람을 자식 속에서 또 이렇게 보는 게 내 업이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 애를 고치려고 애쓰지도 않아요. 그저 그 자체를 즐기는 거죠.”
그렇게 인터뷰가 끝났다. 작별인사를 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은 보통 두 말 없이 꽉 잡지만, 그녀는 다르다. 살짝 잡는다. 강단 있는 목소리와 달리 이 여자의 손은 유달리 작고 부드러웠다. 문득 그녀가 단단한 껍질 뒤에 부드러운 속살을 숨긴 석류 같은 여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칼칼한 쇳소리 사이에 섞인 그녀의 손은, 시어머니의 깐깐함이 아니라 소녀의 체취가 담긴 현명함과 상냥함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영화잡지를 검색해보니 ‘바람난 가족’으로 컴백하는 그녀에 대한 특집이 여기저기 가득하다. 천상천하 이 땅에 윤여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