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러시아 해군에 항복은 없다. 한방울 피가 남을 때까지 싸우자!”

  • 글: 박종효 전 국립모스크바대 교수·한러관계사 chonghyopark@hanmail.net

    입력2004-01-29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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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8월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새로 취역하는 대잠수함 초계함에 ‘카레이츠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인’또는 ‘고려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이름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초기 인천 인근 서해상에서 일본 해군함정들과 격전을 벌이다 자폭한 함정의 이름을 승계한 것이다. 한 세기 동알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이 전투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박종효 전 국립 모스크바대 교수가 그 연구결과를 정리해 ‘신동아’에 보내왔다. 카레이츠함과 바략함의 드라마틱한 전투와 그것이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꼼꼼히 분석한 이 글은, 한 세기 전 대한제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강대국들의 치열한 외교전과 우리 영해를 앞마당 삼았던 열강 해군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이다(편집자).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제물포해전에서 최후를 맞은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오른쪽 위).

    2004년 2월8일이면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해전’ 100주년이 된다. 그 한 세기 동안 진행된 한국 근현대사에 러일전쟁이 남긴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단순히 역사 속의 한 사건, 우리와는 별 상관 없는 외세끼리의 충돌로 생각해온 이 전쟁이 이후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와 남북분단의 과정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점에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제물포해전을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극적인 재미뿐 아니라 역사적 의미 또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본격적인 제물포해전 이야기에 앞서 러일전쟁의 의미부터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 이후 러시아는 아관파천 사건과 군사고문단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한제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일본의 침략정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이 잠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개입 덕분이지만, 대신 러일간에는 한층 갈등이 깊어졌다. 게다가 청일전쟁(1894~95)의 결과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던 일본은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러·프·독)에 의해 이를 불가피하게 반환해야 했다. 이후 러시아가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조차하고 태평양 진출을 위한 해군기지로 요새화하는 한편, 동청철도(東淸鐵道·하얼빈과 다롄을 잇는 철도노선) 부설을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 나가자 러시아와 일본은 새로운 대결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일본은 러시아의 대한제국 개입과 만주 진출에 불만을 품고 임진왜란의 숙원을 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영일동맹(1902)을 체결해 전쟁준비를 하는가 하면 미국과도 전비차관 약속을 받는다. 한반도 문제와 만주 개방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던 일본은 결국 압록강 용암포 벌목사건 등을 트집잡아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위태롭게 유지해오던 독립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제정러시아에서는 전제정치에 대한 염증과 패전의 실의가 가중되어 공산혁명의 대정변이 일어난다. 시간이 흘러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된 후 패전국 일본 대신 전승국인 미국과 제정러시아의 후신인 소련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해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8선 분할안’의 기원



    재미있는 것은 이 남북분단 아이디어도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다.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에 따르면, 1896년 일본의 야마가다 원수는 러시아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사절로 참석해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로스토프스키에게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해 러일 영향권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한 것이 그 최초의 기원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일본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이때부터 분할문제는 양국간에 잠정적인 논의대상이었다.

    이렇듯 미국이 2차대전 종전 직전에 작성해 구소련에 제의한 ‘38선 분할안’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단순한 우연이거나 실무자들의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이미 일본으로부터 1945년 8월13일 무조건 항복을 통보받고 이틀 후인 8월15일 스탈린에게 38선 분할점령안에 서명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38선 이남과 이북을 군사 작전지역으로 삼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진행하기로 규정한 최초의 문서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 일반명령 1호’는 제정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38선 분할논의’라는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마련된 것이다.

    이 무렵 미국은 이미 8월13일부터 청진과 원산 등에 상륙작전을 개시해 남진하고 있는 소련군을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맥아더 일반명령 1호’를 작성해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미국 육군성 등 3성 조정위원회에 배속되어 있던 극동지역 전문가들은 앞에서 설명한 러일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제정 러시아 때 일본이 제안해 논의한 바 있어 스탈린이 쉽게 수긍할 것으로 예상되는 38선 분할 아이디어를 상기하고, 북한지역을 넘겨주는 대신 수도 서울과 인천항이 포함되어 있는 남한을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러일전쟁 서막의 주역들. <br>① 루든예프 바략함 함장 ② 벨랴예프 카레이츠함 함장 ③ 우리우 일본 제4함대 사령관 ④ 파블로프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 ⑤ 알렉세예프 러시아 극동총독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이념에 의한 남북간의 민족분쟁도 러일전쟁으로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고 공산주의 소련이 탄생한 것이 그 한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반도 근현대사의 비극과 그 원인 제공에 당시의 러일관계와 러일전쟁이 미친 영향은 심대하다.

    그러나 그간 러일전쟁에 관한 연구들은 대부분 2월9일 새벽 일본함대가 뤼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함대를 어뢰로 기습한 사건을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측 사료들은 이러한 설명이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실제 첫 포성은 지금의 인천 인근 서해상인 제물포 팔미도에서 발생했다. 일본함대의 뤼순 기습보다 몇 시간 앞선 2월8일 팔미도에서 러시아 포함 카레이츠함(한국인 혹은 고려인을 의미하는 이 이름이 “당시 연해주에 진출해 있던 사람들의 근면함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을 것”이라는 러시아 해군의 최근 설명과는 달리, 박종효 전 교수는 “마산포의 개항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었다”고 설명한다. “외국 군함에 민족의 이름을 사용하게 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박 전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대잠 초계함이 ‘카레이츠함’이라는 이름을 승계하도록 애썼던 한국 해군의 노력은 역사적 의미가 부족했던 셈이다 : 편집자)과 일본 해군 사이에 첫 교전이 있었음을 러시아측 사료들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날인 9일에는 러시아함대가 팔미도에서 14:2로 우세한 일본함대와 본격적인 교전을 개시해, 팔미도 앞바다는 포연에 덮였으며 함포소리가 수도 서울까지 들렸다고 당시의 러시아 외교문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첫 교전이 있었던 8일 밤 제물포로 상륙한 3000여명의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서울에 입성한다. 대한제국군 2만명과 해군 훈련함 청룡1호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은 조선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는 마지막 분수령이 된다.

    이제부터 러일전쟁을 앞두고 서울과 도쿄, 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펼쳐진 열강들의 치열한 외교전과 러일전쟁의 서막이 된 제물포해전의 긴박한 드라마를 차근차근 들여다보자. 이 연구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와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 러시아국립해군함대문서보관소 등에 보존되어 있는 100년 전의 공식문서들과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회고록 및 보고서, 일본측의 메이지 시대 해전기록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열강의 국제 해군항 제물포

    우선 첫 번째 의문은 도대체 왜 대한제국의 영해인 제물포에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 주변의 군사력 배치를 살펴봐야 한다.

    1903년 말 한반도에는 “동학교도들이 일본인들을 내쫓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상륙하면 대한제국군도 동학교도에 가담해 폭동을 일으켜, 독립을 위협하는 일본공사관은 물론 그 조약국인 영국공사관도 습격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는 당시 사료에 따르면, 이러한 분위기에 놀란 영국은 1903년 12월말 공사관 보호를 위해 선두로 순양함 시리어스함에 28명의 해병대원을 승선시켜 제물포에 파견하고 곧 이어 탈보트함으로 교체하였다. 다른 열강도 제각기 자국함대를 급히 파견하였다. 미국은 빅스버그, 프랑스는 파스칼, 이탈리아는 엘바, 독일은 한사, 일본은 치오다 등을 파견해 제물포는 마치 국제 열강의 해군항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바략함 함장 루든예프 대령도 청나라 뤼순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극동총독 겸 태평양 해군사령관 알렉세예프로부터 공사관 보호와 일본인의 동태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명받고, 1903년 12월17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루든예프 함장은 본국의 지시에 따라 1904년 1월12일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 56명의 해병대원을 보내 보호조치를 취한다.

    이 무렵 일본군은 마산포뿐만 아니라 제물포에도 군수품 창고를 세우고 서울 영등포의 창고에 막대한 양의 군량미를 저장하고 있었다. 2월초부터는 마산포에 1만2000명의 군인을 상륙시키고 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해왔다. 원산에도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예비군과 군인 및 군마(軍馬)를 비롯한 군수품과 탄약 등이 속속 도착했다. 일본은 이처럼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러일협상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 극동총독부는 1904년 2월2일부터 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에 소재한 아무르 군관구 사령부로부터 극동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귀국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일본인 귀국 여객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긴박함을 느낀 극동총독은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총동원령과 함대 해상배치 칙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지만, 황제는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일본군이 한반도 남쪽이나 동해안 원산 이남에 상륙할 경우 러시아가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대신 서해안에 일본의 상륙군을 수송하는 군함이나 혹은 수송하지 않는 군함이라 할지라도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 것을 목격하면 일본군의 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공격하라는 칙령도 내린다.

    이러한 칙령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1896년 일본이 처음 38선 분할안을 제안한 이후 러일 양국은 이미 묵시적으로 38선을 기준으로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마산포 등지에서 일본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심상찮은 보고를 첩보부로부터 받고도 러시아가 곧바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러시아는 대신 서해안에서 제물포항이 갖는 의미를 인식하고 있었다. 서울 러시아공사관과 멀지 않으면서 뤼순항의 배후항이기도 한 제물포를 전략적 거점으로 생각하고, 이미 1903년 12월부터 바략함 외에 두 척의 순양함을 파견했다. 그러나 1904년 1월18일 러시아는 이 두 척의 순양함을 뤼순항으로 귀항시키고 대신 해군 중령 벨랴예프가 지휘하는 소형 포함 카레이츠함과 러시아 소유인 동청철도 소속 여객선 순가리호를 제물포에 배치시킨다. 러일전쟁 전야 제물포항을 둘러싼 열강들의 군사배치는 이처럼 첨예했다.

    일본은 1903년 말 러시아가 미완성 상태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유럽지역으로부터 일부 군부대(당시 유럽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은 대략 80만명)를 연해주 군관구로 이동시켰다는 의미심장한 첩보를 입수한다. 더욱이 대한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협상에서 러시아가 시간을 끌고 있는 것도 일본으로서는 불안한 일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상황이 러시아에 유리해진다는 점을 일본은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태평양함대와 극동주둔 육군이 일본에 비해 열세였으므로, 협상을 통해 철도를 완성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면서 대한제국 문제를 카드 삼아 만주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일본과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만주에서 이권을 유지하려면 만주개방을 요구하는 일본 사이에 조선반도가 완충지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대신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 있는 것이 자국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고종황제에게 정치적인 호의를 보이며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전쟁의 먹구름

    청나라 즈푸(芝?) 주재 일본영사가 “뤼순항의 러시아 대형군함은 한 척이 수리중에 있을 뿐 모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모두 출항했다”는 급보를 도쿄에 보낸 것은 러일간의 긴장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04년 2월4일의 일이다. 뤼순항의 태평양함대 총 28척의 군함들이 해상훈련을 나간 것이다.

    일본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그날밤 천황이 주재하는 특별 어전회의에서 대(對)러시아전쟁을 결의한다. 다음날 오후 일본 외상 고무라는 “러시아의 위협적인 사태를 방어하고 일본의 권리와 이해 보호를 위해 불가피하게 회담을 계속할 수 없어 일본제국 정부는 협상을 중지하고 자유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러시아 외상 람즈도르프에게 전하라고 페테르부르크 주재 일본공사 구리노에게 지시한다. 협상 중지의 원인에 대해 일본은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만주에 편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과 국토보존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페테르부르크주재 일본공사관 철수 등 일본의 강경조치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제물포의 러시아함대와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2월5일경 외국인들을 통해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파블로프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는 루든예프 함장에게 “외교단절에 대한 소문을 일부 사람이 퍼뜨리고 있으나 외부와 연락이 두절되어 확인할 수 없다”고 전문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전쟁은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2월6일 아침 일본 해군중장 도고는 사세보에서 함장들을 소집했다. 서해 지도와 제물포, 뤼순항의 지도를 펼쳐놓고 러시아함대의 위치와 특징을 자세히 설명한 그는 함장들에게 “이제 전 함대는 서해로 발진하여 제물포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함대를 습격하라”고 명령한다. 도고 중장은 제4전투함대 사령관 해군소장 우리우에게 “아사마함을 비롯한 네 척의 순양함과 제9,14어뢰정 부대를 출동시켜 정박중인 러시아함을 분쇄하고 그곳으로 상륙하는 육군을 호위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뤼순항에는 제1,2,3전투함대가 구축함과 함께 발진하여 밤에 정박중인 러시아함을 공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린다. 여섯 척의 전함, 14척의 순양함, 35척 이상의 어뢰정으로 구성된 일본함대가 서해를 향해 일제히 닻을 올렸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러일전쟁 초기 제물포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2월7일 제4전투함대 사령관 우리우 소장은 연합함대와 헤어져 다섯 척의 순양함과 여덟 척의 어뢰정, 세 척의 대형 상륙군 수송선을 호위하고 제물포로 향했다. 이 외에 제물포에 정박중이던 일본 순양함 치오다함은 2월8일 새벽에 출항하여 러시아함대의 동향을 보고하고 일본함대에 합세했다. 치오다함의 보고를 받은 우리우 사령관은 정박중인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이 제물포에 상륙하는 일본 상륙군을 방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여객선인 순가리호는 우리우 사령관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미국의 조선소에서 건조해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정예함이 된 바략함을 나포해 천황즉위 기념일에 선물로 바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러시아 극동총독부는 일본함대의 이러한 동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2월7일 본국으로부터 “일본이 러일협상 중지와 외교단절을 선언했다”는 전문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일본이 페테르부르크 공사관에서 철수함에 따라 도쿄 주재 러시아공사관도 즉시 일본을 떠나 뤼순으로 가라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정작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하는 무대였던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는 이러한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일본이 통신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반도에서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은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고립무원 상태였던 것이다.

    대신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파블로프는 2월7일 바략함 함장 루든예프를 서울로 조용히 부른다. “일본이 전신선을 절단하고 전문 접수와 배달을 방해해 일주일째 페테르부르크 및 극동총독부와 연락이 끊겼으니, 긴급한 비밀 보고서를 카레이츠함으로 직접 뤼순 항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 긴급한 비밀 문서 중에는 “일본함대가 압록강 하구로 항해하고 있으며 제물포에 일본군이 상륙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국립해군함대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당시 문서에 따르면 이 정보는 다름아닌 고종 황제가 은밀히 사람을 시켜 러시아공사관에 전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첫 포성이 울려퍼지고

    1904년 2월8일 오후 3시40분. 카레이츠함은 제물포에서 닻을 올리고 아직 쌀쌀한 해안을 지나 서해로 나갔다. 뤼순항의 극동총독에게 전할 특별 비밀문서를 긴급수송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출항한 지 15분이나 지났을까, 카레이츠함의 수병들에게 전방에서 2열 종대로 전진해오는 일본함대가 목격되었다. 이곳이 바로 제물포 남방 약 13.5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섬 팔미도 근해. 카레이츠함은 세 척의 순양함과 네 척의 어뢰정 그리고 수송선 여러 척으로 구성된 일본함대와 정면으로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레이츠함 함장 벨랴예프 중령은 러일간의 외교 단절이나 일본의 전쟁 결정 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일본함대가 다가오자 통상의 예절에 따라 경외 신호를 보냈던 벨랴예프 중령은, 일본 군함들이 답례 대신 카레이츠함을 포위하는 대열로 방향을 바꾸자 당황했다. 카레이츠함이 일본함대 사이를 관통해 나가는 순간 일본 순양함대는 함포를 수직으로 내려 덮개를 벗기고 포수를 배치시키는 것이 아닌가. 위기를 느낀 카레이츠함이 서둘러 공해로 나가려고 하자 일본함대의 주력함 아사마함이 카레이츠함의 진로를 가로막고 어뢰정은 두 방향에서 공격하려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공해로 나갈 길이 막혀버린 카레이츠함은 제물포로 방향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네 척의 어뢰정 중 한 척이 카레이츠함에 첫 어뢰를 발사한 것이 바로 이때, 오후 4시35분이었다. 벨랴예프 함장은 바로 전투경보를 내렸다. 일본함대의 제2, 제3의 어뢰가 이어졌지만 명중되지 않았고, 카레이츠함은 두 발의 대응포격을 한 뒤 가까스로 제물포 중립국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일본측의 해전기록은 이날의 첫 상황에 대해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아사마함이 카레이츠함을 가로막은 것은 선회하고 있던 다른 수송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공해로 나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선제공격을 가한 것 역시 카레이츠함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레이츠함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일본함대가 응사해 교전했다는 말은 일본측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상반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측 기록에 더 신뢰가 가는 것은 대형 일본함대에 소형 포함 한 척이 먼저 발포했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뤼순항의 극동총독에게 보내는 비밀문서를 긴급히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카레이츠함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반대로 일본함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물포에 부대를 상륙시키고 정박중인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어찌됐건 카레이츠함은 제물포항으로 돌아왔지만, 통신두절로 인해 뤼순항이나 페테르부르크에 교전사실을 보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무방비 상태였던 뤼순항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2월9일 새벽 일본함대의 기습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더불어 뤼순항 기습소식이 제물포에서 일어난 교전 사실보다 먼저 페테르부르크에 보고되면서 ‘러일전쟁의 발생일자는 2월9일’이라는 오류가 기정사실이 된다.

    한편 페테르부르크의 황제 니콜라이2세는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으로부터 2월9일 일본함대의 뤼순항 습격소식을 전해 듣고 2월8일자(시차로 인해 날짜가 하루 느리다) 일기에 “선전포고도 없이 이럴 수가….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라고 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일본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의 ‘런던타임스’가 팔미도의 러일 첫 교전에 대해 “카레이츠함이 일본함대를 먼저 공격하여 어뢰정에 발포했다”며 러시아측에 책임을 떠넘긴 반면, 독일의 ‘마리네 룬두샤우’ 신문은 “카레이츠함이 일본함대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월8일 오후 4시55분 제물포항으로 돌아온 카레이츠함은 바략함 선미에 닻을 내리고, 벨랴예프 중령은 즉시 바략함 함장 루든예프 대령에게 건너가 상황을 보고한다. 한편 카레이츠함을 추격해온 일본함대는 오후 5시경에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 중 네 척의 일본 어뢰정은 러시아 함정 바로 옆에 정선하고 닻을 내렸다.

    제물포 외국 군함 함장회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시 제물포항은 각국의 군함들이 머무는 중립국 항구였다. 루든예프는 러시아 군함에 일본 어뢰정의 기습공격을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외국 군함의 선임함장인 영국 탈보트함의 베일리 대령을 찾아가 “일본함대에 중립국 항구에서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경고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베일리 함장은 일본함대 우리우 제독을 만나 “중립국에서는 어느 국가의 군함도 다른 나라의 군함에 발포할 권한이 없다. 그와 같은 행위를 하면 어느 나라 함정이든 영국 군함이 그 함정에 대하여 먼저 발포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한다.

    이러한 베일리 대령의 노력으로 일본과 러시아 해군은 기습공격 없이 그날 밤을 보내지만, 러시아함대의 해군들은 일본의 기습공격을 염려하여 전투준비 태세로 밤을 새웠다. 그 사이 일본함대는 수송선 세 척으로 수송해온 일본군 약 3000명과 군마 등을 제물포항에 상륙시켰다.

    2월9일 아침 7시30분이 되자 우리우 사령관은 러시아 군함을 제외한 각 외국 군함 함장에게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상태로 돌입했다고 통보했다. “러시아 군함은 정오 12시까지 제물포항을 떠나야 하며 출항하지 않으면 오후 4시 이후에 정박지에서 공격할 것이므로, 외국 군함들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정박지를 옮겨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러한 통보를 받은 각국 함대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프랑스 파스칼함 함장 세네스와 이탈리아 엘바함의 함장 보레아가 루든예프를 찾아왔고, 세 사람은 영국의 베일리 함장을 찾아가 대책을 협의했다. 회의가 열리고 있던 오전 9시30분 제물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관은 루든예프 대령에게 “러일간에 적대관계가 시작되었으므로 귀관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즉시 지휘하고 있는 함정을 인솔해 제물포항을 떠나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영국의 함장들은 공동명의로 일본함대의 중립 위반을 엄중히 항의하는 서한을 전달하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비교가 되지 않는 열세한 전력으로 일본함대와 맞서야 하는 상황에 처한 루든예프 대령에게 각국 함장들이 동정을 표하자 루든예프는 “일본함대와 교전하며 공해로 나갈 돌파구를 찾아보겠다. 어떤 경우에도 항복은 없다”고 비장하게 답했다.

    제물포항을 떠나기로 결정한 아침 10시, 루든예프는 전 장교를 집합시켜 군사작전이 개시되었음을 알리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순양함 바략함의 장교단은 이구동성으로 함장의 뜻에 따라 일본함대에 대항해 싸우겠다고 결의했다. 작전에 실패할 경우 일본에 전리품으로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함정을 폭파하겠다는 결정도 내려졌다. 지휘관의 결정은 곧 전 수병들에게 전달되었다. 루든예프 함장은 장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오늘 일본 해군제독으로부터 러일 양국이 전쟁상태로 돌입했으며 정오까지 제물포항을 떠나라는 통고를 받았다. 물론 우리는 일본함대와 대적한다. 러시아 해군에게 항복은 있을 수 없다. 한 방울의 피가 남는 최후 순간까지 싸우자. 출정에 앞서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자비로우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용감히 싸움터로 항진해 가자! 주님과 황제와 조국을 위하여! 만세!”

    잠시 후 11시20분, 바략함은 소형포함 카레이츠함을 앞세워 제물포에서 출항했다. 일본함대는 이미 제물포항을 떠나 팔미도에서 교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함대 악대가 연주하는 제정 러시아 국가 ‘주여, 황제를 보호하소서’가 항구에 울려퍼졌다. 이탈리아 함정 곁을 지날 때는 이탈리아 군악대가 함상에 나와 러시아 국가를 함께 연주해주었다. 자국 함상에 서 있던 외국 군함 지휘관들은 출정하는 러시아함대에 거수경례로 작별을 고했다.

    러시아함대가 팔미도에 이르자 나니바함에 승선하고 있던 우리우 제독은 모든 일본함대에 전투준비를 지시한다. 루든예프 함장은 계속되는 우리우 제독의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고 두 척의 러시아함에 전투 깃발과 러시아해군기를 펄럭이며 전투자세로 항진해 나갔다. 러시아함대의 전면에는 일본함대의 순양함 아사마함과 치오다함, 후면에는 나니바함과 니다카함, 다카치오함, 아카시함 등이 줄지어 서 있었고, 멀리 여덟 척의 어뢰정과 세 척의 수송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팔미도에서 공해로 나가는 두 해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배치였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화창했다. 동남풍이 약하게 불어오는 팔미도 인근에서 양국 함대는 점차 근접해갔다. 마침내 오전 11시45분 일본측 순양함 아사마함의 8인치 포가 바략함을 향해 불을 뿜었다. 뒤를 이어 모든 일본함대가 바략함에 포문을 열었다. 앞서가던 카레이츠함도 일본함대를 향해 응사했다. 바략함은 사정권을 벗어나 포격준비를 갖춘 후 11시57분 아사마함을 향해 응사하기 시작했다.

    러시아함대에게 이 전투는 살아 돌아갈 가망이 전혀 없는 싸움이었다. 일본함대는 사전에 유리한 거점을 점하고 있었고 군함의 수도 14대2, 말 그대로 중과부적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건조한 철갑순양함 아사마함은 월등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고 있었다.

    아사마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바략함의 함교에 명중했다. 이어지는 포격으로 피해는 점점 늘어갔다. 곧 6인치 대포 3문, 75mm 대포 1문, 45mm 대포 2문이 연이어 파괴됐다. 그러나 바략함의 저항도 거셌다. 아사마함에 집중한 바략함의 응사는 사령탑을 명중시켜 아사마함 함장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카치함은 포탄을 맞고 많은 부상자를 낸 데다 화재가 일어나 크게 파손되었다(해전 후 긴급수리를 위해 200여명의 부상자를 싣고 일본 사세보(佐世保) 해군항으로 가던 다카치함은 2월10일 끝내 침몰하고 만다). 나니바함 작전실도 바략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명중하여 함장이 중상을 입었다.

    “후퇴하라!”

    루든예프 함장은 일본함대의 맹렬한 공격을 돌파해 공해로 나가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우리우 제독은 아사마함에게 추격명령을 내렸고, 아사마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바략함의 자동조종장치를 박살냈다. 수동조종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바략함은 기동성이 떨어져 집중공격을 받았고, 결국 함정 곳곳에 구멍이 나 물이 새어들자 배가 좌측으로 기울어갔다.

    뒤따르던 카레이츠함이 지원에 나선 것은 이때였다. 카레이츠함의 화력은 2문의 203mm 대포, 1문의 52mm포, 4문의 37mm포였다. 거의 한시간 동안 계속된 해전에서 카레이츠함은 한 발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우리우 제독의 작전이 바략함에 집중되었던 까닭이다. 공격이 이어지면서 앞 돛대에 떨어진 포탄 파편 하나가 루든예프 함장의 머리에 명중했다. 함장 옆에 서서 전투를 독려하던 나팔수와 고수(鼓手)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바략함에서는 루든예프 함장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겨우 의식을 회복한 루든예프 함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군복 차림으로 다시 사령탑에 오른다. 러시아 수병들의 환호성이 울려퍼졌지만 승부는 이미 비관적이었다. 파괴될 만큼 파괴된 바략함은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적잖은 수병들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결국 제물포로 후퇴하기로 결정한 루든예프 함장은 후퇴명령을 내린다. 나팔수의 신호음이 구슬프게 퍼졌다. 오후 12시45분, 전투개시 한 시간 만의 일이었다.

    루든예프 함장은 이후 사령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후퇴 결정은 함정의 파손 부분을 급히 보수하고 부상자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으며, 16시까지 다시 출항해 해전을 계속할 각오였다”고 말하고 있다.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이 중립항인 제물포 내항으로 들어서자, 외국 함대의 개입을 우려한 일본함대는 추격하지 않고 배를 세웠다. 일본측의 해전기록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략함이 간신히 도주해 제물포 정박지로 들어가자 아사마함은 사격을 멈췄다. 팔미도 러일해전에서 일본함대는 적함의 포탄에 일발도 맞지 않아 전혀 손실이 없는 전과를 거뒀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일본함대의 공격을 받고 좌현이 기운 바략함을 묘사한 당시의 기록화.

    그러나 러시아측의 기록은 다르다. 바략함은 전사자 34명(중상자 중 치료과정에 사망한 12명 포함), 경상자 105명, 중상자 91명 등 총 229명의 인명피해를 당한 반면, 일본함대는 전사자 30명에 부상자 200명으로 총 230명의 인명피해를 당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물론 두 가지 설명 중 어느 것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제물포해전이 수백명의 인명피해를 내고 양국 함대의 주력함에 치명타를 입힐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실은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프랑스해군 파스칼함의 세네스 함장의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바략함의 갑판은 피바다였으며 사방에 시체와 사지가 찢어져 널려 있고 함정은 어느 곳 한군데도 파손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포탄을 맞은 곳마다 불에 타 있었으며 철판은 구멍이 나고 환풍기는 부서져 있었다. 선실과 침대는 화기로 뜨거웠고 포탄을 맞은 함교는 벌집이 되어 매달려 있었다. 후미에서는 하염없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함정은 점점 왼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전투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든예프 함장은 장교들과 협의하여 바략함을 일본에 전리품으로 주지 않기 위해 폭파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외국 군함 함장들에게 알린다. 외국 군함들은 일본함대의 최후통첩에 따라 14시까지 제물포항을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적십자 깃발의 위력

    폭파 연락을 받은 외국 군함의 지휘관들은 러시아해군 부상자와 생존자들을 자신들의 함정에 승선시켜 구조하기로 합의했다. 적십자 깃발을 매달고 의사와 위생병을 태운 보트가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으로 달려왔다. 다만 미국 군함 빅스버그함의 함장 마셜 중령은 “서울 주재 알렌 공사로부터 지시가 없고 선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구조를 거부했다.

    바략함 승선자들의 대피가 끝나자 루든예프 함장은 영국 함장 베일리 대령에게 폭파를 시작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주위에 정박중인 외국함에 파편이 튈 것을 염려한 베일리 대령은 폭파대신 급수용판(給水用瓣)을 여는 방안을 권한다. 결국 바략함은 전사자들과 함께 서서히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40분 만에 수십 구의 러시아 수병 유해와 최신식 순양함 한대가 제물포항에 완전히 수장되었다.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카레이츠함도 온전한 상태로 제물포항을 빠져나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카레이츠함 역시 일본함대에 넘겨주지 않으려면 자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외국 함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약간 먼 곳으로 나간 카레이츠함은 폭탄을 터뜨려 폭파시켰다. 여객선 순가리호는 동청철도 제물포 지사장과 합의하에 방화해 침수시켰다. 이로써 러시아의 전 함정은 수장되었다. 뒷날 일본함대는 바략함을 인양했지만 포츠머스 회담(1905년)의 합의 결과에 따라 이를 러시아에 반환한다.

    한편 일본함대의 우리우 제독은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러시아함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제물포항에 순양함 치오다함을 보냈다. 이때 이미 바략함은 물속에 잠겨 선창의 일부분밖에 보이지 않았고, 카레이츠함과 여객선 순가리호는 중간 돛대와 연통 끝만 물위에 떠 있었다고 일본측 기록은 전한다. 우리우 제독은 곧바로 승전했다고 사령부에 보고했다. “짐은 제4전투함대의 작전을 높이 평가해 마지않는다. 제물포에 상륙군의 호송 임무를 완수하고 적함을 완전히 전멸시켰다”는 천황의 축전이 곧 전달되었다.

    한편 “제물포해전을 직접 목격한 외국 군함 승무원들은 14대2의 싸움에서 선전한 러시아해군의 투혼에 탄복했다”고 러시아 해군측 기록은 전한다. 이들은 구출한 러시아해군과 여객선 승무원들을 옮겨 싣고 적십자기를 게양했다. 일본함대가 이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십자 깃발의 위력 때문이었다.

    고종황제의 ‘안타까움’

    이틀이 지난 2월10일, 일본 쪽으로 마음이 기운 알렌 미국공사가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파블로프를 예방한다. “일본의 하야시 공사가 러시아공사관원의 서울철수를 요구하고 있으며 불응할 경우 강제로 출국당할 수도 있다”는 전갈이었다. 때마침 방문한 서울 주재 프랑스공사대리 드 폰테네는 “전쟁중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이해는 프랑스공사관에서 보호하겠다”고 단언한다. 파블로프 공사는 프랑스공사관을 통해 프랑스 주재 러시아대사 넬리도프에게 전갈을 보내 프랑스 정부에 이 같은 보호약속을 확인해두라고 요청했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 연 제물포해전

    제물포 앞바다에 가라앉은 바략함.

    넬리도프는 회신에서 “프랑스 정부가 서울 공사대리에게 러시아공사와 긴밀히 협의하라는 훈령을 보냈으며, 반대로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일본 공사관의 이해는 미국공사관이 위임받았다”고 전했다. 일본은 미국, 러시아는 프랑스와 손을 잡는 구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파블로프 공사는 공사관의 모든 재산을 프랑스공사관에 위탁하고 철수준비를 시작했다.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있는 당시의 외교 문서들에 따르면,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유일하게 의지해온 러시아공사관이 긴급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고종은 파블로프 공사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짐은 이미 일본군의 포로상태에 있으며 모든 권력을 빼앗겼다. 곧 상황이 변해 러시아가 승리하리라고 확신한다. 앞으로 대한제국은 러시아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할 것”이라고 전했다.

    2월12일 아침 8시30분 파블로프 공사를 비롯한 공사관원들과 무장해제를 당한 공사관 경비병, 러시아 정교회 신부와 민간인들은 제물포에 정박중인 외국 군함에 승선하기 위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연도에는 일본 헌병대가 도열했다. 서울역에 도착해서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제로 떠나는 러시아공사관 일행에게 일본 군악대가 이별곡을 연주해주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대한제국 사이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후 러시아는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1906년 다시 서울에 공사관을 열었지만, 대한제국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함에 따라 러시아공사관은 총영사관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외무성의 허가로 조선통감부와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광복 때까지 총영사관으로 있었다.

    한편 제물포해전에서 부상을 입은 러시아 수병들은 러시아 군의관과 외국군함 군의관이 응급치료를 했으나 8명이 파스칼함에서 사망했다. 중상자 24명의 생명도 위태로웠다. 프랑스가 일본과의 중재에 나서 이들을 ‘해난구조자’로 인정해 제물포의 일본인 병원에 입원시켰지만 이들 중 상당수도 곧 사망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2월16일 외국 군함 함장들과 우리우 일본제독, 서울 주재 일본공사 하야시가 협상을 벌였다. 최종적인 협상결과는 서울 주재 프랑스공사대리를 통해 “러시아 해군은 승선국가 함정 책임하에 출항할 수 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상하이 이북에는 가지 않는다”는 내용의 보장각서를 일본측에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협상결과에 대해 일본 정부가 승인하자 이날 프랑스 파스칼함은 러시아공사를 비롯한 공사관원과 민간인들을 추가로 승선시켜 상하이 인근 우순으로 출발했다. 영국의 탈보트함과 이탈리아의 엘바함은 홍콩으로 출항했다.

    ‘역사’와 ‘역사학’ 사이

    이렇게 해서 러일전쟁의 서막을 장식한 제물포해전은 끝이 났다. 서울과 도쿄, 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펼쳐진 숨가쁜 외교전도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본격화되어 1905년 5월말 회항해온 러시아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궤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숨가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대한제국은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받게 된다.



    제물포해전은 한국에서는 잊힌 전투지만, 러시아에서는 영웅적인 전투로 평가되어 오늘날까지도 해군사에 빛나는 무용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러일전쟁 100주년을 앞둔 요즘은 바략함과 카레이츠함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반면 한국은 자신의 영해에서 일어난 전투, 특히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러일전쟁의 서막에 대해 그동안 무심했다.

    역사의 한 모퉁이 한 모퉁이를 끊임없이 새기고 철저하게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하는 러시아인들의 전통이야말로 이 같은 ‘신화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그들의 ‘역사’는 몰라도 그들의 ‘역사학’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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