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일전쟁 서막의 주역들. <br>① 루든예프 바략함 함장 ② 벨랴예프 카레이츠함 함장 ③ 우리우 일본 제4함대 사령관 ④ 파블로프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 ⑤ 알렉세예프 러시아 극동총독
그러나 그간 러일전쟁에 관한 연구들은 대부분 2월9일 새벽 일본함대가 뤼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함대를 어뢰로 기습한 사건을 전쟁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측 사료들은 이러한 설명이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의 실제 첫 포성은 지금의 인천 인근 서해상인 제물포 팔미도에서 발생했다. 일본함대의 뤼순 기습보다 몇 시간 앞선 2월8일 팔미도에서 러시아 포함 카레이츠함(한국인 혹은 고려인을 의미하는 이 이름이 “당시 연해주에 진출해 있던 사람들의 근면함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을 것”이라는 러시아 해군의 최근 설명과는 달리, 박종효 전 교수는 “마산포의 개항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었다”고 설명한다. “외국 군함에 민족의 이름을 사용하게 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박 전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대잠 초계함이 ‘카레이츠함’이라는 이름을 승계하도록 애썼던 한국 해군의 노력은 역사적 의미가 부족했던 셈이다 : 편집자)과 일본 해군 사이에 첫 교전이 있었음을 러시아측 사료들은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다음날인 9일에는 러시아함대가 팔미도에서 14:2로 우세한 일본함대와 본격적인 교전을 개시해, 팔미도 앞바다는 포연에 덮였으며 함포소리가 수도 서울까지 들렸다고 당시의 러시아 외교문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한편 첫 교전이 있었던 8일 밤 제물포로 상륙한 3000여명의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서울에 입성한다. 대한제국군 2만명과 해군 훈련함 청룡1호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은 조선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는 마지막 분수령이 된다.
이제부터 러일전쟁을 앞두고 서울과 도쿄, 페테르부르크를 무대로 펼쳐진 열강들의 치열한 외교전과 러일전쟁의 서막이 된 제물포해전의 긴박한 드라마를 차근차근 들여다보자. 이 연구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와 제정러시아대외정책문서보관소, 러시아국립해군함대문서보관소 등에 보존되어 있는 100년 전의 공식문서들과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회고록 및 보고서, 일본측의 메이지 시대 해전기록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열강의 국제 해군항 제물포
우선 첫 번째 의문은 도대체 왜 대한제국의 영해인 제물포에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 주변의 군사력 배치를 살펴봐야 한다.
1903년 말 한반도에는 “동학교도들이 일본인들을 내쫓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만일 일본군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상륙하면 대한제국군도 동학교도에 가담해 폭동을 일으켜, 독립을 위협하는 일본공사관은 물론 그 조약국인 영국공사관도 습격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러시아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는 당시 사료에 따르면, 이러한 분위기에 놀란 영국은 1903년 12월말 공사관 보호를 위해 선두로 순양함 시리어스함에 28명의 해병대원을 승선시켜 제물포에 파견하고 곧 이어 탈보트함으로 교체하였다. 다른 열강도 제각기 자국함대를 급히 파견하였다. 미국은 빅스버그, 프랑스는 파스칼, 이탈리아는 엘바, 독일은 한사, 일본은 치오다 등을 파견해 제물포는 마치 국제 열강의 해군항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바략함 함장 루든예프 대령도 청나라 뤼순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 극동총독 겸 태평양 해군사령관 알렉세예프로부터 공사관 보호와 일본인의 동태에 관한 정보 수집을 명받고, 1903년 12월17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루든예프 함장은 본국의 지시에 따라 1904년 1월12일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에 56명의 해병대원을 보내 보호조치를 취한다.
이 무렵 일본군은 마산포뿐만 아니라 제물포에도 군수품 창고를 세우고 서울 영등포의 창고에 막대한 양의 군량미를 저장하고 있었다. 2월초부터는 마산포에 1만2000명의 군인을 상륙시키고 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해왔다. 원산에도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예비군과 군인 및 군마(軍馬)를 비롯한 군수품과 탄약 등이 속속 도착했다. 일본은 이처럼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러일협상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