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호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긴장과 悲感 걷어내는 선 굵은 淸淨山河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사진: 김성남 기자 photo7@donga.com

    입력2004-01-30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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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의 규칙이 하늘을 제압할 수는 없는 법. 곳곳에 숨어 있는 지상 최대의 군사력과 긴장은 시베리아를 거쳐 내려온 겨울철새들에게는 한낱 남의 일일 따름이다. 가혹한 역사의 상처를 뒤로한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철원에서 맞는 새벽안개는 오래도록 가슴을 시리게 했다.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민통선 안 벌판에서 만난 두루미떼의 어스름 비행.

    길을 떠났다. 짙뿌연 안개가 찬 겨울공기와 뒤섞여 거대한 스모그를 만들어내는 서울을 뒤로하고 나선 참이었다. 꽉 막힌 한낮 도심을 피해 한순간이라도 빨리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욕심에, 의정부 너머 포천으로 곧게 뻗은 북행 3번 국도 대신 에둘러가는 자유로를 택했다. 한강변을 따라 달린 지 30여분 만에 북녘이 뻔히 건너다보이는 파주 문산을 지나, 곳곳에 대전차장애물이 놓인 연천길을 굽이굽이 달려 닿은 곳은 강원도 철원땅. 외박 나온 병사들이 무리 지어 오가는 거리가 철원군청이 자리한 갈말읍, 이름하여 ‘신철원’이다.

    김주영의 단편소설 ‘쇠둘레를 찾아서’(1987)는 두 명의 중년사내가 의기투합해 철원을 찾아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차를 달려 닿은 철원은 이름만 철원일 뿐, 기억 속의 그 거리가 아니다. 한참을 헤매고 또 헤맨 끝에 기억 속의 철원은 휴전선 민간인 통제선 안에 있음을, 그나마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어 옛모습을 거의 찾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음을 알고는 망연해하는 것이 소설의 끝이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한국전쟁 뒤에 ‘수복’된 철원은 종전 반세기를 넘긴 지금까지도 곳곳에 그 기억을 상처처럼 안고 있는 고장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군사시설 표지판은 물론이요, ‘김일성이 짓던 다리를 전쟁 후 이승만이 이어받아 마저 지었다’고 해선 붙인 이름이라는 승일교, 어린 시절 교실 뒤 게시판의 단골손님이던 ‘달리고 싶은 철마’가 있는 월정리역, 백마고지전투 기념비까지, 이들을 둘러보는 하룻길 여행코스가 이름하여 ‘안보관광’이다.

    그렇다고 역사를 생각하며 비감해하는 것이 철원 여행길의 전부는 아니다. 관광명소를 한바퀴 휘휘 돌아 민통선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10여분 만에 수천 마리 기러기가 떼를 지어 하늘을 뒤덮었다. 하루 전에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통과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군 경비초소를 지나 민통선 안 쪽 양지리 마을에 들어서면 ‘철새마을, 평화의 땅에서 생명의 소리를 들어보세요’라는 표지판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①동네 아주머니들이 마을잔치에 낼 잔치국수를 끓여내고 있다.<br>②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의 무대 청석골에 세워진 TV드라마 촬영용 세트장.<br>③삼부연폭포 인근에 있는 오룡굴은 철원에서 가장 오래된 터널이다.

    마을 인근 토교저수지 가엔 검은 독수리떼가 앉아 주민들이 던져준 돼지고기를 뜯어먹고 있다. 게으르기 짝이 없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귀찮게 구는 까마귀들이 갑자기 얄미워진 것일까. 한줄기 바람이 일자 육중한 몸을 일으켜 시원스레 하늘을 활강한다. 망원렌즈로 살펴보니 날개길이가 2m는 될 듯싶다.

    ‘지뢰조심’ 표지판이 주렁주렁 매달린 철조망을 옆에 끼고 인적 없는 논둑길을 가니 곳곳에 숨어 있던 재두루미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수백, 수천이 떼지어 후드득후드득 도망다니기 바쁜 기러기들과는 영 다른 우아한 모습이다. 세상사가 귀찮다는 듯, 인간들이 지겹다는 듯, 한 걸음 또 한 걸음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라더니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생경스러웠던지 한떼의 두루미가 남도 북도 닿을 수 없는 비무장지대, 그 한복판 벌판으로 날아가버린다. 기러기떼도 두루미를 쫓아 휴전선을 넘는다. 사람의 규칙이 하늘을 제압할 수는 없는 법. 철원평야 곳곳에 숨어 있는 지상 최대의 군사력과 긴장은 이들에게는 한낱 남의 일일 따름이다.

    바로 그 긴장이 철원에 ‘청정지역’이라는 별호를 선사했음은 분명 아이러니다. 도시도, 공단도 들어설 수 없는 땅에서 물은 유리보다 맑고 공기는 눈처럼 차다. 줄줄이 굽이치는 한탄강 곳곳에 있는 직탕폭포, 매월대, 삼부연폭포의 시원스런 물줄기와 순담계곡, 고석정의 기암괴석은 선이 굵고 골이 깊어 새삼 ‘강원도의 힘’을 절감케 한다.

    깨끗한 물이 있는데 먹을거리가 어찌 남루할 수 있으랴. 한탄강 계곡에서 잡아올린 민물장어를 구워 파는 직탕계곡 옆 폭포가든(033-455-3546)의 사장님은 “해가 갈수록 장어잡이 주낙꾼 어르신들이 줄어 든다”며 한숨 섞인 걱정을 쏟아낸다.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①초가집순두부의 주메뉴인 순두부와 보리밥, 두부보쌈.<br>②직탕폭포 옆에 자리한 폭포가든의 장어구이.<br>③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 길 위의 대전차장애물. 버려진 표지판 위의 글귀가 인상적이다.

    길을 달려 승일교를 지나 만난 초가집순두부(033-452-2948)의 주인 아주머니는 “좋은 물, 좋은 땅에서 자란 콩으로 만든 두부가 맛이 없을 리 있겠냐”고 되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순두부와 뜨끈한 보리밥이 언제 먹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시골 신랑, 사람 좋은 것 하나에 반해 시집왔다는 서울내기 주인 아주머니는 “새댁 시절엔 서울 표지판 달린 차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이제는 친정에 가면 머리가 아파 견딜 수 없다”며 짐짓 철원 자랑에 침이 마른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는 길을 달려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잡은 구철원 시가지에 이르렀다. 말이 좋아 시가지지 옛 거리의 흔적이라곤 을씨년스러운 철원 노동당사 건물 뿐이요, 한복판을 가로질러 삼엄한 대전차장애물과 경비병력이 굳게 자리를 잡고 있다. 노동당사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 그려진 옛 철원 거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격전의 포화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아련함이 밀려온다.

    구철원에 살던 이들이 신철원을 만든 것은 그 아련함 때문이었으리라. 그리움에 묻혀 철원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옮겨왔다는 근남면 사곡2리에서는 때마침 ‘이장턱 마을잔치’가 열려 나그네를 반겼다. 그 동안 고생한 마을 이장에게 한 집에 한 말씩 쌀을 걷어주고, 대신 이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밥을 내는 날이란다.

    장작불에 구워낸 은행과 쇠가마솥에서 끓여낸 ‘오리지널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가라는 어르신들의 말간 표정 너머로 “에에, 이장입니다…”로 시작하는 동네방송이 마을회관 스피커를 울린다. “고향이 따로 있나 타향이 정들면 고향이지…”, 옛 노래 한 자락이 절로 마음을 덮는다. 가혹한 역사와 비감 속에서도 어김없이 삶은 계속되는 땅, 그곳이 철원이었다.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한국의 나이애가라’라 불리는 직탕폭포는 폭이 80m나 된다.

    순박한 사람과 새들의 땅  강원도 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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