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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논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진보적 언론학자들의 진실 왜곡에 할말 있다

  • 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는 6월항쟁, 6·29 선언의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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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앙일보’의 첫 특종은 겨우 사회면 2단짜리 기사였다(1987년 1월 15일자). 신문을 자세히 읽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작은 기사였다. 기사 제목도 경찰 주장대로 ‘쇼크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는 짧지만 충실했다. 이 기사를 쓴 신성호 기자는 당시 입사한 지 6년째로, 법조 출입을 한 지는 5년이 된 기자였다. 허용범의 ‘한국언론 100대 특종’에 의하면 신 기자의 행운은 그의 열성과 노력의 산물이었다.

첫 제목은 ‘쇼크사’

신 기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체크’를 위해 검찰청사를 돌다가 한 검찰간부의 방에 들렀다. 이것이 특종을 얻는 계기가 됐다. 신 기자는 검찰간부가 내뱉은 “경찰 큰일 났어”란 말을 놓치지 않았다. 간부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신 기자는 기지를 발휘하여 “그러게 말입니다. 요새 경찰이 너무 기세 등등해졌어요”라고 받아넘겼다. 그러자 그 검찰간부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아침에 들으니 그렇다고 하데요.”



“시끄럽게 생겼어. 어떻게 조사했기에 사람이 죽은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신 기자는 이를 단서 삼아 검찰간부 몇 명을 더 접촉해 취재를 마쳤다. ‘중앙일보’는 신 기자의 보고를 토대로 경찰, 서울대, 그리고 부산에서 보충취재를 한 뒤 이를 종합하여 기사화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취재하는 데 시간이 걸려 석간 1판에 넣지 못하고 1.5판부터 기사를 게재했다. 만약 신 기자가 이날 오전체크를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신속하게 보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경찰과 검찰, 그리고 신군부는 여론의 악화를 두려워하여 이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처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중앙일보’의 기사는 어떤 내용일까. 제목을 ‘쇼크사’로 달았으나 인용부호를 붙였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박종철군이 경찰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검찰이 수사중’이라는 대목을 기사 앞부분에 넣어 구타나 고문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풍겼다. 박군이 어떤 혐의로 경찰수사를 받았는지, 그리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은 사실은 쓰지 않았으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서울대생이고 운동권에 가담한 사실을 기사화함으로써 시국사범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이만하면 제1보로서 별로 손색이 없는 기사였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朴鍾哲군(21·서울大 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경찰은 朴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했다. 그러나 검찰은 朴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중이다.

학교측은 朴군이 3∼4일 전 학과 연구실에 잠시 들렀다가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밝혔다. 한편 釜山市 靑鶴洞 341의 31 朴군 집에는 朴군의 사망소식을 14일 釜山시경으로부터 통고받은 아버지 朴正基(57·청학양수장 고용원)씨 등 가족들이 모두 상경하고 비어 있었다. 朴군의 누나 朴恩淑(24)씨는 지난 해 여름방학 때부터 朴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최근 무슨 사건으로 언제 경찰에 연행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朴군은 釜山 土城국교·嶺南중·惠光고교를 거쳤으며 아버지의 월수입 20만원으로 가정형편이 어렵다.》

담당의사 증언으로 밝혀진 ‘물고문’

‘중앙일보’가 박군이 죽은 바로 그 다음날 신속하게 첫 보도를 하지 않았다면 사건의 진상이 비밀에 부쳐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그대로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동아일보’가 ‘중앙일보’에 첫 보도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이 사건을 추적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낙종은 더 큰 특종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특별취재팀을 만들어 현장에 투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중앙일보’는 첫 특종보도를 했지만 ‘고문’이라고 쓰지는 못했다. 고문이라고 보도할 사실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그 이튿날자 신문에 2단 기사로 속보를 실어 검찰의 박군 사인에 대한 조사착수와 시체부검 사실, 그리고 가혹행위가 있었다면 검찰은 담당 경찰관을 처벌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 부검 결과 무릎의 찰과상과 손가락 사이에 멍, 그리고 오른 쪽 폐에서 탁구공만한 크기의 출혈반 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3판(16일자 지방판)에서 ‘중앙일보’보다 기사를 더 키워 중간 톱기사로 보도한 데 이어, 이튿날(16일자) 서울 1판부터는 사회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형 중간 톱기사로 박종철 사건을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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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남시욱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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