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03-02 17: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산엔 예상보다 빨리 어둠이 찾아왔다. 영하 20。C를 넘나드는 추위에 랜턴 배터리까지 방전됐다. 눈은 허리까지 차오르고 방향도 길도 완전히 잃어버렸다. 고립무원. 어느 시인은 ‘산은 몇 백 번을 만나도 붙잡지 않는 상큼한 자유’라 했건만. 모든 걸 운명에 맡긴 채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하산한 지 4시간여. 멀리 한 점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삼봉산에서 바라본 대덕산 전경

    2002년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어떤 사람들은 세계 4강신화를 창조해낸 감격적인 한일월드컵을 기억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엎치락뒤치락하던 제16대 대통령선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산꾼이라면 2002년이 UN이 정한 ‘세계 산의 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비록 한국에서는 축구와 정치에 파묻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구촌 곳곳에서는 산에 관한 축제와 토론이 잇따라 열렸다.

    그해 5월 한국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단법인 대한지리학회가 주최한 춘계학회가 바로 그것. 이 자리에서는 한국의 산을 주제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됐는데, 상당수는 백두대간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새삼 백두대간에 관심을 갖고 종주 계획을 세우게 된 것도 이때 발표된 글 때문이었다. 각론이 궁금한 분은 당시의 발제문을 정리해 출간한 ‘백두대간의 자연과 인간’(산악문화)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최근 백두대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언론과 환경단체의 노력이 컸다. 환경부가 2002년 실시한 백두대간에 대한 중요도 조사(5점 척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조사결과 한국인들은 ‘백두대간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다(4.24)’고 응답했고 풍수지리적 관점(4.14), 역사지리적 관점(3.89), 문화적 관점(3.5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생동물의 희생과 희귀생물의 멸종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강추위, 폭설 그리고 山行

    2004년 1월23일, 음력으로는 정월 초이틀.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남쪽으로 밀려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역은 영하 20。C의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었고 설상가상으로 남부지방에는 폭설까지 퍼부었다. 평소 같으면 무덤덤하게 남편을 떠나보냈을 아내도 이날만큼은 걱정이 많은 표정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방한장비를 꼼꼼히 점검하며 산행을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을 정도. 하지만 필자에겐 꼭 설날 연휴에 백두대간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산꾼들은 보통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시산제란 산신제의 일종으로 한 해 동안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동안 필자는 남들이 지내는 시산제에 참석한 적이 있을 뿐, 직접 시산제를 지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마당에 시산제를 올리지 않는다면 왠지 불경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판기획자 김준영씨에게 제문 초안을 부탁해 시산제를 준비했다. 비록 제물에 돼지머리가 빠져 아쉽기는 했지만 북어와 삼색 과일, 탁주와 떡을 정성스레 챙겼다.

    이번 산행에는 대학후배 손석현씨가 동참했다. 눈길을 걸어야 하는 고된 산행인 만큼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더없이 든든한 일이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점심 무렵이 돼서야 거창터미널에 도착했다. 백두대간에 오르기엔 이미 늦은 시각. 우리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신원면으로 향했다. 삼남지방치고 어지간한 사연 하나 없는 동네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 중에서도 거창군 신원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으로 꼽힌다. 1951년 2월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을 두고 하는 얘기다.

    낮에는 국군의 명령에 따르고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한국전쟁 후반부, 남한정부와 국군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빨치산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이 내린 작전명령이 ‘견벽청야(堅壁淸野)’. 이것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아군의 성은 굳건히 지키되, 포기할 곳은 모두 정리하는 초토화 작전’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 700여명이 ‘통비(通匪)분자’라는 이름으로 거창군 신원면 신원중학교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희생자 719명 가운데 14세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는 359명이라고 하니 전쟁의 광기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뿐인가.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고,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은 채 공직에 복귀했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합동위령비마저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 참으로 우리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1988년 여름 필자는 1주일간 거창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농민들은 저녁때만 되면 거창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막걸리를 따라주곤 했는데, 필자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해 봄 유족들이 궐기대회를 열고 땅 속에서 위령비를 찾아냈다는 사실을 알았다(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1월5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법률’이 제정됐다).

    신원중학교 뒷동산의 사건현장에는 3개의 비석이 있다. 전쟁의 공포는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발생 3년 뒤인 1954년이 돼서야 주민들이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는데, 이때 뼈의 크기에 따라 남, 여, 어린이 묘로 나누어 안장했다고 한다.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라고 새겨진 비석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묘소에 소주를 붓고 참배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녀갔는지 쓰레기통 안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멀리 도로 건너편으로 공사가 한창인 거창사건 희생자 묘역 및 기념공원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세운 모양의 조형물 양옆으로 추모하는 군인과 오열하는 유족의 동상이 보였다. 조형물 뒤편에 새겨진 표성흠 시인의 글이 나그네의 마음을 또 한 번 착잡하게 만들었다.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 이들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울었던 희생자들. (중략) 길손들은 여기 이곳을 그냥 무심코 지나지 마시라. 무언가 생각들을 좀 해보시라.’

    버스를 타려고 시내 쪽으로 걸어 나오다가 구멍가게에 들렀다. 소주와 컵라면을 주문하자 가게 주인이 김치를 안주로 내놓았다. 추위를 이기려 연신 소주를 들으켜면서 53년이라는 세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반세기가 지나서나마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공원이 들어선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 땅에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제2의 거창사건’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것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수승대 저녁풍광에 취하다

    신원면에서 거창을 경유해 수승대(搜勝臺)로 향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수승대를 지나쳐 덕유산 방면으로 달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 내려오는데 오른쪽으로 펼쳐진 계곡이 절경이다. 이곳이 바로 위천이다. 덕유산은 깊은 골짜기만큼이나 멋진 풍광의 계곡을 여럿 품고 있다. 무주의 구천동, 함양의 화리동, 거창의 위천이 손꼽힌다. 수승대는 위천의 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과거 이곳은 거창신씨 문중의 터였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수없이 강조했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나무기둥 하나도 그냥 세우지 않았다. 실제로 수승대를 거닐다 보면 주변의 풍광과 완벽하게 어우러진 정자인 요수정을 만나게 된다. 수승대의 명물이 거북바위인데, 요수정에서 계곡 쪽을 바라보면 거북의 형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수승대는 본래 수송대(愁送臺)로 불렸다 한다. 신라의 국력이 강성하던 무렵까지도 거창은 백제의 영토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 신라로 떠난 백제의 사신은 온갖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백제에서는 수송대에서 사신을 위한 송별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수송대는 ‘근심으로 떠나 보낸다’는 뜻이다.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황은 이곳을 방문하려다 갑작스런 왕명을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이때 이황이 거창신씨 문중의 신권에게 보낸 시에 ‘수승이라고 새롭게 이름을 바꾼다’라고 썼다. 지금도 수승대에는 이황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호방한 문장에서 새삼 대학자의 풍류를 짐작할 수 있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1월24일. 아침 일찍 국밥을 사먹고 택시를 탔다. 무주-거창간 37번 국도의 중간지점인 ‘빼재’가 백두대간 종주 네 번째로 이어지는 산행의 출발점이다. 추운 날씨 탓에 도로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택시는 거북걸음으로 비탈을 올랐다. 빼재는 사냥꾼들이 동물을 잡아먹고 뼈를 쌓아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수령(秀嶺)’이라는 글씨가 있고 이곳이 ‘신풍령(新風嶺)’으로도 불리는 걸 보면, ‘빼어난 고개’라는 데서 빼재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택시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방한용품으로 중무장을 했는 데도 벌거벗은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가장 먼저 올라야 할 수정봉을 바라보니 산 전체가 거대한 빙벽처럼 느껴졌다. 택시기사는 우리에게 고개 뒤편으로 오르는 길을 알려줬다. 조금이라도 쉽게 산행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빙벽 대신 뒤편의 넓은 길을 택했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은 코스였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대간 마루금을 만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지도를 꺼내 방향을 살펴보고 나서야 산중턱 갈림길부터 반대로 걸었음을 알았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수승대 요수정에서 바라본 거북바위.

    왔던 길을 되돌아 걷다가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능선을 10여분쯤 올라서 겨우 백두대간 능선을 찾았다. 조금 편하게 가려던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른 셈이다. 수정봉에서 된새기매재를 지나 호절골재로 이어지는 길은 평탄한 코스였다. 눈만 아니라면 가볍게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에 눈이 흩 날리면서 길이 사라져버려 새롭게 러셀(Russell, 본래 제설차를 뜻하지만 맨 앞에서 눈길을 헤치면서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다는 의미도 갖고 있음)을 하다 보니, 평상시보다 시간이 2배 정도나 걸렸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비마저 시원치 않은 후배의 입에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삼봉산(1254m)은 조망이 뛰어났다. 북으로는 거창삼도봉과 대덕산이, 남으로는 덕유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산 전체가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덕유산을 보고 있자니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여암 신경준 선생의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무룡산(봉황산)부터 삼봉산까지가 덕유산이다. ‘크고 넉넉한 산’이라 해서 덕유산이라 했던가. 삼봉산을 끝으로 덕유산 자락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몹시 서운했다. 필자는 김정옥 시인의 ‘덕유산’을 읖조리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산은 자유다. / 몇 백 번을 만나도 붙잡지 않아 / 붙잡히지 않는 상큼한 자유다. /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고 / 헤어지고 싶을 때 헤어질 수 있어 / 부작용 없고 부담 없는 자유다. / 산은 자유다. / 속박당할 염려 없는 깔끔한 자유다.’

    삼봉산에서 하산을 시작할 무렵 한 무리의 산악회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전에서 왔다는 그들도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러셀을 양보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삼봉산에서 소사고개로 떨어지는 급한 내리막길에서 아마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지면을 빌려 앞에서 길을 만들어준 9명의 종주대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오후 1시30분. 예정보다 3시간이나 늦게 소사고개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온 종주자들은 매점 마당에 점심상을 차렸고, 우리는 옆쪽 나무 테이블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이 금세 살얼음으로 변할 만큼 추운 날씨였다. 필자가 오후 산행을 재촉하자 후배는 “더 이상 갈 수 없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냥 밀어붙이기엔 장비가 너무 부실했다. 아쉬운 이별이었다.

    그 대신 대전의 종주자들과 함께 대덕산을 넘어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도 회의 끝에 오후산행을 포기했다. 그들은 필자에게 포도주와 매실주를 권하며 “대덕산은 눈이 많다. 야간산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잔뜩 겁까지 주었다.

    이제 혼자 남았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필자는 음력 정월 초사흘에 맞춰 지어놓은 시산제 제문을 떠올리며 서둘러 거창삼도봉 자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삼가 엎드려 비옵니다”

    거창삼도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눈만 아니라면 30분이면 족할 거리였지만 1시간30분이나 걸렸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말처럼 여럿이 함께 걷다가 혼자 가려니까 힘이 곱절로 드는 것 같았다. 필자는 몇 번이나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끌렸지만 그때마다 “가자! 가자!”고 외치며 눈길을 헤쳐나갔다.

    거창삼도봉(1250m) 정상엔 똑바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카메라로 전경을 담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배터리가 방전됐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안부 쪽으로 내려서서 시산제를 준비했다. 본래 시산제는 유교식 제례를 따라 강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헌작, 음복, 소지 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혼자서 지내는 시산제인 데다 바람까지 불어 약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제물을 차리고 향을 피운 뒤, 큰 소리로 제문을 읽어 내려갔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으니…

    소사고개로 내려가는 측백나무 숲길.

    “유세차 단기 4337년 1월3일 불초 산꾼 육성철은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천지신명님, 삼도봉 신령님 전에 삼가 엎드려 비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산이 좋아 시작한 산행이 어언 스무 해로 접어드매 산에서 배운 것은 오직 하나, 넓고 큰마음이었습니다. (중략) 다가온 새해에도 모쪼록 안전하고 뜻 깊은 산행이 되게 하시어 불초로 하여금 산의 덕을 조금이나마 펼칠 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중략) 이제 한잔 술을 올리나니 천지신명, 삼도봉 산신령께서는 상향하여 주시옵소서.”

    시산제의 마지막 순서인 소지를 끝내고 제물로 썼던 막걸리를 한잔 따랐다. 입 속에서 얼음이 씹혔다. 들짐승을 위해 북어포를 눈 위에 던져놓고 서둘러 짐을 꾸렸다. 잠시 지체했을 뿐인데 해는 벌써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시산제 중반부터 조금씩 날리던 눈가루도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대덕산(1290m)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석양의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바람과 눈 때문에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어둠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다. 필자는 랜턴을 켜고 백두대간 표지에 의존해 하산을 서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길을 잃고 말았다. 표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고, 이따금씩 산짐승의 발자국만 보일 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좋지 않은 일은 한꺼번에 찾아온다. 우선 랜턴 배터리가 방전됐다. 추운 날씨 탓이다. 여분의 건전지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등산장비가 하나둘 문제를 일으켰다. 바위를 통과하다가 스틱이 부러졌고, 내리막길에선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아이젠 하나를 잃었다. 오후부터 조금씩 이상 징후를 보이던 등산화마저 방수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악전고투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싶었다. 필자는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한 발짝씩 전진했다. 이따금씩 백두대간 표지가 나타났지만 이내 놓쳐버리곤 했다. 아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서 조그마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만 아니라면 단숨에 내칠 거리였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은 산속의 나그네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엄습했다. 초콜릿을 잘라 입안에 털어넣었지만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 때 바위로 삼면이 가려진 안락한 쉼터 같은 곳이 나타났다. 저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잠시 일었다. 실제로 바위 곁에 몸을 기대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러다가 덜컥 겁이 났다. 수많은 조난사고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일시에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긴장이 되살아났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눈 속에 파묻혀 하산한 지 4시간여. 평탄한 능선이 끝나는가 싶더니 아래로 뚝 내려섰다. 무주-김천간 30번 도로가 지나는 덕산재였다. 긴 한숨이 터져나오면서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택시를 부르고 싶었지만 휴대전화 배터리도 방전된 지 오래였다. 필자는 잠시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무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절연휴였지만 지나가는 자동차마저 없었다. 그래도 넓은 아스팔트길이어서 산속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더 이상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지쳤을 무렵 불빛이 새나오는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 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필자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랫목에 요를 깔고 이불을 폈다. 그리곤 필자의 등산장비를 모두 들여놓고는 닭도리탕을 안주로 술상까지 차려냈다.

    “이곳을 거쳐간 산꾼이 많으니 걱정하지 마소. 그냥 하룻밤 묵어가시오. 돈 받을 생각이면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으니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소.”

    그러나 어찌 빈손으로 받아만 먹을 것인가. 필자는 배낭 속의 과일과 술을 꺼내 할아버지께 드렸다. 할아버지는 필자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70년 세월의 희로애락을 풀어냈다.

    “일본에서 UN군으로 차출돼 6·25전쟁에 참전했다네. 인형공장을 운영하면서 5남매를 대학에 보내고, 10여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혼자서 과수원을 가꾸고 있는데….”

    다음날 아침, 필자는 화장실에 가려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멀리 대덕산이 보였다. 밝은 날 보니 산은 지난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당초엔 이 날도 계속 산행을 할 계획이었지만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무리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 이상 민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챙기는데, 할아버지가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남의 집에 와서 아침도 들지 않고 가는 결례가 어디 있나? 아무리 바빠도 해장은 하고 가게나.”

    할아버지는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닭도리탕을 안주로 소주와 막걸리를 차려냈다. 그러고는 수건에 물을 묻혀 주시면서 “우리 집에는 수도가 없어. 먼 길을 가야 하니 이걸로 세수라도 하게”라고 말했다. 막잔을 비울 무렵 택시가 도착했다. 할아버지는 택시기사에게 “잘 모셔다 드려야 한다”며 수차례 부탁하고 돌아섰다. 필자는 함박눈을 맞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금평리를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월1일 새벽. 김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주행 버스를 탔다. 승객은 필자를 포함해 2명. 필자의 옆에 앉은 40대 중반의 여성도 등산복 차림이었다. 필자가 “어느 산을 가느냐”고 묻자 “덕유산에 코스 답사를 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회원이 200명 정도 되는 여성산악회의 회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산을 주제로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새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실감났다. 경기도에서 자란 필자는 경기도의 산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고, 산악회장이라는 중년 여성은 자신의 집에서 가까운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에 자주 오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우리는 내 집의 보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남의 집 물건만 열심히 보러 다닌 셈이다.

    오전 8시, 다시 덕산재에 섰다. 1주일 전에 비해 추위는 누그러들었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대간으로 들어서자 앞서 간 발자국이 하나 보였다. 눈이 무릎까지 빠질 지경이었지만 누군가 지나간 발자국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김천과 무주를 연결하는 부항령을 지나 야트막한 오르막에 이르자 40대 초반의 등산객이 보였다. 그가 바로 발자국의 주인공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필자와 똑같이 2003년 10월3일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진도는 필자보다 두 배나 빨랐다. 부산에 산다는 그는 매주 산행을 하는데 폭설 때문에 덕산재-우두령 구간을 빼놓았다가 이번에 보충하는 중이라고 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이번에는 필자가 앞에서 러셀을 했다. 그러자 1주일 전처럼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170m봉을 지나 목장지대를 통과하다가 눈 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정말이지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은 더 걷고 싶지 가 않았다. 부산 아저씨는 서둘러 우두령까지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필자는 이미 이때 코스를 단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삼도봉에서 미니미골까지

    삼도봉(1176m)으로 가는 길은 긴 오르막이라서 지치기 쉬운 코스다. 하지만 멀리 서쪽으로 시원하게 솟아오른 민주지산과 석기봉이 있기에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민주지산은 비록 백두대간 줄기에서는 살짝 비켜서 있지만 산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산으로 유명하다. 산 이름은 ‘산세가 민두름(밋밋)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운산으로 기록돼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영남과 호남, 충청의 경계는 삼도봉이다. 하지만 언어·풍습·음식 등 문화적 분기점은 민주지산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삼도봉이라는 이름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는 지리산 화개재와 임걸령 사이에 있는데 이곳은 전남 구례, 경남 하동, 전북 남원의 분기점이다. 두 번째는 소사고개와 대덕산 사이에 있는데 이곳은 경북 김천, 경남 거창, 전북 무주의 갈림길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민주지산 자락에 있는 삼도봉으로 충북 영동, 경북 김천, 전북 무주의 경계선이다. 충청·호남·영남을 삼도로 이해한다면 마지막 삼도봉이 실질적인 삼도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에는 삼도의 화합을 기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10월10일이면 ‘삼도봉 만남의 날’ 행사가 열린다.

    삼도봉 아래쪽 안부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필자와 부산 아저씨는 영동 물한리계곡 쪽으로 내려섰다. 이 코스는 길이 평탄하고 계곡의 풍광도 아름답기 때문에 삼도봉이나 민주지산 등반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이 길을 우습게 여겼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물한리계곡은 일기변화가 극심해서 순식간에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일도 허다하다. 이 때문에 1998년에는 국군 특수부대 장병들이 동계훈련 도중 집단 동사한 일까지 있었다.

    물한리계곡은 흔히 미니미골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니미골에는 후방에서 고립된 인민군 1개 사단과 빨치산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밤낮으로 계속된 포격으로 전원 몰살당했다고 한다. 미니미골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 할아버지는 “인민군 시체가 계곡을 뒤덮었다”며 끔찍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미니미골도 지금은 전국적인 관광지다. 쭉쭉 뻗은 침엽수림과 굴곡이 완만한 계곡은 가족나들이 코스로 손색이 없어 여름철이면 넓은 주차장에 차댈 곳이 없을 만큼 인파로 붐빈다고 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