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봉산에서 바라본 대덕산 전경
그해 5월 한국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단법인 대한지리학회가 주최한 춘계학회가 바로 그것. 이 자리에서는 한국의 산을 주제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됐는데, 상당수는 백두대간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새삼 백두대간에 관심을 갖고 종주 계획을 세우게 된 것도 이때 발표된 글 때문이었다. 각론이 궁금한 분은 당시의 발제문을 정리해 출간한 ‘백두대간의 자연과 인간’(산악문화)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최근 백두대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 언론과 환경단체의 노력이 컸다. 환경부가 2002년 실시한 백두대간에 대한 중요도 조사(5점 척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조사결과 한국인들은 ‘백두대간이 생물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다(4.24)’고 응답했고 풍수지리적 관점(4.14), 역사지리적 관점(3.89), 문화적 관점(3.5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생동물의 희생과 희귀생물의 멸종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강추위, 폭설 그리고 山行
2004년 1월23일, 음력으로는 정월 초이틀.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남쪽으로 밀려내려오면서 한반도 전역은 영하 20。C의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었고 설상가상으로 남부지방에는 폭설까지 퍼부었다. 평소 같으면 무덤덤하게 남편을 떠나보냈을 아내도 이날만큼은 걱정이 많은 표정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방한장비를 꼼꼼히 점검하며 산행을 연기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을 정도. 하지만 필자에겐 꼭 설날 연휴에 백두대간에 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산꾼들은 보통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사이에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시산제란 산신제의 일종으로 한 해 동안 안전한 산행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동안 필자는 남들이 지내는 시산제에 참석한 적이 있을 뿐, 직접 시산제를 지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마당에 시산제를 올리지 않는다면 왠지 불경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출판기획자 김준영씨에게 제문 초안을 부탁해 시산제를 준비했다. 비록 제물에 돼지머리가 빠져 아쉽기는 했지만 북어와 삼색 과일, 탁주와 떡을 정성스레 챙겼다.
이번 산행에는 대학후배 손석현씨가 동참했다. 눈길을 걸어야 하는 고된 산행인 만큼 동반자가 있다는 것은 더없이 든든한 일이다. 아침부터 서둘렀지만 점심 무렵이 돼서야 거창터미널에 도착했다. 백두대간에 오르기엔 이미 늦은 시각. 우리는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신원면으로 향했다. 삼남지방치고 어지간한 사연 하나 없는 동네가 어디 있을까마는, 그 중에서도 거창군 신원면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으로 꼽힌다. 1951년 2월에 발생한 양민학살사건을 두고 하는 얘기다.
낮에는 국군의 명령에 따르고 밤에는 빨치산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한국전쟁 후반부, 남한정부와 국군은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빨치산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계획했다. 당시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이 내린 작전명령이 ‘견벽청야(堅壁淸野)’. 이것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아군의 성은 굳건히 지키되, 포기할 곳은 모두 정리하는 초토화 작전’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 700여명이 ‘통비(通匪)분자’라는 이름으로 거창군 신원면 신원중학교로 끌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희생자 719명 가운데 14세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는 359명이라고 하니 전쟁의 광기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뿐인가.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려 했고, 당시 작전을 수행했던 군인들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은 채 공직에 복귀했으며,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합동위령비마저 땅 속에 파묻어버렸다 참으로 우리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