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믿음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의 삶을 마무리하고 떠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자기들이 못다 한 사랑을 해주리라는 믿음, 진실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 주리라는 믿음, 서로가 서로를 믿고 받아주리라는 믿음,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를 때까지 이곳에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리라는 믿음 말이다. 그리고 그 믿음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나 그대 믿고 떠나리’
며칠 전 미국의 거버 박사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1950년대에 아이오와주립대에서 아버지를 가르치고 퇴임 후 1980년대에는 뉴욕주립대에서 나를 가르친 아버지와 나의 공동의 은사이시다. 올해 91세이신데 아직도 정정하시지만 가끔은 건망증이 심하다. 이번에 전화를 드리니까 아주 반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아, 왕록아, 오랜만이로구나. 그런데, 영희가 죽은 지 몇 년 되었지?”
“선생님, 이름을 바꿔 기억하시네요. 제가 영희고 저희 아버지가 왕록이시죠.”
내가 대답하자 거버 박사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참, 그렇지. 미안하다. 너희 둘은 모습도 많이 닮았고 말하는 것, 생각하는게 너무 닮았거든.”
또 지난번에는 학회에 갔더니 아버지 친구 되시는 교수님이 나를 찬찬히 뜯어보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 선생은 신촌 로터리에 갖다놓아도 대번에 장왕록 교수 딸인 줄 알겠소. 어찌 그렇게 눈매가 꼭 닮았는지. 지난번 연하장 쓴 것 보니까 필체까지 닮았더군.”
이렇게 누가 보아도 아버지와 모습이 닮은꼴이라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의 재능, 부지런함, 명민함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다. 아버지 가신 지 꼭 10년. 올 여름에는 10주기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다. 기념으로 아버지와 내가 쓴 글들을 함께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낼 계획이고 내가 앞으로 정년퇴임하면 아버지의 호를 따서 ‘우보 번역연구소’를 운영하고 싶다.
아버지의 재기발랄함과 부지런함을 갖추지 못한 내가 감히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힘겹게만 느껴지지만, ‘내 뒤를 잇게 해야지’ 하셨던 아버지의 말씀대로, 신탁처럼 운명처럼 나는 아버지가 가셨던 길을 그대로 간다. 누가 말했던가, 사랑받는 자는 용감하다고. 아니, 사랑받은 기억만으로도 용감할 수 있다고. 나는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이 ‘큰 세상’에서 용감하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나가며 아버지의 영원한 공역자, 공저자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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