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이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끔찍한 세상으로 변할 겁니다. 사람이 음악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음악은 신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교수의 인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정돼 있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재형씨(작고)이고, 아버지는 서예가이면서 전각가인 심당 김제인 선생이다. 심당 선생은 고전적인 서예가이면서도 서양음악을 사랑했다. 플루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처럼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인지 김 교수의 예술적 감각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음악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도 뛰어났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의 인생항로를 음악으로 이끌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김 교수의 손에는 바이올린이 들려졌다. 이때부터 그는 4줄의 바이올린 현으로 자신의 인생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1969년 독일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함부르크국립음악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학중 쾰른실내악단 악장을 맡아 유럽과 미국순회 공연에 나섰고, 졸업과 동시에 북독일방송교향악단, 베를린방송교향악단 단원으로 활약했다. 부인 윤미향(한양대 음대) 교수를 만난 것은 함부르크국립음악원 시절이다. 윤 교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의 독주회 때마다 피아노 반주자 겸 신랄한 비평가로 그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한편 1979년 귀국하면서 국립교향악단 악장으로 영입된 그는 당시 활동이 중단됐던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창단했다. 이 합주단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5년 스승인 전봉초 교수가 만든 실내악단. 김 교수는 창단 당시 악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실내악단은 1975년, 전 교수가 서울대 음대 학장이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김 교수는 이때 유학중이었다.
귀국 직후 서울대 음대 교수와 학장, KBS 교향악단 악장 등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가 바로크합주단을 이끌어오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크합주단은 내 음악생활의 분신이나 다름없어요. 실내악은 섬세하고 정교한 연주형태예요. 담백하면서도 투명한 음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장르죠. 그동안 국내에는 제대로 된 실내악단이 없었어요.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했지요. 국내 실내악의 대중화와 함께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수십 년 동안 해온 작업들이 이제 완성단계에 이른 것 같아요.”
바로크합주단은 매년 4회의 정기공연과 20~30여차례의 비정기공연을 갖고 있다. 18회에 달하는 해외공연에서는 격찬을 받기도 했다. 창단 4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5개의 세계 유명 국제음악페스티벌에 참가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