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6-01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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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수씨를 아차산에 ‘미친’ 재야사학자로 만든 것은 조그마한 돌무지였다.
    • 줄을 이은 돌무지는 아차산이 바로 고대 삼국이 그토록 차지하려고 애쓴 요충지였으며, 고구려 장수 온달이 전사한 곳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품고 있었다.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아차산 산신령이 아차산성 앞에 섰다. 산신령다운 체구에 산신령다운 표정에 산신령다운 음성이다. 잡다한 췌사(군더더기 말)는 빼기로 하자. 시간이란 게 뭐며 더구나 1000년의 시간이 나와 당신에게 얼마나 아득한 추상인지는 논외로 치기로 하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나고 죽었으며, 여기 엄연하고 오롯하게 남은 돌더미들 위로 인간의 이야기가 어떻게 켜를 이루며 쌓였을지, 거기 새삼 무슨 감상을 덧붙이지도 말기로 하자.

    재야사학자라 불리는 김민수(56) 선생은 아차산의 석성을 맨처음 발견한 후 고향도 아니고 친분도 없던 아차산에 그의 인생 후반부를 완전히 투척하고 몰입해버린 사람이다. 산불을 끄러 민방위대원 자격으로 아차산에 올랐던 1989년 이후 그는 지금껏 아차산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밤낮 없이, 아차산을 종횡무진 누빈다. 직업을 버리고 돈벌이도 포기했다. 명예 따위를 염두에 둔 건 더구나 아니었다. 사회 일반이 쫓는 성취의 기준을 외면하고 한 곳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흔히 ‘미쳤다’고 하는데, 그는 말하자면 아차산에 ‘미친’ 사람이다. 아차산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지고 두드리는 그의 모습을 이 동네 사람들은 산신령의 출몰로 이해한다. 산신령이란 게 뭔가. 산신령이란 본질적으로 이야기꾼이 아닌가. 폴 오스터의 말대로 이야기란 인간 운명의 증언이고 그게 모이면 곧 역사가 된다. 오랜 세월 그 인간 운명의 추이를 지켜봐온 산신령은 최상의 역사 증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선 그 산신령의 증언부터 듣기로 하자

    “이게 아차산성의 서북벽입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걸 15년 전 산불 끄러 올라왔다가 내가 처음 발견했습니다. 돌덩이가 자그마하지요? 고려나 조선에 오면 성벽의 돌이 커집니다. 성을 부수는 표차라는 무기가 생겼는데 그걸 막으려니 커졌던 거지요. 이곳이 이성계가 쌓은 조선성이라는 건 그래서 말이 안됩니다. 성벽 아래로는 층계처럼 돌을 쌓았지요? 뒷물림 쌓기라고도 하는 이 보축성은 고구려 양식입니다. 고구려는 구조물을 만드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나라였어요. 국내성도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쌓은 걸 확인했습니다. 지금까지 백제의 성이라는 설이 유력했는데 발굴하다 보니 백제 것은 없고 신라로 추정되는 유물만 잔뜩 나왔어요. 아차산성은 신라가 고구려 양식을 배워서 쌓은 석성입니다. 구리시 문화재 대장에 보면 아직도 토석 혼축성이라고 나와 있어요. 처음 발견 당시 돌 위에 흙더미가 무너져 있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던 거지요. 하지만 보세요, 완벽한 석성 아닙니까. 석성은 건설장비가 상당히 발달하지 않고서는 쌓을 수가 없습니다. 토성이 오막살이라면 석성은 맨션아파트지요. 석성을 쌓을 수 있는 기술력을 가졌다는 것은 서양의 폴리스에 해당하는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북한산’이라고 쓰인 명문기와가 다량 발굴되었습니다. 신라의 북한산은 바로 아차산이었다고 내가 전부터 주장해왔는데 유물발굴로 그게 증명된 거지요. 현재의 북한산은 조선 때까지 줄곧 삼각산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차산은 신라의 북한산성

    지금까지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온다. 지금껏 우리 역사학계는 그의 발로 뛴 연구를 기본기도 못갖춘 아마추어의 헛소리라고 외면해왔다. 그러나 차츰 아차산 산신령의 울끈불끈한 듯 보이는 가설이, 면밀한 사료검토와 치열한 필드워크를 거친 과학적인 주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유물에서, 혹은 옛 문헌에서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섬세한 실마리들이 드러나 그 끝을 파헤쳐 가면 언제나 김민수 선생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곤 했다. 그가 시도한 역사적 고찰 중 대표적인 것으로 온달의 전사지를 밝혀내는 작업이 있다.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이 바로 이 아차산성이라는 주장인데, 이젠 학계에서도 대체로 그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아차산이 신라의 북한산성이라는 것이 인정되면 지금껏 해명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게 됩니다. 삼국의 지도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알다시피 영양왕은 온달의 처남이었어요. 삼국사기 열전편에 보면 평강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장군이 한북의 옛 땅을 찾아오겠다며 남하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달이 아차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전쟁터로 달려와 어루만지자 비로소 움직였다는 얘기도 있지요. 고구려는 신라와 몇 번 큰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영양왕 때의 전투는 딱 한번뿐이었어요. 이때 신라 진평왕은 한강 하류의 거점인 북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손수 1만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와 고구려를 대패시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본기에 나옵니다. 그때 고구려의 고승장군이 전사했다고 하거든요.

    역사상 온달이란 이름은 많습니다. 전국적으로 온달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만도 25군데나 되지요. 널리 알려져 있는 것만 살펴봐도 단양에 온달산성이 있고 영월에 온달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터가 있으며 익산 미륵사지에 온달이 갖고 놀았다는 공깃돌이 있고 이천에 또 온달의 싸움터가 있거든요. 溫은 ‘옛’이란 의미이고 達은 多와 같이 ‘땅’이란 의미의 차음문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옛 땅을 찾은 장군은 모두 온달로 불려졌다고 유추해볼 수 있죠.

    그러나 우리가 찾는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 온달입니다. 영양왕 때 사람이어야 하고 신라와 싸웠어야 하죠. 그게 바로 기록에 나오는 고승장군입니다. 온달의 이름이 바로 고승이었고 온달이 싸우다 죽은 곳이 아차산성이었다면 진평왕이 1만 대군을 이끌고 지키러 온 북한산성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죠. 다행히 여기서 北자와 漢자와 山자가 쓰인 기왓장이 다량 채집되어 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역사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증할 수 있는 유물이 없으면 소설 쓰기밖에 안되거든요.”

    거침없고 당당한 말투다. 문헌을 뒤지고 현장을 샅샅이 밟고 다니다 보면 논리로 설명이 안되는 암시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상상력이나 이미지가 학문이 될 수는 없다. 예지력을 현실화하는 유물이나 문헌이 발견돼야 증명이 가능해진다. 그가 아차산에 미쳐버린 것, 마침내 산신령이 되어버린 것, 고대사 연구 외에는 다른 염을 일체 품지 않은 것, 그 비밀이 바로 그 지점에 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남달리 빼어난 감각이 시키는 대로 역사 이미지를 찾아가 보면 증명 가능한 유물이 기다렸다는 듯 발굴되어줬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신비가 마치 그의 손길에 목말랐다는 듯 번번이 해맑은 얼굴을 드러냈다. 고대사 연구는 고구마 넝쿨이 서로 얽히듯 한 의문이 다른 의문과 줄줄이 연관된다. 역사적 진실이 한 가지 밝혀지면 거기 잇달아 또 다른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역사기록에 끊임없이 의문 제기

    김민수 선생이 밝혀낸 연구 중에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 루트 재검토’라는 게 있다. 그는 한강을 따라 그 물길을 차근차근 발로 밟았다. 한강 하류에서 충주까지 남한강을 따라 강 이쪽에서도 걷고 강 저쪽에서도 걸었다. 서울에서 김포까지도 걸어봤다. 실제 그 길을 한발한발 걷는 것은 책상 앞에서 사료를 뒤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그 시대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의 심리가 생생하게 짚어졌다. 물길과 벼랑과 굽이와 마을을 지나면서 숱한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한 노역을 주류 역사학자에게서 기대한다는 건 왠지 부자연스럽다.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은사나 선배의 연구방식을 답습해야 하고 그러는 중 논문 쓰는 방식이 굳어버릴 우려가 있지요. 내가 역사학을 독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너지 아세요? 용어였어요. 똑같은 것도 계보에 따라 다르게 말해요. 세형동검, 좁은 놋당검, 한국형 동검이 결국 같은 말이거든요. 알고 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요즘은 논문에 쓰는 용어만 봐도 출신학교를 금방 알 수 있어요. 내가 정식으로 학위를 받고 기성학계 한 귀퉁이에 끼여들기를 원했다면 이런 논문들은 아마 쓰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한강에서 금강까지, 다시 서울에서 김포까지 발이 닳도록 쏘다닌 이유는 어디 있을까. 역사기록을 당연시하지 않고 거기 나타난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서다. AD 660년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정벌한다. 당의 소정방은 18만 수군을 이끌고 서해안 덕적도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신라의 5만 대군은 지금의 이천이라고 일컬어지는 남천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신라 태자 법민(무열왕의 아들, 후에 문무왕)은 6월23일 미리 소정방을 찾아가 7월10일 백제의 남쪽에서 만나자는 작전을 짜고 돌아온다. 재야사학자 김민수는 이쯤에서 면밀하게 계산을 시작한다.

    ‘태자 법민이 덕적도에서 남천까지 돌아오는 데는 하루가 걸릴 것이다. 급히 신라군을 정비해 출정시킨다 해도 다시 하루는 족히 걸릴 것이다. 신라군은 남은 15일 동안 남천에서 백제의 도성 부여를 우회하여 그 남쪽 황산벌까지 진격해야 한다. 나당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백제는 방어 전략에 몰두할 텐데 아무 저항 없이 신라의 5만 대군을 이끌고 과연 보름 만에 황산벌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시 신라는 백제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쯤에서 무릎을 탁 친다. 신라군은 육로로 간 게 아니다. 신라군도 당과 마찬가지로 수군이었다! 그런 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그는 뙤약볕과 으스름을 마다 않고 한강변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신라군은 가다가 황산벌 전투를 치르느라고 소정방과의 약속에 하루가 늦었어요. 그 일로 소정방은 신라군의 선봉장을 참수하려고 해요. 이때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를 몰라서 저런다고 항변하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황산벌이 지금의 논산이라면 지척에 있었던 당군이 몰랐을 리가 없지요. 삼국시대 말기에도 포차와 대포가 있었으니 소리가 요란했을 테고 패잔병이나 피난민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몰랐다는 건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아차산에서는 ‘고대사의 보고’라 할 만큼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황산벌이 논산이 아닌 경우를 가정해보다가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됐어요. 신라군이 비껴간 지명으로 ‘탄현’이 나옵니다. 지금 SBS 촬영소가 있는 데죠. 그리고 지금의 일산 신도시를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계백현이라고 표기하고 있어요. 신라 수군을 저지한 계백현의 장군이 바로 계백장군 아닐까요? 신라수군은 아차산성(북한산성)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쳐 서해로 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는 길에 계백과 황산벌 전투를 치른 거지요. 황산이란 지명도 온달처럼 고유명사가 아니에요. 하남시의 황산, 익산시의 황산, 경주시의 황산처럼 여기저기서 같은 지명이 발견되고 있죠. 모두 큰 강의 강변을 가리키는 말로, 요즘으로 치면 고수부지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아니었을까요?

    또 하나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의 조카인 반굴과 관창이 전사하는데 태종무열왕은 두 화랑을 위해 장의사라는 절을 짓는다고 나와 있어요. 그 장의사가 충남 논산에 있지 않고 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 안에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지금 장의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235호로 지정되어 황산벌이 한강 하구에 있었음을 증언하는 말없는 증표가 되고 있습니다.

    한편 온달이 이끌고 내려온 고구려 군사 또한 육군이 아니라 수군이었어요. 고구려가 한강 하류를 공격한 전략들은 다 수군 기습작전이었죠. 육로로는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군사가 재빨리 움직일 수 없습니다. 평강공주가 전사한 온달을 보러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대동강에서 돛단배를 타면 4시간 만에 한강 하류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한강 하류는 단양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아차산이고 그게 신라의 북한산성이었다는 거죠.

    고승장군이 온달이라는 방증은 또 있어요. 온달전에 보면 평강공주에게 상부 고씨에게 시집가라고 했더니 싫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오거든요. 당시에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랬을 뿐 결국 공주는 고씨(고승장군)에게 시집갔을 겁니다.”

    아차산공원 안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조각상이 서 있다. 평강공주 옷에 달린 고름을 보더니 그는 마치 고구려를 실제 살았던 사람처럼 말했다.

    “엉터리예요. 고구려 여자 옷에는 고름이 없었어요. 무용총 벽화에서 보듯 앞섶을 비스듬히 여미게 되어 있었지요. 온달전에 나오는 대로 풀이해보자면 평강공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여성이었어요. 첫째 자기가 원하는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 둘째 완벽한 계획과 인내와 노력으로 남편을 성공시켰다는 점. 우리 역사에 자식을 성공시킨 어머니의 예는 흔해도 남편을 성공시킨 경우는 평강공주가 유일하지 않습니까? 셋째 남편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몸소 전쟁터까지 달려올 만큼 정열적이었다는 점. 온달의 관 앞에서 평강이 했다는 말도 멋이 있어요. 시신 앞에서 울부짖는 대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저와 함께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했다지요.”

    대학, 군대, 교직

    그는 제주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구한말 제주섬 최고의 갑부였다. 할아버지가 육지에서 말총 장사를 해서 번 돈을 머슴 10명에게 지워 제주로 돌아오다 산적을 만났다고 무거운데 차라리 잘됐다며 몇 짐 나눠줬다는 설화 속 영웅전설 같은 이야기를 노상 들으면서 자랐다. 집 앞에는 말이 돌리는 연자방아가 세 대나 있었다. 전용방앗간인 셈이었다. 거기서 찧은 쌀로 술을 담가 술독만 묻는 집도 따로 한 채 있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 성정이 야무지지는 못했다. 떡대가 워낙 커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실은 내성적 기질의 소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남의 눈에 두드러지기를 원했다. 그런 내부적 모순이 늘 괴로웠다. 삼국지 같은, 숱한 영웅들이 출몰하는 소설에 열광했다.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싹이 튼 건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고3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낙심하고 절망해서 방황깨나 하고 돌아다녔다. 살림이 넉넉했으니 대학은 서울로 유학 왔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우리 것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갸륵한 뜻에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고 싶었다.

    그는 일생에서 가장 유용한 지식을 대학보다 군대에서 배웠다. 입대한 부대는 오대산 월정사에 파견 나가 일하는 공병대였다. 대관령 고갯길을 그의 부대원들이 다 닦았다. 그는 작전과의 현황병이었으니 민간 건설회사의 건축공사를 감리해주는 군인이었다. 지금과 달라 월정사는 심심산골의 사찰이었다. 호랑이가 나온다고 종을 치면 예비군들이 우르르 출동하곤 했다.

    거기서 그는 일생 잊지 못할 선승 한 분을 만나게 된다. 승복도 안 입고 언제나 비를 들고 마당을 쓸고 다니며 남루한 행색으로 탁발을 하는 그분을 처음엔 승려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 스님은 어린 사병 김민수에게 평상심 속에 초월이 있다는 것을 말없이 가르쳤다. 참자유의 지경이 어떤 것인지를 잠잠하게 보여주었다. 제대를 앞둔 어느 날 스님께 그가 물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스님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선한 인연을 맺어라.” “어떤 것이 선한 인연입니까?” 스님은 그를 하룻밤 곁에 두고 사람 보는 법을 일목요연하게 가르쳤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의 눈을 보고 판단하라는 것이었다.

    졸업한 후 제주로 내려와 신성여고의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신들린 것 같은 놀라운 예지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생을 앞에 두면 그의 미래가 훤하게 보였다. 나는 김민수 선생의 신성여고 시절 제자 몇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김민수 선생이 수업시간 언뜻언뜻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몇 가지.

    “선생님이 나더러 나중 남자형제에게 큰 것을 나눠주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내가 돈을 많이 벌어 우리 오빠를 도와주려나보다 생각했었는데 작년에 신장 하나를 오빠에게 떼어주는 수술을 하면서 ‘아, 바로 이거였구나’ 싶데요.”

    “선생님이 너는 결혼해서 섬에 살 거라고 하시데요. 제주를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을 때라서 ‘천만에’ 싶었는데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섬이잖아요.”

    그렇게 남의 미래가 환하게 투시되는 예지력은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쉽게 피할 수도 없었다. 그 무렵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정하던 그는 길을 가다 집채만한 구렁이 한 마리를 죽이게 됐다. 이후 밤마다 꿈에 뱀이 보였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을 만큼 온몸이 뱀에게 친친 감겨 진땀을 흘렸다. 만 2년을 고생하고 나서야 뱀이 그를 놓아줬다.

    “워낙 내 사주가 세서 그쯤에서 뱀이 자발적으로 물러나준 걸 겁니다.”

    고대사로 이끈 아차산 돌무지

    교사직을 그만뒀다. 대신 군대에서 배웠던 건축일을 시작했다. 집도 짓고 학교도 짓고 관공서 건물도 지었다. 돈이 무섭게 벌렸다. 하도 돈이 들어와 겁이 날 지경이었다.

    “희한하지요. 돈맛을 들이자 신통력이 사라지는 거였어요.”

    조부를 닮아설까, 그는 사업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손대는 족족 성공이었다. 잘나갈 때 결혼도 했다. 그러나 육지여자인 아내는 제주섬을 답답해했다. 아내의 소원대로 서울로 이사를 하고 천호동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등산을 좋아해 서울 와서도 산에 자주 올랐지만 마주 보이는 아차산은 저것도 산이냐며 가소로워했을 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산불을 끄러 처음 산에 올랐다. 진화작업의 와중에서 심상찮은 돌무더기를 봤다. 줄을 지어 이어졌다. 의아했다. ‘이 꼭대기에 웬 돌무지가?’ 산마루에 다다른 돌무지는 움푹 파인 큰 구덩이와 연결되었다. 더욱 기이했다. 이건 사람이 쌓은 것이다! 언제 만들었을까. 누가 만들었고 왜 만들었을까. 아차산성? 이것은 옛날의 방어시설임에 분명하다!

    그날부터 그는 아차산에 들러붙었다. 아니 아차산이 그를 자석처럼 빨아들였다. 지금껏 살아온 모든 과정, 교사도 건설일도 돈벌이도 서울 이주도 모두 아차산이 그를 한걸음씩 불러들인 계략 같았다. 당장 강을 건너 아차산 아래로 이사했다. 산을 한달음에 오를 수 있는 구의2동이었다. 그는 그 집에서 지금껏 한번도 이사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집에 눌러 산다.

    아차산엔 발에 채이는 게 돌이다. 그날 진화작업에 참여한 민방위대원이 어디 그뿐이었을까. 그러나 열을 지어 쌓여 있는 돌더미를 운명의 계시로 받아들인 건 김민수뿐이었다. 역사에 관심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타고난 정열, 키 176cm에 몸무게 78kg의 튼튼한 체력, 의문을 끝까지 파고드는 탐구심, 번갯불에 세상이 언뜻 모습을 드러내듯 가끔 선연하게 드러나는 예지력, 그리고 우리 누구나 그렇듯 마음 바닥에 깊이 똬리 틀고 있는 본능에 가까운 애국심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아차산에 미쳐버렸다. 날마다 산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산마루의 돌무지, 거기 잇댄 병영지, 계곡을 막은 차단성, 무너진 석탑의 석대들, 폐허가 된 절터, 돌무덤의 유구(遺構)들, 용도를 알 수 없는 건축지. 그런 것이 신기루같이 눈앞에 하나씩 나타났다. 이게 뭔가. 왜 내 눈에 띄는가. 신들린 사람처럼 삼국사기를 읽었다. 밤새워 삼국유사를 읽었다. 토기 조각을 들고 서울대 박물관으로 뛰어갔다. 고대사에 관한 기록을 뒤지고 또 뒤졌다. 어려운 한문들이 그에게 아주 쉬운 글자로 변해갔다. 그것만으로 여념이 없었다. 뒤돌아볼 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 생업을 버렸다.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아들 둘과 아내 네 식구 먹고 살 돈은 그동안 실컷 벌어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실컷 벌어놓긴 뭘 벌어놓습니까. 하남에 밭을 한 뙈기 사놨는데 거기서 미나리 농사도 짓고 돈이 정 급하면 건설현장 막노동도 하고 나중에는 민방위교육장에서 강연도 하고 그랬지요.”

    ‘아차산 산신령’ 김민수 “고구려사가 발에 채이는 돌이더냐”

    신라의 북한산성인 아차산성 서북벽. 이것이 김민수씨를 아차산에 ‘미친’ 재야사학자로 만들었다.

    자료를 뒤지고 박물관을 찾는 중 아차산 유적이 고구려 유물이란 걸 알게 됐다. 아차산성이 신라의 북한산성이라는 것도 유추하게 됐다. 온달이 전사한 곳이 여기란 것도 추정하게 됐다. 그는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돌더미에 카메라를 댔다 뗐다 한 결과 1990년 1월 아차산에 오른 지 반년 만에 ‘아차산성의 재발견과 簡考’란 논문자료를 만들었다. 소리라도 치고 싶을 만큼 기뻤다. 그걸 들고 관계기관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문화유산을 찾아냈다는 자랑스러움은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 딱 알맞은 소재였다. ‘고구려? 그게 어느 집 개뼉다귀이며 설사 쓸 만한 뼈다귀라 한들 네가 그걸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란 반응들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자료들은 이미 일본사람들이 만든 ‘조선보물고분조사보고’에 다 들어 있는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게 보물임을 알고도 그렇게 흙더미에 방치한다고? 수많은 토기 파편들의 연대를 안다고? 산마루의 깊은 구덩이들이 무엇에 쓰였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그는 조금씩 싸움꾼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 싸움은 조용히, 시간을 오래 끌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짜 아차산 산신령이 그에게 산신령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가르친 지혜인지도 몰랐다.

    삼국의 접경지역, 아차산

    지금 아차산은 고대사의 보고로 공인받고 있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가 여기서 대치했고 그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던 접경지역임을 인정한다. 거기 만들었던 군사시설인 15개의 보루성, 재야사학자 김민수 선생이 그것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실측하고 세상에 알렸다는 것 정도는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다.

    “보루성은 광대토대왕과 그 아들 장수왕 때 이 지역을 차지했던 백제를 내쫓고 만든 고구려의 작은 성들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건 고구려 보루성들이 자기 나라가 있는 북쪽을 방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성들과 북쪽 고구려 사이에 어떤 세력이 있었다는 말일까요? 예전 삼국간의 싸움은 강싸움이었습니다. 단순한 땅 따먹기가 아니었단 말이죠. 예전에 강은 길이었고 생활터전이었어요. 사람이 살았던 곳이지 국경이 될 수는 없었거든요. 압록강이 국경이 되고 나일강이 국경이 되는 건 작전상의 개념이고 나중 국가 간 협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고대의 강은 군사지역이 아니라 인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도시였던 겁니다. 따라서 보루성도 고구려의 남쪽 성으로 국경이었다기보다 한강의 도항권(渡航權)을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요. 북에는 여전히 백제의 세력이 남아 있는데 고구려의 남진기지로 쓰기 위해 쌓았다는 말이지요.

    고구려의 남쪽 근거지가 한강유역이었다는 사실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항의하는 데 아주 좋은 역사자료가 됩니다. 남쪽으로 이렇게 권역을 넓혔으니 북으로도 그만큼 넓히지 않았겠느냐는 논리가 가능해지잖아요.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네 지방사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여기 한강 하류도 너네들의 땅이었단 말이냐고 반론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고대사 하는 사학자들의 수가 너무 적어요. 고대사를 연구해야 민족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어요. 정체성이란 게 뭡니까. 명분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일본, 중국에 눌리지 않아요. 다들 근현대사에만 매달리지 고대사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지금 중국으로부터 이런 말도 안되는 억지소리를 듣고 있는 거라고요.”

    고구려 장수왕이 위례성에 침입해 벌어진 7일7야의 싸움 끝에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붙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백제본기 개로왕조에 있다. 그 기록대로라면 개로왕은 현재의 서울 광장동 광진나루로 건너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당시의 아차산은 현재의 홍련봉이라고 추정된다. 여기에 백제 보루가 있기 때문이다. 광대토대왕비에 나오는 아단성도 바로 여기일 것이다.

    “아차산을 백제 다음으로 고구려가 정복했고 후에 신라가 차지하면서 현재의 성을 쌓아 북한산성이라고 불렀을 거란 말입니다. 그 순서는 확실한데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각축했던가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고대사의 난제입니다. 점차 유물을 발굴해나가면 드러날 일이지요.

    그런데 발굴만 해도 그래요. 지금 다 할 게 아니라 성격을 파악할 정도로만 하고 후손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인공위성으로 레이저를 쏴서 유물을 확인하는 기술이 생긴 마당에 우리 시대에 다 파헤쳐버려서는 안됩니다. 더 과학적인 발굴 기술이 생길 게 아닙니까. 후손을 위해 발굴을 미뤄둬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고조선은 은의 왕손이 만든 나라

    역사학, 특히 고대사를 다루는 사람의 시간은 일반인의 시간과 다르지 않을까. 만지고 들여다보는 돌과 유물과 기록이 1000년, 20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것들투성이니. 그 세월의 길이를 늘 명상할 수밖에 없을 테니.

    “애착을 객관화할 수 있게 돼요. 애착이란 게 별 겁니까. 핏줄에 대한 애착, 물질에 대한 애착인데 그걸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눈이 생겨요. 인간을 역사 속에 사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현실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되거든요. 밑바닥, 상층부의 사회적 계급이란 것도 각자의 역사 속 역할로 이해하게 되고. 사실 핏줄이란 것, 가계라는 것도 실체가 아니라 관념이고 일종의 종교거든요. 10대만 내려가도 자기 핏줄이란 없어요. 같은 지역, 같은 언어로 생활한다는 게 더 중요하지요.”

    김민수 선생은 어머니를 유난히 좋아했다. 어머니는 고향 제주에 사시다 아흔셋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는 역사의 개념을 다시 자각하게 됐다.

    “어머니가 거의 한 세기를 사셨어요. 고대사는 먼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우리 어머니 스무 명을 죽 세워놓으면 거기 바로 고조선이 있는 겁니다. 옷자락이 손에 잡힐 듯하더군요.”

    그에게 역사를 보는 시각틀을 바꿔준 사람은 어머니말고도 또 있다. 아차산은 이곳 워커힐 뒷산말고도 망우산과 용마산 일대를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었다. 망우산 한 고개에서 탑을 쌓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 80대 할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김 선생에게 1000년 시공의 크기가 손바닥 안으로 축약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전해주곤 했다.

    “움막에 살면서 30년 동안 거기서 탑을 쌓고 사는 노인이에요. 경남 김해에 살다가 올라왔다지요. 돌을 캐서 탑을 쌓는데 아무런 주저도 회의도 없어요. 그분이 탑 쌓는 자리가 바로 절터였어요. 탑 쌓을 돌을 캐다가 유물이 쏟아져 나왔거든요. 그 노인에게서 고조선과 현대가 잇닿아 있는, 그 시대와 지금의 시공간이 둘로 쪼개지는 게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라는 역사 이미지를 보곤 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요즘은 할아버지의 부인이 또 탑을 쌓고 계시지요.”

    세상에는 참 기인도 많다. 언제 그곳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시간과 공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 있는 듯하다는 그곳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주요한 논문 중에 ‘한사군 강역의 연구’라는 게 있다. 고조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있던 위치는 어디인지를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그때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 커다란 관이 두 개 놓여 있더군요. 거기서 상투를 멋있게 튼 키가 큰 사람들이 나와요. 하얀 옷을 입고 성큼성큼 걸어 내 앞을 지나가요. 고대의 왕이란 걸 알겠더라고요. 한 사람은 은나라의 상왕이고 또 하나는 그 아들 무경녹보였어요. 역사에서는 흔히 ‘백이’라고 부르는 인물이지요.”

    혼돈에 빠져 있을 때 그런 계시 같은 꿈이 보였다. 김민수 선생은 고조선을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생겼을 때 은의 왕손인 백이가 내려와 만든 국가라고 주장한다. 물론 꿈 때문은 아니다. 과학적인 실증을 하지 못하는 주장은 역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헌자료에서 그런 방증을 숱하게 찾아낸 기념으로 옛 왕들이 격려차 꿈에 등장해줬을 뿐.

    그에게 과연 인간은 정해진 운명의 틀 속에서 살다가는 건지 물어보자. 사람으로 태어나 기중 잘사는 법이 뭔지도 물어보자. 그는 어쩐지 삶의 해답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것 같다.

    “우주에는 물리적인 질서가 있어요. 우리 인간은 물리적인 것을 느끼지는 못하고 화학적인 것만 감지할 수 있지요. 물리적 질서 안에 화학적인 반응이 속해 있으니 우리가 느끼는 화학에도 질서가 있을 테지요. 잘사는 법을 요약하면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라. 그리고 그 행동에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는 집착하지 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것을 실천해왔다. 덧붙여서 그는 ‘생각은 날개이고 행동은 발’이라고 말했다.

    “발이 따라주지 않으면 날개는 추락해요. 그러나 내려앉는다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내려앉으면서 자아가 형성돼요. 무너지면서 기초가 단단해지는 거지요. 그러면 발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제주에 대한 글 쓰고파

    알 듯 모를 듯 선문답 같은 말들이지만 씹을수록 맛이 났다. 그는 “본능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산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사회 속에서는 그걸 통제하면서 살 수밖에 없으니 인간이란 참 갸륵한 존재”라고도 말했다. 그는 요즘 별일 없으면 밤 12시쯤 아차산에 오른다. 그 시간, 산의 호흡이 가라앉고 깊어지는 시간, 산에 들면 산기운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명징하게 감각한다.

    “우주가 내 안에 들어왔다 다시 풀려나간다고나 할까. 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기를 설명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무당이 밤에 산에 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고요.”

    재야사학자, 아차산 산신령 노릇을 그는 육십까지만 하려 한다. 가르치는 일과 건축과 역사공부는 어쩌면 그 이후를 위한 준비였을지도 모르겠다. 육십 이후는 또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고향 제주에 관해 글을 쓰는 일이다. 논픽션이든 역사든 소설이든 상관없다.

    “제주에는 굉장한 스케일이 있습니다. 선운대라는 할머니는 한라산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앞바다의 섬을 빨랫돌 삼아 슬슬 빨래를 비볐다지요. 아들을 500명이나 낳았고요. 그런 전설과 무속과 4·3사건으로 죽은 귀신이 우글우글하는 제주도 이야기를 글로 써볼 겁니다.”

    그가 실은 국문학 전공자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집단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라면 그가 새로이 시도하려는 작업 역시 결국은 역사가 될 것이다.



    그가 건장한 몸으로 저기 아차산을 비호처럼 올라간다. 바위와 풀을 스치듯 쓰다듬는다. 호랑이를 타고 산삼을 손에 들고 산신각에 의젓하게 좌정해 있던 산신령이 그림 밖으로 나온다면 바로 저런 뒷모습일 수도 있겠다. 온달, 바로 여기서 신라군의 화살에 쓰러진 온달이 1500년 후에 다시 벌떡 일어난다면 저렇게 아차산성을 뛰어올라갈 수도 있겠다. 뒤돌아보는 그의 낯빛이 과연 대춧 빛으로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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