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새재 조곡폭포.
청화산(984m) 정상에 이를 즈음 동쪽 하늘에서 해가 쑥쑥 치솟았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해가 떠오르는 건 순식간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어둠이 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놓치기 쉽다. 천지만물은 바로 이 순간 온 몸으로 빛을 빨아들이고 생기를 돋운다. 청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들녘의 봄은 이미 무르익었지만, 산중의 봄은 이제 한창이다. 소나무 사이의 공간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꽃이 더없이 반갑다. 청록과 진분홍이 이처럼 어우러지는 장면이 또 어디에 있을까?
청화산은 대야산(930.7m) 희양산(998m)과 함께 속리산-문경새재 구간을 빛내는 명산이다. 청화산은 대야산이나 희양산에 비해 산세가 부드럽고 난코스도 없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청화산 정상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선이자, 상주와 문경의 갈림길이다. 여기서 오른쪽을 내려다보면 원적사라는 절이 나온다. 신라 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로 불교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수도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87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청화산에서 갓바위재로 넘어가는 능선은 가벼운 산길이다.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편안하게 달려갈 수 있다. 간간이 암릉구간이 나타나지만 그다지 길지 않아 부담 없이 내칠 수 있다. 갓바위재 못미쳐 우뚝 솟은 봉우리에서 아래쪽을 내려보니 산자락을 뱀꼬리처럼 휘감은 길이 보인다. 어찌 보면 한반도 지도의 남쪽 모양과도 닮았다. 백두대간 주변에는 이처럼 기이한 형태의 길이 두루 펼쳐져 있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저 길까지 모두 밟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땀 속에서 꿈과 희망을
갓바위재를 지나치면 왼쪽으로 멀리 의상저수지가 보인다. 충북과 경북의 도계가 그 위를 지난다. 이곳에서 암릉을 기어오르면 바로 조항령(961.2m)이다. 이곳은 조망이 뛰어나 남으로 청화산, 북으로 대야산을 훤하게 감상할 수 있다. 산꾼들이 이런 자리를 그냥 두고 갈 리 없다. 정상의 표지석에 씌어진 한 줄 문구가 나그네의 피로를 거뜬히 풀어준다. ‘백두대간을 힘차게 걸어 땀 속에서 꿈과 희망을…. 아아! 우리의 산하!’.
백두대간은 조항령 북쪽으로 바위능선을 타고 뻗기 직전 뾰족한 바위들을 뿌려놓았는데, 이곳은 마귀할미통시바위로 알려져 있다. ‘통시’는 화장실을 뜻하는 영남지방의 사투리. 따라서 마귀할멈이 드나드는 변소처럼 으스스할 것 같지만 경치는 구김살없이 시원스럽다. 여유가 있다면 마귀할미통시바위 옆에 있는 손녀통시바위까지 둘러볼 만하다.
이밖에도 조항령에서 고모령을 넘는 길에는 다양한 모양의 바위가 줄지어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옛날 호랑이가 살았다는 집채바위와 제법 품위 있게 통과할 수 있는 대문바위 등이 눈길을 끈다. 옥의 티라고나 할까. 이 좋은 터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있으니, 마구 파헤쳐진 채석장이다.
고모령에서 밀재까지는 완만하게 올라섰다가 급하게 떨어진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으면 머지않아 밀재에 닿는다. 이곳에서부터 대야산 산행이 시작된다. 대야산은 바위산이라 할 만큼 암릉구간이 많다. 특히 대야산을 넘어 버리기미재로 가는 길에서는 상당한 체력소모를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대야산 정상에서 충분히 휴식하는 게 좋다.
대야산 정상에서 지도를 꺼내놓고 동서남북을 번갈아 바라보며 산세를 살피는데, 중년 남성 네 명이 가파른 북벽을 넘어 산 위로 올라섰다. 얼른 보아도 어지간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 중에는 네 번째 대간을 종주하고 있다는 분도 있고, 오랫동안 골프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종주대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관심사가 다른 그들이 대간을 걸으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다는 점이었다.
산에서 만나는 인연은 넘칠 때보다 모자랄 때가 많다. 얘기를 좀더 듣고 싶어도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고, 깊은 마음을 드러내자니 상대방이 여러모로 신경 쓰인다. 그래서 꼭 붙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하산길에 술 한잔을 청하곤 하는데, 이번처럼 마주보고 달리는 경우엔 그마저도 어렵다. 서로의 안부를 기원하며 돌아설 수밖에. 4인의 종주대는 떠나기에 앞서 필자에게 대야산-촛대봉 구간의 난코스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대야산의 바위에 취한 필자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