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나의 삶, 나의 아버지

정초마다 안방에 내걸렸던 아버지의 ‘윤정희 달력’|채윤희

  • 글: 채윤희 올 댓 시네마 대표

정초마다 안방에 내걸렸던 아버지의 ‘윤정희 달력’|채윤희

2/2
영화배우 중에서 윤정희씨를 특히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새해가 되면 윤정희씨 사진이 들어 있는 달력을 안방에 걸어놓아 어머니와 불화 아닌 불화를 일으키기도 하셨다. 요즘에야 잘 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유명 배우들 사진으로 만든 달력이 최고 인기였다. 여기에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윤정희씨 사진이 빠질 리 없었고, 아버지는 그 달력을 꼭 챙겨다가 방안에 걸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어머니의 눈총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 물론 아버지는 영화배우 윤정희도 좋아하셨겠지만 그보다는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셨기 때문에 영화배우들의 사진이 실린 달력을 걸어놓으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소년 같은 감수성을 어머니는 충분히 이해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간혹 예쁜 여배우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몇 번 내비치기는 했지만 달력만큼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어머니가 좋아하던 배우의 사진도 그 달력 어느 페이지엔가 숨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윤정희씨가 웃고 있는’ 한 달만 참아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도 실컷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것들을 보면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꽤나 ‘귀여운’ 면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마치 사춘기 소년소녀들처럼.

돌이켜보니 내 생활 깊숙한 곳엔 아버지의 잔상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나는 이미 아버지가 살아오신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내가 영화 일을 하는 것도 어쩌면 아버지의 영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영화홍보를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나눠줘야지’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닐까.

지금도 영화를 관람하고 집에 돌아가 자식들을 앉혀놓고 그날 본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또 한 명의 아버지가 어느 극장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일을 할 때 더욱 힘이 나고 자부심이 샘솟는 것 같다.



아버지는 특별히 입맛이 까다로운 분은 아니었지만 냉면만큼은 미식가를 자처할 정도로 예민하셨다. 웬만한 냉면으로는 아버지의 출중한 입맛에 맞출 수 없었으니 말이다. 조금만 간이 안 맞거나, 혹은 면발이 조금이라도 굵거나 가늘면 그렇게 좋아하는 냉면이라도 잘 드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이다. 1·4후퇴 당시,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여행 가듯이 고향인 원산항을 떠나셨단다. 아버지가 유독 냉면을 좋아하셨던 것은 아마도 고향이 그리워서였을게다. 지금도 간혹 냉면 집에 갈 때면 후르르 냉면을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서라도 함께 가서 그 유명한 본고장의 냉면 맛을 보았을 텐데….

아버지의 ‘냉면 철학’

이북 출신의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특별한 날이면 고깃집보다는 유명하다는 냉면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의 입맛은 고스란히 빼다 박았는지 우리 4남매는 냉면을 무척 좋아한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솜씨좋은 냉면집을 찾아가 냉면 한 그릇 먹고 영화를 한 편 봐야겠다. 그리고 달뜬 기분으로 그 누군가에게 신나게 영화 이야기를 꺼내볼 참이다.

이제 나도 아버지 못지않은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란 이름은 누구에게나 마냥 어린아이 같은 추억을 안겨주는 모양이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 곁에는 늘 어린아이였던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가 좀더 오래 사셨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내 모습은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어린 시절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추억 속의 그림에서는 아버지와 그 옆의 ‘어린아이’가 훨씬 잘 어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세월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고 느끼는 걸 보니 말이다.



이렇게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건 아버지가 남겨주신 고마운 선물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를 추억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유달리 기억나는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잔잔한 미소를 짓게 되는 것 같다.

이제는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늘 이렇게 곁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내가 일부러 끄집어내지 않아도 나와 함께하시는 아버지. 새삼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신동아 2004년 6월호

2/2
글: 채윤희 올 댓 시네마 대표
목록 닫기

정초마다 안방에 내걸렸던 아버지의 ‘윤정희 달력’|채윤희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