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임시정부 출범, 수렁에 빠진 이라크

치안병력 22만, 그러나 위험하면 도망가는 ‘겁쟁이’

  • 글: 정인환 한겨레 국제부 기자 inhwan@hani.co.kr

    입력2004-07-29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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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전 1년4개월, 주요전투 종료선언 1년2개월, 후세인 체포 7개월.
    • 당초 계획대로라면 안정기에 접어들어야 할 이라크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6월28일 ‘깜짝 출범’한 알라위 총리의 임시정부는 저항세력의 공세를 막아낼 능력이 없고, 주요 재건·복구사업은 더디기만 한데…. 과연 이라크는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미국은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임시정부 출범, 수렁에 빠진 이라크
    “내이름은 사담 후세인 알 마지드, 이라크공화국의 대통령이다.”비참한 몰골로 미군에 생포된 지 6개월여 만인 지난 7월1일 법정에 선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야윈 모습이었으나 자세만큼은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이날 오후 험비 무장차량과 앰뷸런스가 호위한 가운데 무장버스에 실려 자신의 옛 대통령궁 어딘가에 마련된 ‘특별재판소’에 도착한 그는, 차고 있던 수갑을 푼 뒤 6명의 간수에게 이끌려 법정으로 들어섰다. 지난해 12월 미군에 생포된 뒤 바그다드공항에 위치한 미군 캠프 크로퍼에 구금돼온 후세인에 대한 ‘세기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악몽 같은 일들의 현실화”

    이날 후세인을 맞이한 ‘특별재판소장’은 그를 권좌에서 축출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이라크국민회의(INC) 의장 아흐메드 찰라비의 조카 살렘 찰라비였다. 지난해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침공을 결행하기 전까지 영국 런던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던 살렘 찰라비는 불과 1년 사이에 이라크 사법제도의 심장부에 진출해 있었다.

    야윈 얼굴에 조금은 긴장한 듯 눈을 껌벅인 것도 잠시, 후세인은 곧 특유의 손짓을 섞어가며 거침없는 말투로 젊은 판사와 법리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의 법정출두 장면을 담은 비디오테이프와 CD는 바그다드 거리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자신감 있는 ‘법정 데뷔’로 몰락한 독재자의 인기도가 급상승하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뒤를 이었다. 환호성도 팡파르도 없이 뭔가에 쫓기듯 이라크의 주권이 점령당국에서 임시정부로 넘겨진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24일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육군대학(Army War College)에서 한 연설을 통해 향후 이라크 정책의 뼈대를 5가지로 제시했다. 6월말 주권이양과 치안확보 지원, 인프라 재건과 추가 국제지원 촉구, 그리고 내년 1월까지 이라크 전역에서 직접선거를 실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날 연설은 지난 2월 유엔에 적극적인 역할을 촉구하고 나선 이래 부시 행정부가 밝혀온 내용을 재확인하는 한편, 격렬해지는 저항세력의 공세에 흔들리는 미국내 여론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단계인 주권이양을 예정보다 이틀 앞선 6월28일 전격 단행했다.



    이야드 알라위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 임시정부에 주권을 넘긴 뒤에도 과도통치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던 150여명의 미국인은 ‘컨설턴트’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정부 26개 부처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들이 임시정부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임시정부가 넘겨받은 ‘주권’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184억달러에 이르는 재건·복구 예산과 13만8000여명에 이르는 병력을 손에 쥔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존 네그로폰테 전 유엔대사가 이끌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관은 10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 규모로, 점령당국 사령부가 사용하던 바그다드 중심가의 이른바 ‘그린존’ 사무실을 물려받았다. 이들이 ‘그림자 내각’ 역할을 하리라는 건 명약관화다.

    무차별적인 차량폭탄 공격과 도처에서 출몰하는 중무장 저항세력, 아랍권 위성방송 화면에 방영되는 납치와 참수의 ‘잔혹극’은 이라크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일일 드라마가 돼버린 지 오래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중동전문가 앤터니 코데스먼은 지난 5월 중순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출석해 “주권이양 이후 60~90일 동안 치안을 안정시킨다면 상황이 예상보다 빨리 개선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온갖 악몽 같은 일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산적한 과제를 안고 출범한 임기 7개월짜리 임시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단연 불안한 치안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치안 확보 없이는 재건도 복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위 총리가 저항세력 소탕과 무장 민병대 해산, 대(對)테러 전담부대 창설 약속 등을 잇따라 내놓은 것에는 이런 절박한 상황인식이 깔려 있다.

    이라크에 주권이 넘겨진 6월28일 미 의회 산하 일반회계청(GAO)이 상하 양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100여쪽 분량의 ‘이라크 재건’ 보고서를 통해 이라크의 치안현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지난해 5월1일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에서 주요전투가 끝났다고 선언한 뒤, 미국은 이라크 치안 안정화를 위해 2004년 3월까지 모두 533억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미군 작전비용 521억달러와 이라크 치안병력 훈련·유지비용 12억달러가 포함된다. 하지만 이라크 치안상황은 6월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미군을 포함한 점령당국 및 그 협조세력에 대한 공세가 날로 격화돼 10~11월을 지나면서 저항의 횟수와 강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더니, 올 4~5월에 정점에 이르렀다.

    모든 외국인은 잠재적 표적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지난해 12월 유엔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8월7일 이라크 주재 요르단대사관 폭탄공격에 이어 같은 달 19일에는 바그다드 중심가에 위치한 유엔 이라크대표부가 폭탄공격을 받았고, 29일엔 시아파 지도자 알 하킴이 암살되는 등 8월 한달 동안 이라크 전역이 피로 물들었다. 9월 들어서는 전혀 새로운 단계의 저항이 시작됐다. 모든 국제기구와 외국인 사업가, 점령당국에 협력하는 이라크인이 저항세력의 잠재적 표적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0월과 11월에는 유엔을 포함한 국제기구 직원과 민간 구호요원, 재건공사 수주를 위해 입국한 외국 기업인에 대한 공격이 급격히 늘었다. 이런 현상은 올해 4월과 5월 사이에 고스란히 재연됐다.

    저항의 형식은 대담해지고 공세의 양상도 고도의 복잡성을 드러냈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동시에 조직적인 집중공격이 이어지면서 ‘테러조직의 중추신경이 존재한다’는 분석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격렬한 저항은 도처에서 점령당국의 발목을 잡았다. 이라크 파병 동맹국과 유엔, 기타 민간단체들은 앞다퉈 이라크에서 빠져나가고, 점령당국(CPA)과 미 정부기관들도 활동요원의 숫자를 급격히 줄였다.

    잘 알려진 대로 지난 4월 초부터 수니파 저항세력은 바그다드 서쪽 팔루자와 라마디, 북쪽 사마라와 티크리트 등지에서 점령군에 맞서 격렬한 저항을 벌였다. 같은 기간 강경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는 중남부 카르발라와 쿠트, 나시리야와 쿠파, 나자프는 물론 남부 최대도시인 바스라와 수도 바그다드 외곽에서 점령군을 공격했다. 4월에만 1000여 차례 공세가 이어졌다. 4월 말에 잠시 주춤했던 저항세력의 공세는 5월 들어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 1200여 차례의 공세가 벌어졌다. 주요전투 종료 선언 뒤 1년여 만에 저항세력은 이라크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과 이라크 경찰 등 치안병력 및 그 협조세력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게다가 초기 후세인 정권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던 저항세력은 외국계 테러리스트,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이어 강경 시아파 세력까지 포괄하는 등 복잡성을 띠고 있다.

    치안력 부재로 수도 바그다드는 물론이고 라마디-팔루자-티크리트를 잇는 수니파 삼각지대로 소요가 확산되더니, 키르쿠크와 모술 등 종족갈등 요인을 안고 있는 북부지역과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던 남부 시아파 지역까지 온 나라가 술렁거린다.

    껍데기 주권이양, 무력한 임시정부

    미 국무부가 현지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절대다수 이라크인들은 치안환경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국무부가 지난 1월초 이라크 5개 대도시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2%가 치안과 안전문제가 가장 걱정된다고 답했다. 1월말 실시한 조사에서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각종 범죄와 소규모 폭탄공격이 가족과 자신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라는 답변이 많았다. 6월 중순 실시한 조사결과에서도 이런 여론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월말 부시 대통령이 주권이양 이후 폭력사태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인정한 것도 이런 상황전개 때문이다. 이에 앞서 존 애비제이드 미 중부군 사령관도 2005년 1월까지 실시하기로 예정된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앞두고 저항세력의 공세가 더욱 격화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이미 5월초 이라크의 미래는 불확실하며, 선거를 앞두고 폭력사태가 더욱 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럼스펠드 장관은 특히 4월과 5월 사이에 미군을 비롯한 동맹군은 이라크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으며, 애초 계획한 평화유지 활동은 시작도 못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올해 5월 말까지 10만5000명 수준으로 줄이려던 이라크 주둔군 규모를 2005년 말까지는 13만8000명 수준을 유지하기로 변경 결정했다. 5월24일 부시 대통령은 현지 주둔군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병력을 더 늘릴 수도 있다고 밝혔다.

    치안병력, 숫자는 많지만

    그러나 임시정부가 주권을 넘겨받은 뒤에도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이 치안유지의 전면에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무장한 외국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심에 진주해 있는 것 자체가 치안불안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가 지난 6월17일 내놓은 이라크 여론동향 분석보고서에서도 많은 이라크인이 동맹군을 치안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젯거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주권이양 뒤에도 하루 평균 45차례씩 이어지는 저항세력의 공세를 차단할 만한 역량이 임시정부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미·영 양국은 전후 이라크 치안확보 계획을 크게 4단계로 나눠 체계화했다.

    1단계는 초기 상호협력기로, 동맹군이 이라크 치안병력에 치안유지 권한을 넘기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준비하는 시기다. 2단계는 치안을 현지통제하는 형태로 이행시키는 시기로, 이라크 치안병력이 지역별로 치안유지 책임을 떠맡게 된다. 3단계는 지방정부에 치안책임을 넘겨 이라크 치안병력이 보다 넓은 지역의 치안을 맡게 되는 시기다. 마지막으로 4단계는 전략적 이행 및 주시 단계로, 이라크 치안병력이 국경감시 업무를 포함해 이라크 내부는 물론 외부로부터의 위협까지 전국적인 차원에서 치안유지 책임을 떠맡고 이를 동맹군이 광범위하게 감독·지원하는 시기다. 이런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 위협은 줄어들고 이라크 치안병력의 활동력은 커지며 이들에 대한 이라크 정부의 통제·관리능력도 향상된다는 게 당초 계획이었다.

    동맹군은 이라크 치안병력에게 일상적인 치안책임을 단계적으로 이양하면서, 치안유지 병력을 줄임과 동시에 전방배치 병력도 감축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를 통해 핵심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에 따라 동맹군은 이라크 치안병력의 작전능력이 강화됐다며 올 2월 예정보다 앞서 치안유지 업무를 넘기기 시작했다. 바그다드를 예로 들면, 동맹군은 시 외곽으로 병력을 옮기고 시내 치안유지를 이라크 치안병력에게 맡겼다.

    이라크 치안병력은 5가지 형태로 구성돼 있다. 우선 국방부 산하에 이라크 정규군과 민방위군이 있다. 정규군에는 해군 소속 보병대와 육군 항공대, 해상방위군과 테러진압군 등이 포함돼 있으나 대부분은 육군 병력이다. 이들은 이라크 국토방위에 주축이 될 정예병력으로 영토보호와 주요 국가기관 및 시설, 사회기반시설과 통신망을 지키는 것이 주요 임무다. 반면 민방위군은 동맹군을 도와 유사시 치안유지 및 안정화 작업에 나서는 것이 주요 임무다.

    여기에 내무부 산하 경찰과 국경수비대, 시설보호대가 있다. 경찰은 기초적인 법을 집행하고 안전 유지 및 대중 보호, 법질서 수호 등의 임무를 받는다. 국경수비대는 국경을 들고나는 사람과 물건을 감시·감독하는 업무를 맡는다. 시설보호대는 중앙정부기관과 각급 지방정부 청사 등이 약탈되지 않도록 경비한다. 시설보호대 대원은 정부 각 부처마다 별도로 고용하기 때문에 업무수행능력이 천차만별이다.

    일반회계청은 국방부가 지난 6월18일 내놓은 자료를 근거로 이라크 치안병력이 21만9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경찰이 8만4000명으로 가장 많고 국경수비대 1만8000명, 정규군 7000명, 민방위군 3만6000명, 시설보호대가 7만4000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정규군 병력만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고 적절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경찰병력은 일반적인 법질서 유지와 범죄수사, 혐의자 체포, 증인 심문에 국한해 활동하고 있다.

    민방위군 병사들도 교통통제, 초소 설치나 순찰 및 사건 발생지역 차단, 군중 통제 등 경찰력을 보조하는 역할이 고작이다. 또 시설경비대는 담당구역이나 건물의 경비업무에 나서고 있으며 이마저도 상당부분 군이나 경찰력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점령당국은 무장한 저항세력 10~20명이면 특정구역이나 건물에 배치된 시설경비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비웃음거리 된 계엄령 시사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4월 저항세력이 점령군을 겨냥해 대대적인 공세를 폈을 때 이라크 치안병력의 대처능력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수니파 저항세력과 강경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를 따르는 메흐디군의 공세 앞에서 이라크 정규군은 물론 경찰과 민방위군 상당수가 아예 전투를 거부하고 나섰다.

    미 국방부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교전이 가장 격렬했던 4월2일부터 16일까지 이라크 민방위군에서 근무이탈자가 속출했다. 미 1보병사단 관할 바쿠바·티크리트 등 북동부 지역의 민방위군 9100여명 가운데 약 30%가 빠져나가 6000여명으로 줄었다. 1경기갑사단 관할인 바그다드 인근에서도 병력의 49%가 빠져나가면서 6200명에 이르던 민방위군이 3200명 선으로 줄었다. 다국적사단 관할인 중부지역 카르발라, 나자프, 쿠트 등지에서도 병력 3500여명 가운데 30%가 부대복귀를 하지 않아 2500명 남짓으로 버텨야 했고, 해병 1원정군이 주둔하고 있는 팔루자를 비롯한 서부지역에선 5600여 병력 가운데 약 82%가 전투를 포기해 1000명 남짓만 제자리를 지킨 것으로 집계됐다.

    게다가 이라크 치안병력이 보유한 장비도 보잘것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6월24일 기사에서 이라크 치안병력 가운데 5%만이 무전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방탄조끼도 약 25%에게만 보급됐다고 전했다. 차량도 필요대수의 3분의 1만 확보된 상태며, 무기 또한 필요량의 절반 정도만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입신청한 25만3000여정의 각종 무기류 가운데 현재까지 도착한 분량도 14만1000여정뿐이다. 무전기는 5만7000여개를 신청했으나 이라크에 있는 것을 모두 합해도 2500여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필수장비인 방탄조끼의 경우 17만4000여벌이 필요하지만 현재까지 공급된 물량은 4만여벌에 불과한 실정이다.

    알라위 총리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계엄령 선포를 운위할 때 임시정부 안팎에서 실소가 터져나온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이미 도처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계엄령을 선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를 집행할 병력은 또 어디서 구할 것이냐는 비아냥이었다.

    결국 치안확보는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게 이라크 임시정부가 처한 현실이다. 지난달 24일 브루킹스연구소가 주최한 주권이양 이후의 이라크 전망에 대한 토론회에서 중동 전문가인 쉬블리 텔하미 메릴랜드대 교수는 알라위 총리가 직면하게 될 딜레마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현 시점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치안공백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이 경우 이라크는 아랍의 발칸반도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임시정부가 미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들은 이라크의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지난 4월 팔루자에서 벌어졌던 미국인 주검훼손 사건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임시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군의 강력한 보복 군사작전을 두둔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하고 나설 것인가.”

    외국군 주둔에 따른 이라크인의 불만이 저항세력에 대한 암묵적 지지층을 만들어냈다면, 극단적 저항의 배후에는 나락으로 떨어진 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팍팍한 삶의 조건이 버티고 있다. 점령 1년3개월여 만에 ‘주권’은 되찾았다지만, 불안한 치안상황으로 인해 재건·복구사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이라크 재건·복구사업의 척도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전력 분야다. 이라크의 전력 인프라는 지난 1991년 걸프전과 이후 13년여에 걸친 경제제재로 인해 매우 낙후했으며 특히 지난해 침공 개시 이후 상당부분 파괴됐다.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생활상의 불편은 물론이고 이라크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원유산업 분야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미 점령당국과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가 전력분야 재건을 이라크 경제재건과 필수 사회기반시설 복구의 선결과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전력을 포함한 필수 공공서비스 재건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면 치안 안정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와 점령당국은 지난해 9월 페리티 코퍼레이션, 플루어 인터컨티넨털, 워싱턴그룹 등 3사를 선정해 1차 ‘전력복구사업(RIE)’을 시작했다. 이어 지난 5월까지 3억2300만달러를 투자해 2차와 3차 전력복구사업을 벌여나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6월 말까지 하루 최대 전력공급량을 6000MW까지 끌어 올리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수백km에 이르는 송배전(送配電)망 복구사업과 변압시설 등 각종 전력공급망 재건·복구사업이 포함됐다. 여기에 필요한 예산 13억8000만달러 가운데 7억5600만달러는 이라크 원유 수익금으로 조성된 이른바 ‘이라크발전기금’에서, 나머지 6억2600만달러는 미 의회가 배정한 이라크 재건·복구기금에서 각각 충당하기로 했다.

    ‘전력복구사업’과는 별도로 28억달러 상당의 사회기반시설 복구사업을 따낸 벡텔사도 일부 전력망 복구사업에 참여한다. 또 1차 복구사업을 따낸 3개사가 지난 3월 각각 5억달러씩의 공사를 추가로 따내는 등 전력복구 사업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행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라크의 전력 생산능력은 어느 정도 늘어났지만 송배전망 복구가 더뎌 전력공급량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지난달 1일 현재 이라크의 하루 최대 전력공급량은 4200MW로, 지난해 9월25일의 3400 MW보다 800MW가 늘어났지만 점령당국이 목표로 했던 6000MW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일부지역에서는 전쟁 이전보다 전력사정이 열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5월말 현재 전력사정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이라크 전역 18개주 가운데 8개주에서 하루평균 전력공급 시간이 8시간 이하인 것으로 집계됐다. 또 9개주에선 하루 9~15시간 전력이 공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루 최대 6000MW 공급이 가능해지더라도 40~50℃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라크의 여름을 견뎌내기엔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유엔과 세계은행이 내놓은 ‘이라크 재건소요 평가보고서’는 이라크의 전력수요를 하루 약 7000MW로 추산한 바 있다.

    이라크는 아프간의 전철 밟나

    점증하는 유혈 폭력사태가 갈 길 바쁜 재건·복구사업의 발목을 잡으면서 공사계획이 취소되는가 하면 하청업자들이 현장에서 일하기를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또 공사용 자재가 제때 공급되지 않는 일도 잦다. 숙련된 기술자가 부족한 데다 그나마 전력복구 공사에 참여하는 이라크 노동자를 겨냥한 저항세력의 공세가 늘면서 아예 일손을 놓는 경우까지 발생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저항세력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이라크 전역에서 공사중단사태가 속출했다. 워싱턴그룹의 경우 기습공격과 총격, 박격포 공격과 저격시도가 잇따라 지난 4월에만도 북부 모술과 물라 압둘라발전소 복구 현장을 각각 3일과 5일간 폐쇄했다. 또 지난 5월 들어선 하청업체 일부가 계약을 파기하고 공사를 중단했다.

    바그다드 인근 쿠다스발전소 복구작업을 벌이고 있는 플루어 인터내셔널도 폭력사태로 인해 자재수송을 늦추었는가 하면 안전을 이유로 현장노동자 퇴근 시간을 평상시보다 2시간 빠른 오후 4시로 앞당겨야 했다. 또 5월 들어선 나자프와 나시리야 등 일부 지역에서 저항이 격렬해져 현장인력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치안상황 악화에 따라 안전문제가 대두되면서 예상치 못한 추가비용이 대폭 늘어난 것도 복구사업 참여업체가 맞닥뜨린 복병이다. 이를테면 1차 전력복구사업 참여업체로 3억5650만달러짜리 계약을 따낸 페리니 코퍼레이션의 경우, 안전비용으로 총 계약금액의 18%에 이르는 약 6349만달러가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3억1000만달러를 수주한 워싱턴그룹도 계약고의 14.3%에 이르는 4450만달러를 안전비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라크 임시정부는 산적한 현안과 열악한 조건 속에서 내년 1월까지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총선거 준비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혼란은 가중될 것이고, 유혈 폭력사태는 그 정도를 더해갈 것이다.

    지난 6월15일 부시 미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임시 대통령을 만나 “전쟁과 압제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선 아프간은 향후 이라크의 ‘역할모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2년 반이 흐른 아프간의 오늘에서 이라크의 내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살아남는 것만 해도 큰 도전과제”

    파키스탄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한 탈레반과 알 카에다 잔존세력이 곳곳에서 치고 빠지기식 게릴라 공세를 벌인 지는 이미 오래다. 지역에 뿌리내린 무장군벌이 난립하면서 재건·복구사업은 첫발도 떼지 못했다. 유혈사태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구호단체들마저 하나둘씩 아프간을 떠나고 있고 가난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편농사에 매달리고 있다. 지난 1월 통과된 헌법에 따라 6월에 치르기로 했던 선거가 9월로 한 차례 연기되더니,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나눠 각각 오는 10월과 내년 4~5월께 치르는 것으로 또다시 연기됐다. 아프간의 오늘은 이라크 임시정부 최악의 내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것이 2004년 7월 현재 이라크의 상황이다. 알라위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 임시정부에 부과되어 있는 과제들은 초고차원 방정식에 가깝다. 주권이양 직후 발행된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충고를 들어보자.

    “치안부재와 전력난은 700만 이라크 노동인구 가운데 200만명을 실업자로 만들고 있다. 이들은 고스란히 저항세력의 잠재적 ‘인력 풀’이 되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는 그저 살아남는 것만도 알라위 총리가 이끄는 이라크 임시정부에 만만찮은 도전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살아남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갈라질 대로 갈라진 종파와 종족을 하나로 묶어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라크 사회를 통치 가능한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폭력사태를 끝내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점령군에 협력하는 동시에 점령군이 저항세력의 감정을 자극할 만한 도발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겁에 질린 이라크 국민에게 주권을 가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것이고, 이라크는 분열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후세인 잔당세력은 권좌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며, 외국군 또한 영원히 주둔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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