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행을 결심했을 때 허리띠부터 늦춰 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연꽃 구경도 식후경’이다.
- 무안의 5미(五味), 함평의 특산물을 두루 맛보지 않고 어찌 돌아가랴. 야트막한 산자락, 오밀조밀 논밭 지나 곧바로 탁 트인 바다가 나오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발길은 더디고 가슴은 넉넉해진다.
6월 양파 수확을 끝내고 수박을 심는 농부들(무안).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 수박 출하도 7월이면 끝나고 이 밭에는 다시 김장무가 심어진다. 그렇게 밭은 쉼 없이 인간을 먹여 살린다.
‘백련대축제’가 열리는 백련지의 연꽃들.
매년 연꽃의 절정기에 맞춰 ‘무안백련대축제’가 열리는데 올해는 8월14일부터 22일까지로 예정돼 있다. 그러나 연꽃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을 체험해보겠다면 축제기간은 피하는 게 낫다. 그 무렵이면 백련교(280여m의 나무다리) 위를 사람에 밀려 다닐 정도기 때문. 대신 연꽃의 개화가 막 시작되는 6월말 백련지에 가보면 황소개구리의 ‘끄억’ 하는 울음소리와 ‘첨벙’ 하는 물소리에 흠칫 놀랄 만큼 고즈넉하다. 곧장 백련지로 가려면 서해안고속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 일로IC까지 내달아 815번 지방도로를 거쳐 820번 도로를 타면 된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무안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다.
무안 용월리 상동마을 청룡산에 자리잡은 백로·왜가리떼.
사실 무안은 볼거리보다 먹을거리의 고장이다. 양파한우고기, 기절낙지(낙지 보고 놀라고, 그 맛에 놀라고, 가격에 놀라 세 번 기절한다는 세발낙지), 도리포 숭어회, 명산 장어구이, 돼지짚불구이가 무안 5미(味)다. 어느 하나 후회는 없겠지만 오늘 저녁은 짚불구이로 정하고 동남쪽 방향의 몽탄면 사창리 쪽으로 갔다. 이 마을에서 10년 넘게 짚불구이를 해온 김정희, 고은숙 부부의 ‘녹향가든’(061-452-6990)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완전히 떨어졌다. “짚불은 화력이 좋아서 고기가 순식간에 익고 기름이 쫙 빠져서 담백하죠. 볏짚은 2년 묵혀 완전히 건조한 것만 씁니다.” 고은숙씨는 석쇠에 가지런히 놓은 삼겹살에 천일염을 술술 뿌려 구워내면서 눈 한 번 깜짝 하지 않는데 구경꾼만 매운 연기에 눈물을 찔끔거린다. 이렇게 구운 삼겹살은 뻘게장에 찍어 먹고 뜨거운 밥에 뻘게장을 쓱쓱 비벼 양파김치 한쪽씩 얹어 먹으면 더 무슨 바람이 있으랴.
전남 무안은 서쪽으로 서해바다와 신안군, 동쪽으로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나주, 북동쪽으로 함평, 남서쪽으론 목포와 만난다. 다음 행선지는 함평이다. 함평은 5월 나비축제가 열려 한바탕 관광객이 몰려왔다 떠난 후였다. 가을에도 한국 100경(百景) 중 하나로 꼽히는 불갑산 자락의 용천사 꽃무릇 군락이라는 훌륭한 볼거리가 있지만 함평군은 연중 내내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대동저수지 부근에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올 연말쯤 자연생태공원을 산책하고 돌머리 해수욕장에서 ‘해수찜’을 즐기는 관광코스가 생길 것 같다.
불을 붙이자마자 짚은 훨훨 타올랐다. 숙련된 솜씨로 삼겹살 짚불구이를 하는 고은숙씨(좌). 선짓국과 함께 먹는 함평 육회비빔밥(우).
양파 집하장에서 수확한 양파를 크기별로 다시 분류하는 아낙들.
함평군을 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나비문양과 ‘천지(天地)’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호남가’ 첫머리에 등장하는 ‘함평천지’는 현재 함평 특산물의 공동 브랜드로 사용된다. 함평천지 쌀, 함평천지 오이, 배, 토마토. 최근에는 함평군내 산딸기 재배농가가 크게 늘자 산딸기 와인(레드마운틴) 생산도 시작했다. 한여름에 얼려 먹는 ‘아이스 홍시’에 이어 산딸기 와인이 함평 명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 바라보니, 제주 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올 제,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 있다.” 다음에는 ‘호남가’ 한 대목이라도 배워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함평IC를 빠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