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애드리브의 達人, MC 김제동

“내 유머의 콘텐츠는 숙성시켜 내 것으로 만든 것”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07-29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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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 스크랩하며 기록한 메모, 스크랩북 10권 넘어
    • 안경 벗으면 웃기지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전혀 없다
    • 좋아하는 여성상, 말수 많고 쾌활하고 활달하고 장난 잘 치는 여성
    • 좋아하는 일 하면서 경제적 가치 창출되니 너무 좋아
    • 과분하게 받은 사랑, 뭔가 돌려드릴 방안 생각중
    • 나이 들어도 마이크 못 놓을 것
    애드리브의 達人, MC 김제동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얼짱 시대’에 김제동(30) 같은 연예인이 뜨는 건 흥미로운 현상이다. MC이자 코미디언인 김제동은 거울을 볼 때마다 좀더 키가 크고 잘생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사방에서 그를 찾는 러브콜이 폭주한다. SBS ‘실제상황 토요일’ ‘야심만만’, KBS 2TV의 ‘해피투게더’ ‘윤도현의 러브레터’, MBC ‘행복주식회사’ ‘까치가 울면’ 등에 출연하고 있다. 인기가 오르면서 CF도 3편이나 찍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대구 부근 대학 축제에서 사회를 보던 무명의 MC가 이처럼 단기간에 무서운 속도로 뜬 것이 신기할 정도다.

    숙명여대 강미은 교수는 ‘통(通)하고 싶은가’란 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으로 강금실 법무부 장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등과 나란히 김제동을 꼽았다. 강 교수는 김제동을 단순한 개그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 줄 아는 커뮤니케이터라고 평했다.

    《‘김제동의 말에는 메시지가 있다. 그냥 말장난으로 사람을 웃기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김제동의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조화가 완벽하다. 신문에 밑줄 쳐가며 공부해서 얻은 아이디어건, 개그학원에서 배운 내용이건, 그 내용이 순간순간의 컨텍스트와 완벽하게 맞춰서 나오기 때문에 상품이 된다.’》

    “내 대본은 책과 신문에서 나온다”



    에이스미디어는 김제동의 매니지먼트 회사다. 김제동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만 4명이다. 에이스미디어 사장실에서 3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저녁 7시30분이었다. 신촌 이화여대 앞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의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인기 있는지 현장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 옆에서 김제동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지나가던 7, 8명의 여고생이 그를 발견했다.

    “제동이 오빠다. 오빠! 오빠!”

    이대 정문까지 가는 동안 김제동을 발견한 여고생, 여대생들이 너도나도 디카폰(디지털 카메라폰)을 펴들고 사진을 찍었다. 보통 70만원쯤 하는 디카폰을 안 가진 젊은이가 없었다. 김제동은 짜증내지 않고 낙지집을 찾아들어갈 때까지 사인 및 디카폰 촬영 요구에 친절히 응했다. 연세대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비결’에 관한 김제동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 여학생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인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나를 먹고 살게 해주는 사람들인데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거죠.”

    -김제동 어록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기를 끌더군요. 어록을 카툰으로 그린 책도 나왔고…. 김제동 어록이 뜨면서 아류도 나온다지요. 김형은 스스로 콘텐츠를 만든다지요.

    “대본은 내가 읽은 책, 신문에서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이 직접 써주지는 않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 작가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누나들이 작가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100세를 일기로 작고한 미국의 코미디언 보브 호프는 작가 100명을 고용해 재담 제작소를 운용했다. 보브 호프의 재담은 재치가 번득이는 어록을 많이 만들어냈다. 김제동 어록도 보브 호프 어록에 못지않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죠. 우리는 네잎 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많은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있어요.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복이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 속에서 행운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하는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인생은 우표처럼 살아야 됩니다. 딱 붙어서 목적지까지 가야 되니까.”

    “방위는 죽지 않는다. 다만 총소리에 기절할 뿐이다.”

    “죽고 싶을 때는 병원에 한번 가보십시오. 죽으려고 했던 자신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내가 버리려고 했던 목숨을 그들은 처절하게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흔히 파리 목숨이라고 하지만 쇠심줄보다 질긴 게 사람 목숨입니다.”

    “남자는 술을 먹되 취하지 않고, 취해도 비틀거리지 않고, 비틀거리되 쓰러지지 아니하고, 쓰러지되 무릎 꿇지 않는다.”》

    -김형도 유능한 작가를 몇 명 붙이면 콘텐츠가 더 풍부해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적어준 이야기로는 내가 경험하거나 생각해낸 것만큼 표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외워서 하는 것보다는 안에서 숙성시켜 내 것으로 만들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 보고 라디오 듣고 신문과 책을 읽죠. 그도 저도 아니면 술 먹으며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요. 소형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녹음해둡니다.

    ‘야심만만’은 여덟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죠.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정제돼 있거나 미리 만들어놓은 대화는 아무래도 인위적인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깎아놓은 목각인형보다는 아이들이 그냥 손으로 주물러놓은 찰흙인형이 더 감동을 주지요.”

    김제동은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에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어록을 출판하자고 제의하는 출판사가 여럿이라지요.

    “‘김제동 어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서 그게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릉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왕의 것이 아니고 왕을 만들어준 백성의 유산이 됩니다. 김제동 어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제동닷넷(kimjedong.net)에서 팬들이 만들어 올려놓은 ‘김제동 어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한 말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더군요. 방송에서 순간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나서 정작 나는 잊어버린 것도 있는데….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친구들한테 선물하기 위해 어록을 뽑아 복사해 책으로 만들어 돌리더라도 괜찮습니다. 김제동닷넷과 인터넷 팬카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어록을 만든 팬들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팬카페에서 방송 대사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대사는 물론이고 활동방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팬이 들은 이야기나 경험담을 올려놓으면 적당히 가공해서 써먹을 때도 많죠. 좋은 후원자들입니다.”

    -팬레터나 선물은 어느 정도나 옵니까.

    “팬카페가 생겨선지 편지는 많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활자를 좋아하는데요. 옷을 선물하는 팬도 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에 선물 보내지 말라고 글을 올렸어요. 팬들이 대부분 학생이거든요. 돈을 벌어도 내가 더 벌 거 아닙니까. 가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옷이나 신발을 사서 보내오는 경우도 있는데, 내 선물 사느라 자기 거는 못 샀을 것 아니에요. 그래도 선물을 주는 게 기쁨인데 그걸 막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의가 나오길래 선물을 하려면 8000원 이내의 책으로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신문 스크랩하며 메모하는 게 취미라면서요.

    “신문을 그냥 보면 허투루 읽게 돼서자를 대고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그 밑에 내 생각을 적어봅니다.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문을 다섯 가지 구독합니다. 논설위원 선생님 앞에서 건방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설 중에도 공감하는 사설이 있고 내 생각과 다르게 느껴지는 사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일기처럼 적어놓습니다. 그렇게 한 게 두꺼운 스크랩북으로 10권이 넘어요. 습관이 돼 하루라도 안 하면 찝찝해져요. 일종의 취미생활이지요.

    고속도로 휴게소 남자화장실에 붙어있는 명언도 좋은 게 있으면 메모해놓습니다. 일주일 만에 명언을 교체하는 휴게소도 있고 한달 만에 교체하는 데도 있죠…. 방송에서 자주 써먹었어요.”

    -어느 휴게소가 가장 낫던가요.

    “단연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칠곡휴게소죠. 여자화장실엔 어떤 걸 붙여놓았는가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예요. 거기서 읽은 것 중에서 팬들한테 회자되는 어록으로 발전한 게 꽤 있어요.”

    잊히지 않는 대학축제 MC의 서러움

    그는 1999년 모교인 대구 계명문화대학 축제에서 MC를 하다 윤도현밴드를 처음 만났다. 윤도현밴드 사람들은 시골 MC를 대수롭잖게 보고 무대에서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았다. 공연 도중 한 연주자의 기타줄이 끊어져 갈아끼우는 동안 그가 무대에 올라가 시간을 때웠다. 그 다음부터 윤도현밴드 사람들은 대학축제 MC 중 김제동이 제일 낫다는 말을 했다.

    윤도현밴드의 제의로 순회콘서트를 같이하게 됐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30분 동안 청중들의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잡이 역할이었다. 김제동은 바람잡이 대신 ‘사전 MC’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으리라고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사투리 쓰죠, 얼굴 못생겼죠. 윤도현씨가 KBS 2TV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사전 MC를 해달라고 불렀을 때 서울 쪽 대학의 축제를 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긴 했습니다. 가방에 달랑 책 4권 들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홍익대 앞에 있는 여관에서 3개월 정도 묵으며 방송국에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말수가 별로 없는 리듬 앤드 블루스(R&B) 가수들이 초대됐다.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고 딱딱했는지 분위기를 띄우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걸 본 PD가 “바람잡이 하는 친구 재밌다”며 “한번 녹화해둬봐라”고 했다. 방송에 양념으로 나갔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날뿐이었다. 몇 달 더 바람잡이를 하다 ‘리플해주세요’라는 고정코너를 맡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리플을 윤도현과 함께 읽어주고 코멘트를 하는 역이었다.

    그러다가 ‘폭소클럽’(KBS2) ‘컬럼버스 대발견’(SBS)에 나오면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쇄도해 지난해 5월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애드리브의 達人, MC 김제동

    인터뷰중인 MC 김제동.

    -어떤 경로로 대학축제 사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까.

    “1996년에 2군사령부 문선대에서 제대한 뒤 모교인 계명문화대학 관광과 졸업생 환송회에서 처음으로 사회를 봤습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과 대표들이 자기네 과 사회도 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차비 정도인 2만~3만원을 받고 해줬어요. 소문이 나면서 다른 학교 모임에도 가게 됐죠. 그러다 대학축제를 전문으로 하는 이벤트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대학축제 전문 MC가 된 거죠.

    여기저기 대학축제에 돌아다니다가 삼성라이온즈 대구구장의 장내 아나운서를 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사인을 해줄 만큼 유명해진 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는 무명시절인 1998년 김천과학대학 축제에서 MC를 맡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날 인기 정상의 가수가 오기로 돼 있었다. 오직 그 가수를 보기 위해 수많은 여고생이 전세버스를 타고 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여고생들은 빗속에서도 가수를 기다리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가수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무대 위로 올라가 사정을 말하고 “한 시간 반 동안 뭘 할까요?”라고 물었다. 속았다고 생각한 청중들이 무대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이 나온다는 포스터를 붙여 사람을 끌어놓고 실제로는 오지 않는 속임수가 많을 때였다. 여고생들은 울부짖었다.

    그는 “날 믿어달라. 한 시간 반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해드리겠다”며 청중들과 똑같이 비를 맞기 위해 무대 위의 천막을 걷었다. 온몸에 물을 붓고 운동장에서 구르며 머드팩을 했다. 신발을 벗어 박수를 치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이 지나 가수가 왔는데, 진흙투성이 MC가 무대에서 내려와야 무대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서러웠다.

    그가 내려간 뒤 가수가 올라와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라고 말하자 관객의 절반이 기절했다. 가수가 내리 세 곡을 부르고 떠난 후 그가 마무리 멘트를 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을 땐 관객 대부분이 빠져나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와 소주를 한잔 하고 있는데 안 온다던 여자친구가 왔다. 그녀가 “저 사람들은 오빠를 잊어도 나는 오늘 오빠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 가수가 누구였습니까.

    “이름을 밝히면 그분한테 피해가 가요. 그분도 본의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나하고 친하게 지냅니다. 인기 정상의 가수지요. 내가 김천과학대학 축제 머드팩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 그놈이 너였어?’라며 웃어요.”

    난쟁이 콤플렉스

    -강미은 교수 책에 김형의 용모에 대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더군요. 김형이 방송에서 “꽃미남이 부럽다” “잘생겼다고 재산세 내고 못생겼다고 오물세 내냐”는 식으로 용모 이야기를 자주 하던데, ‘얼꽝’도 상품화가 되나요.

    “김용만씨는 나를 보고 농담삼아 ‘너 참 난(難)하게 생겼다’고 해요. 강호동 선배는 나더러 ‘인간과 동물의 중간단계’라고 놀려요.”

    -그건 강호동씨가 자기소개하는 얘기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형도 그 계통에 포함된다고.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서로 웃는 거죠. 사춘기 때는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못생긴 놈이 설친다’는 얘기나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할까요.

    내게 난쟁이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사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왕자님하고 공주님 떠나실 때 태워드릴 백마를 찾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에게 도전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을 걸 예견하고 스스로 상처내버리고 끝내는 거죠. 여자에게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 10명 안에 드는 것 아닙니까.

    “여성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면 제가 친한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은 연예인 1위로 나옵니다. 자기가 갖기는 싫고 생판 남 주기는 아까우니까 친구한테 주고 가끔 만나고 싶은 거죠. 견공(犬公)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방에 들여놓기는 싫고 마당 같은 데서 키워보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나를 연애 또는 결혼 상대로 보기보다는 약간 중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요. 여성 팬들이 ‘오빤 정말 친오빠 같애’ 하면 환장하겠습니다. 친오빠하고 결혼하는 여자 봤습니까. 나한테 사인받기 위해 몰려드는 여대생들도 마찬가질 거예요.

    지금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직업에 너무나 잘 맞으니까요. 대학축제에서 MC를 하며 함부로 말할 수 있었던 것도 키 182cm에 근육질 꽃미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학생들을 놀려도 돌멩이 날아오지 않고 마구 웃습니다.

    ‘여러분 내 얼굴 봤죠. 안경 봤죠. 제가 어떻게 살아왔겠어요. 여기 앞에 계신 분은 웃으시면 안 돼요. 같이 슬퍼해야지….’

    그러나 농담을 하면서도 주의합니다. 내가 무심코 뱉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한테는 평생의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행사에서 내게 당한 사람은 반드시 그날의 영웅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분하고 사진도 찍고 선물도 제일 많이 주고.”

    -공포영화 ‘령’에 나오는 여배우 남상미가 김형을 이상형이라고 했던데요. 인터넷에서 남상미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꽤 깜찍하고 상큼한 여성이더군요.

    “네, 어제도 같이 방송했는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선지 나한테 조금 불편해하는 거 같아서 일부러 친하게 대해줬습니다. ‘야, 나 좋아한다고 했다며’라고 말하니까 남상미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예, 그래요’하고 대답해요. ‘알았어. 결혼은 언제 할 거야’ 하고 말았죠. 나이가 열 살 차이 나는데요.”

    술집 아르바이트와 막노동

    -좋아하는 여성상이 있다면….

    “나보다 말수가 많고 쾌활하고 활달하고 장난 잘 치는 여성이면 좋겠습니다. 얼굴은 나하고 안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쁜 것까지는 바라지 않고요.”

    -유명해지고 나서 달라진 게 뭡니까. 조영남씨가 ‘주간동아’에 쓴 글을 보니 큰길을 걷거나 압구정동 명동같이 번화한 곳을 어슬렁거릴 때는 둥그런 검정 뿔테 안경을 벗고 운동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얼굴이 많이 팔려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알아보고 접근해 사생활이 없고 피곤하다는 거지요.

    “서울 땅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게 신기합니다. 나는 워낙 특이하게 생겨서 안경을 벗으면 더 잘 알아봅니다. 요즘에는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하고 선수를 쳐 그분들이 놀랄 때 얼른 지나갑니다. 노하우가 생긴 거죠.”

    그는 딸만 내리 다섯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6타석 1안타를 쳤다고 동네잔치를 사흘이나 벌였다. 그러나 안타를 날린 흥분이 과했던지 제동이 백일도 되기 전에 뇌출혈로 세상을 떴다.

    필자는 김제동이 태어난 마을 이야기를 듣다가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제동의 고향마을은 3사관학교 후문 바로 뒤에 있는 가난한 시골이었다. 그 마을에 3사관학교에 근무하는 군인들을 상대로 라면 통닭 소주 막걸리를 파는 민가가 여럿 있었다. 필자는 3사관학교 이등병 시절 작업트럭을 타고 나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 마을에 들러 고참들과 함께 사제(私製) 라면과 소주 한두 잔을 걸치곤 했다. 1974년생인 김제동이 아마 서너 살 때였을 것이다. 세상은 좁다.

    “이런 얘기 하기 그렇지만 누나들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습니다. 공장생활하면서 배턴 터치하듯 나를 키웠습니다. 공장 다니던 첫째누나가 시집가면 둘째누나가 물려받아 생계를 꾸리고 셋째누나, 넷째누나, 다섯째누나…. 나는 어릴 때 아이들이 ‘공순이’라는 표현을 쓰면 무조건 싸웠어요. 우리 누나들을 직접 지칭하는 말이 아니어도 참지 못했죠.”

    김제동은 대구 달성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학비는 스스로 벌어서 썼다. 술집에서 맥주 나르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방학 때는 도로공사장에 나가 막노동을 했다. 자연히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2년제 계명문화대학을 1992년도에 입학해서 2002년에 졸업했다.

    -세계적인 코미디언 가운데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 많습니다. 희극왕 찰리 채플린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보육원에 들어갔지요. 커서는 유리상점 직공, 이발사를 전전했어요. 작년에 타계한 보브 호프는 네 살 때 영국에서 부모 품에 안겨 미국으로 건너와 신문팔이, 구두공장 직원, 골프장 캐디, 아마추어 복서 등 안해본 일이 없습니다. 물건을 훔쳐 감옥살이도 했지요. 이주일씨도 어느 날 갑자기 뜨기 전까지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생활을 했습니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남을 웃길 수가 없다는 말이 있어요.

    “눈물과 웃음은 통한다잖아요. 아주 기뻐서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슬픔이 심연에 도달해 더 내려갈 데가 없으면 어이없어 웃게 되잖아요. 극과 극은 통하는 거지요. N극과 S극이 만나야 끌어당기는 겁니다. 광대 분장을 보면 입에는 아주 과장된 웃음이 그려져 있고 눈에는 눈물 방울이 찍혀 있습니다. 많이 울어본 사람만이 상대방한테 눈물을 숨기고 웃음을 줄 수 있는 거 같아요. 보브 호프 얘기도 공감이 가네요.”

    CNN의 토크쇼 진행자 래리 킹은 저서 ‘대화의 기술’에서 말 잘하는 사람들의 8가지 공통점으로 ①사물을 보는 신선한 관점 ②일상을 뛰어넘는 광범위한 시각 ③적극성 ④항상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음 ⑤호기심 ⑥상대방과 공감대 형성 ⑦유머감각 ⑧자기만의 화법을 들었다.

    -김형은 관객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기 위해 어떤 점에 특별히 신경을 씁니까.

    “관객을 알고 융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축제 사회를 볼 때는 급한 스케줄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시간 전에 그 학교에 갑니다. 학생들이 족구 농구 축구를 하고 벤치에 앉아서 책 읽는 모습을 살펴보는 거죠. 교훈도 알아놓고 대자보에 붙은 글들도 읽어봅니다. 꼼꼼하게 학교 분위기를 파악하는 거죠.

    래리 킹 표현을 빌려오자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죠. 학생들이 공감하는 얘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총학생회장을 무대 위로 불러내 ‘삭발했네요. 대자보 보니까 등록금 때문에 그런 모양인데 잘될 겁니다. 두상이 참 예쁘네요’라고 말하죠. 다음에는 총장도 불러내 의견을 들어봅니다. 그리고 둘이 악수하게 하고 술 한잔하라고 밖으로 내보냅니다. 눈높이를 맞춰주고 관객들하고 자꾸 섞여야 합니다. 무대하고 객석이 멀면 안 좋습니다. 저는 객석에 내려가서 인터뷰하길 좋아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사고의 높이를 같이하기 위해서죠.

    레크리에이션 강사들한테 강의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관객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소명의식이 생긴다고요. 총학생회나 방송국에서 출연료를 주지만 사실 그 돈은 관객과 시청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분들의 지원이 없으면 어떻게 무대에 설 수 있겠습니까. 공연 마치고 나서 시간을 버렸다는 느낌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했다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영천에서 단포초등학교 다닐 때는 수재 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담임교사가 우수한 아이를 시골에 놓아둬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를 설득해 대구로 전학을 갔다. 딸들은 공부시키지 못했지만 외아들 제동만은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집안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고 어머니의 의지도 강했다.

    대구로 가서부터 성적이 떨어졌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다. 국어 영어는 잘했는데 수학은 완전 ‘꽝’이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성적이 중간 정도였다.

    김제동의 눈은 뱀장어 눈이다. 전형적인 북방계 몽골리안이다. 시력은 좌우 0.2. 그렇지만 뱀장어 실눈은 그가 출세하는 꼬투리가 되었다. 김제동의 끼를 최초로 발굴한 사람은 대구 향토사단 훈련소 중대장이었다.

    2군사령부 문선대 생활

    -연예계 생활도 안해본 사람이 2군사령부 문선대에는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나는 독자(獨子)인 데다 아버지 안 계시고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니 군면제 사유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18개월 단기복무 대상입니다.

    훈련소 있을 땐데 무척 더운 날 교관과 조교가 제의를 했어요. 누구든지 나와서 웃기면 1시간 훈련을 빼주겠다고. 훈련병들이 전부 경직돼 있어 결코 쉽지 않을 일이었죠. 난 너무 더웠고 훈련받기 싫었어요. 그래서 나가서 30분 정도 교관과 조교 흉내를 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중대장이 문선대에 가라고 추천했죠.

    문선대에 들어가려면 기타나 드럼 같은 악기를 잘 다루거나 레크리에이션 강사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하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생긴 게 웃긴다’는 이유로 뽑혔습니다. 안경을 벗어봐라 해서 안경을 벗었는데 고참들이 자지러지게 웃었습니다.

    첫 공연에서 맡았던 역할이 뭔지 아세요. 사회자가 얘기를 하다가 재미없으면 나를 보고 ‘안경 벗어’합니다. 그러면 가만히 서 있다 안경을 벗는 역할이었죠. 군인들이 무척 웃었습니다. 짧은 군생활이었지만 많은 걸 배웠죠.”

    그는 문선대 공연에서 MC로 데뷔해 극한상황에서 사회 보는 법에 숙달했다.

    “사병 1500명이 먼지 날리는 곳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달랑 마이크 하나만 줍니다. ‘반갑습니다’ 하면 웃지도 않고 전부 멍하니 쳐다보고 있습니다. 정말 웃기기 힘든 상황이죠.

    무조건 그 부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부터 족쳐놓고 시작합니다. 계급장을 떼놓는 거죠. 대대 행사면 대대장, 사단행사면 사단장, 군사령부 행사면 사령관님까지 무대에 올립니다. 그때 내가 일등병 때였죠. 사단장한테 ‘오늘은 마음껏 놀아도 되겠습니까. 사실 영창 갈 각오로 말씀드리는 겁니다’고 말하면 사단장이 빙그레 웃어요.

    ‘사단장님, 오늘 노래 잘하는 분 있으면 무조건 휴가 보내준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사단장님이 직접 심사해주세요. 잘하면 엄지손가락, 그저 그렇다 하면 주먹, 노래하는 거 보니까 영 안 되겠다 하면 그어주세요(손가락으로 목 자르는 액션). 목숨 걸고 한번 놀아보겠습니다. 대신 오늘 이 두 시간만큼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제 말에 동의하시면 사단장님 박수 한번 쳐주시기 바랍니다.’

    사단장이 박수치고 그 옆에 대령 중령들이 따라서 박수를 치면 그날 분위기는 끝납니다. 상명하복 체계의 조직에서는 일단 제일 높은 사람한테 허락을 받아놓고 군인들이 좋아하는 휴가증을 상품으로 걸어야 합니다.

    전차부대에 갈 때는 전차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갔습니다. 전차부대에 가면 중대장이 아니고 전차장이거든요. 의사들 행사에 가게 되면 병원 용어를 공부합니다. 다른 공연에서 ‘혈압 오르게 하지 말아요’ 할 것을 의사 간호사 모임에서는 ‘BP(Blood Pressure) 올라가네요’합니다. 그러면 더 웃죠. 검사들 모임 사회 볼 때는 노래 못하면 영장실질심사도 없이 법정구속하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언제 그 사람들이 구속시킨다는 협박을 당해봤겠어요.”

    “그녀는 내 인생의 물푸레나무”

    -텔레비전에서 가족 얘기를 자주 한다던데요. 어머니가 재밌는 분이라면서요. 어떤 분입니까.

    “72세이신데 전형적인 농촌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침 없고. 당신께는 결례되는 표현이지만 약간 주책 없으신 분이죠.”

    김제동의 어머니와 누나들이 ‘아침마당’에 생방송으로 출연하기 위해 대구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다 휴게소에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 일행을 만났다. 어머니는 인파와 경호원들을 헤치고 당선자에게 접근했다. 경호원들이 제지하자 당선자가 ‘칠순 노인인데 놔두라’고 했다. 어머니는 당선자와 악수를 하고 나서 아들 이름을 대면 모를 것 같으니까 ‘윤도현 아느냐’고 물었다.

    “노 당선자가 ‘아, 도현이 어머님 되세요’ 하니까 어머니는 윤도현 프로에 나오는 김제동 엄마라고 했대요. 당선자가 ‘어머니, 정말 죄송한데 김제동은 모르겠습니다’면서 ‘알아보겠다’고 하더래요. 김제동이 별로 유명하지 않을 때였으니까요. 어머니는 계속 당선자를 붙잡고 잘난 아들 덕에 내일 ‘아침마당’에 출연하는데 ‘꼭 보시소’라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대통령이 볼 테니 방송에 나가 잘해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씀했어요. 실수하면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정작 실수는 어머니가 했어요.”

    인터뷰가 끝나면 카메라 없는 쪽으로 돌아나와야 되는데 어머니는 카메라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그 바람에 어머니의 코가 2, 3초 동안 클로즈업되는 방송사고가 생겼다.

    “첫사랑 데리고 집에 인사시키러 갔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오셔서 그 여자의 손을 잡고 한 첫마디가 ‘고맙다’였죠. ‘우야든지 마음 변하지 말고 잘 만나봐라. 우야다가 야 같은 놈을 만났노’ 하는 식이죠.

    대구에서 반지하 셋방에 살다가 18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갔을 때 어머니가 고집을 부려 아파트에 어머니 이름으로 문패를 달았어요.”

    -여성에게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안 하니까 차일 기회는 없었겠네요.

    “1998년에 가슴 아픈 실연을 했어요. 예쁘고 참하고 똑똑한 여자였어요. 계명문화대학 축제 때 만났죠. 2년 가량 사귀고 나서 싫다며 떠나갔어요. 그녀는 내게 세상이자 우주였습니다. 이 여자 얼굴 보라고 낮이 있는 것 같고 이 사람 잠자고 편하게 쉬라고 밤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여자가 김형을 버릴 때는 이렇게 출세할지 몰랐겠지요. 지금 아마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은 고맙게 생각해요. 옛날에 어사가 장원급제해서 고향마을에 돌아오면 집 앞 물푸레나무한테 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훈장들이 꺾어서 회초리 만드는 나무지요. 회초리 맞아서 열심히 공부해 출세했으니까요. 그녀는 내 인생의 물푸레나무였습니다. 마음이 몹시 아팠지요.”

    -김형이 유명해진 뒤에 혹시 연락 안 왔어요?

    “결혼했을 거고 잘 살겠죠. 진짜로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 없었으면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도 몰랐을 겁니다.”

    -현재 사귀는 여자는 있습니까.

    “중매 좀 서달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김광석 노래 너무 좋아

    김제동의 부친은 당시 농촌마을에서는 드물게 고등학교를 나온 ‘인텔리’였다.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수재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전언이니까 수석졸업은 조금 과장된 것일 수 있다고 토를 달았다.

    “방송국에서 상 받을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죠. 야속하기도 하구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면서 아버지 없는 사람 손 들라고 하거든요. 모두 눈 감으라고 한 뒤 손 들게 하지만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궁금해서 눈을 온전하게 감나요. 교사는 아이들을 따로 불러서 생활기록부를 적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동을 엄하게 키웠다. 동네에서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가 한번이라도 어머니 귀에 들어갔다 하면 그날은 제동이 죽는 날이었다. 동네 어른을 미처 못 봐서 인사를 못 드린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은 제동이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진짜로 아들을 낳은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셋째누나 때부터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가 딸을 낳은 것을 알면 속상해서 술을 마시니까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저귀를 들춰보지 못하게 했다. 제동은 다섯째누나하고 일곱 살이나 터울이 진다. 그만 낳으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제동이 생겼다. 어머니는 임신 3개월째 되는 날 태아를 지우려고 병원에 가다가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되돌아왔다. 4개월째도 병원에 가다가 집에서 소가 새끼 낳는다고 해서 돌아왔다. 5개월째 될 때도 지우려고 했는데 외할머니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아기 지우는 약도 먹어보았지만 잘난 아들을 보려고 그랬던지 떨어지지 않았다. 6개월째 드디어 병원 안에까지 들어갔는데 의사가 그냥 낳으라고 했다. 산모가 위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동이 태어났다.

    애드리브의 達人, MC 김제동

    김제동은 실연의 아픔이 자신을 성숙시켰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진통이 온다는 어머니 말을 듣고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리고 사흘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네에 수소문을 해서 아들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번에도 속인다 생각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제동이 세상에 태어나 사흘째 되는 날 고추를 확인하고 나서 3일간 동네 잔치를 벌여 집안살림을 거덜내다시피 했다.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에 ‘우리 아들 고추 한번 봐야겠다’고 하시는 걸 어머니가 ‘이 양반 주책 그만 부리라’고 핀잔을 주어 옆방으로 건너가 잠드셨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늦게 둔 아들을 한번 보러 오셨던 모양이라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십니다.”

    -홈페이지에 가수 김광석 추모 코너가 있는 게 특이하더군요.

    “김광석을 좋아합니다. 그분이 생존해 있을 때는 못 만나봤습니다. 그분 노래는 듣는 이를 깊은 슬픔의 심연으로 데리고 내려갑니다. 희망을 주는 노래도 있지만 주로 이별과 실연이 주제죠.”

    김광석은 김민기와 한대수의 맥을 잇는 가수로 인정받으며 1990년대에 포크 음악을 이어갔다. 대학 4학년 때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하다 1984년 대학가 운동권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결성되면서 무대에 섰다. 1989년 솔로로 데뷔해 2집 ‘사랑했지만’이라는 곡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1989 ~95년 1000회 라이브 콘서트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6년 자살로 31세의 생을 마감했다.

    김제동은 노래방에 가면 김광석 노래만 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바람이 불어오는 곳’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사랑했지만’…. 김광석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며 부른다. 노래 솜씨는 그저 그렇다.

    “극도로 슬프면 엉엉 소리내 울기보다 슬픔을 목까지 꽉 채워놓게 되지요. 입 꽉 깨물고 눈물 뚝뚝 떨어지는 게 더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잖아요. 김광석 노래가 그렇습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뜨고 나서 돈을 꽤 모았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CF를 3편이나 찍었으니 강남에 좋은 집 한 채 살 돈은 벌었을 것 같은데요.

    “누나들을 도와주고요. 어머니 집 융자 4500만원 남아 있던 것 갚아드렸고. 에이스미디어와 수익 배분을 해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고…. 그 외에는 돈 쓰는 데가 없으니까 꽤 모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잘살지는 않을 겁니다. 내 나름대로 구상이 있어요.”

    “옷 사는 돈이 제일 아깝다”

    -한달 용돈은 얼마나 써요. 순수한 개념의 용돈 말입니다.

    “수입은 어머니가 관리합니다. 일단 어머니 통장으로 집어넣고 용돈을 타 쓰죠. 연세 드신 분들은 그래야 포만감이 생깁니다.”

    -효자네요.

    “다들 그러더군요. 옷 사는 돈이 제일 아깝습니다. 방송에서는 협찬해주는 옷을 입고 나서 돌려주니까 일주일에 두 벌 정도 갈아입으면 돼요. 술값이 꽤 들어가는 거 같습니다. 그래봐야 소주값이지만. 한달에 한 40만~50만원 쓸까요. 서민들은 어렵게 사는데 한달에 용돈을 50만원 쓴다고 하면 욕먹지 않을까요. 돈 쓸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일주일에 6일 일하고 하루 쉬는데 소주를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습니까. 애인이 없어 영화도 혼자 보러 가지요. 애인 옷 사줄 일도 없고.”

    제동은 서울 마포의 28평짜리 아파트에서 자취를 한다. 보증금 5000만원에 월 60만원짜리 월세다. 자동차는 소렌토. 하루 한 끼는 라면이다. 김치 한 보시기 놓고 라면에 밥 말아서 먹는 것이 김제동의 자취방 메인디시다.

    -외식할 때 무슨 음식을 좋아합니까.

    “주로 청국장, 된장찌개, 김치, 두부.”

    김제동은 술을 좋아한다. 소주 세 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

    “소주 안주로 두부김치를 좋아합니다. 고기는 즐기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동물 두드려 잡는 걸 워낙 많이 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이 중요하거든요. 돈에 관한 철학은….

    “용돈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고 내가 벌어 내가 썼으니까 어려서부터 돈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허투루 쓰지 않고 필요한 곳에만 쓰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거기서 경제적인 가치가 창출되니까 너무나 좋습니다.”

    -평소 독서를 즐긴다던데 어떤 종류의 책을 주로 읽습니까.

    “가리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만 감성적인 책을 좋아합니다. 남녀 사랑 얘기나 수필을 좋아하죠. 최근에 작가 이외수씨가 펴낸 ‘바보 바보’라는 책을 읽었어요. 에세이죠. 이외수씨 글을 즐겨 읽습니다. 라디오 구성작가가 쓴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책도 재밌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상반되는 심리상태를 100가지 정도 적어놓은 책입니다.”

    -국내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감명 깊게 읽은 것이 있다면….

    “김훈의 ‘칼의 노래’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전쟁에서 이기고 영웅으로 추앙받는 장수가 아니라 전쟁통에 휩쓸려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참 좋았습니다. 원래 이순신 장군을 좋아했어요.”

    김제동은 독서 외에 영화관람이 취미다. 새로 나오는 영화는 놓치지 않고 본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는 이나영 정재영 주연의 ‘아는 여자’가 좋았단다. 몇 달 전에 본 ‘아홉 살 인생’도 좋았고 영화배우 중에서는 송윤아를 좋아한다. 영화 ‘광복절 특사’와 얼마 전 끝난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에 출연한 여배우다. 김제동과 동갑이다.

    -공동 MC를 주로 하던데 혼자서 토크쇼를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아직 그 정도 능력은 안 됩니다. 공동 MC라는 것도 사실 부담스럽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역할은 보조 MC입니다. 선배들 받쳐주고 그 옆에서 한마디씩 하는 거죠. MBC ‘까치가 울면’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1년 동안 혼자서 진행을 했습니다. 농촌마을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죠. 내가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프로그램이 좋았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입니까.

    “‘윤도현의 러브레터’ 100회 기념 기자회견에서 윤씨가 탄핵에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했죠. 기자들이 내게도 의견을 묻길래 ‘국민 여러분이 내 얼굴을 보면서까지 그런 걸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이 있다. 총선 때 표로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공인으로서 사회적 논쟁에 참여할 수도 있겠지만 남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인은 그냥 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미래 설계에 대해서….

    “나로서는 과분한 위치에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뭔가 돌려드릴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TV를 봐주신 분들, 내 얘기를 듣고 웃어주신 분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방향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이 받았으니까 힘닿는 데까지 돌려드리려고 합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승엽 선수와 친하게 지낸다지요.

    “대구야구장 장내 아나운서 할 때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연락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마 3번 지명타자로 나왔을 텐데…. 어제는 대타로 나와 솔로홈런 쳤고요. 케이블TV로 이 선수 경기 중계방송은 빼놓지 않고 보는 편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겐 낯가림

    -시간이 돈일 텐데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인터뷰를 잘 못해드린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인터뷰하러 오시는 분들이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1 대 1로 만나거나 처음 뵈면 잘 웃기지 못합니다. 평소엔 말이 없거든요. 소주 두 병 정도 먹으면 몸속의 세포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세 병 정도 먹으면 말이 막 나오죠.”

    -소주 세 병 정도 마시고 인터뷰를 시작할 걸 그랬나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저 친구가 떴다고 무게 잡나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제가 처음 뵙는 분들하곤 눈을 잘 못 마주칩니다.”

    실제로 김제동은 수줍음을 탔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온다 싶으면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웃었다. 얼굴에 아직 여드름이 남아 있다. 이런 사람이 수만 명을 한꺼번에 웃기고 울린다.

    “마이크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마이크만 잡으면 힘이 납니다. 요즘 방송국에서 쓰는 핀 마이크는 왠지 정이 안 가요. 나이가 들어도 마이크는 못 놓을 거 같아요. 자동차에 마이크와 스피커 한 조 싣고 다니며 어디든 사람 모이는 데서 노래자랑 사회 같은 것을 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무명일 적에 대학교 축제에 가서 ‘반갑습니다. 김제동입니다’고 인사를 하면 서너 명 정도 박수칩니다. 5분 있다가 더 끌어들이고 20분 있다가는 절반을 끌어들이고 축제 끝날 무렵에는 완전히 하나가 돼 있습니다. 축제가 끝나 내가 관중한테 큰절을 올리고 일어서면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쳐줍니다. 그때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이화여대 정문 부근 낙지집에서 소줏병을 비우며 인터뷰를 마무리지었다. 상호는 기억나지 않는데 낙지집 주인이 미인이다. 낙지볶음을 2인분 시켰는데 3인분 가량 나오고 요리도 특별히 신경을 쓴 것 같았다. 학교 끝나고 어머니 일을 도와주러 온 딸(홍익대 국어교육과)은 “제동 오빠를 좋아한다”며 사인을 받았다. 어머니가 곁에서 “마음을 착하게 쓰니 복이 생기는 거다” 하고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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