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과 방패’냐 ‘항우와 유방이냐’. 행정수도 이전 찬반 양측의 최고 브레인으로 꼽히는 김안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과 최상철 수도이전반대국민연합 공동대표의 ‘40년 우정’.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직을 번갈아 맡으며 교분을 다져온 두 사람을 갈라놓은 애증의 드라마.
김안제 교수
최상철 교수
다른 점이 있다면 추진위원회측에 수도이전 대상 지역인 충청권 소재 대학 및 연구기관 소속 전문가가 집중돼 있는 반면 국민연합측에는 서울 및 수도권 소재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 및 전문가가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200여명의 전문가집단 중 양측을 대표하는 ‘브레인 중의 브레인’은 단연 김안제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민간위원장과 최상철 수도이전반대국민연합 공동대표이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찬성과 반대로 갈려 매일같이 공방을 거듭하는 두 사람이 같은 대학 같은 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40년 동안이나 우정을 이어온 동료이자 동학(同學)관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김안제 위원장과 최상철 교수는 40년 전인 1963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김 위원장이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최 대표가 경북대 사대를 졸업해 학부 시절에는 인연이 없었지만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에 함께 입학하면서 ‘40년 질긴 인연’의 첫 단추를 꿰었다. 나이는 김 위원장이 세 살 위지만 대학원 입학으로 따지면 최 교수가 2년 선배. 그 후 최 교수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대학원 조교 자리를 김 위원장에게 물려주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돈독한 관계였다.
환경대학원장도 ‘바통 터치’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은 것도 최 교수가 조금 앞선다. 최 교수는 1971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전임강사를 거쳐 1973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김 위원장이 환경대학원 교수로 임용된 것은 이보다 1년 뒤인 1974년이다. 최 교수가 1984~86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을 지냈고 김 위원장이 곧바로 이어받아 1986년부터 환경대학원장을 지냈다.
도시계획, 환경, 교통관리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는 환경계획학과와 환경조경학과가 있다. 김 위원장과 최 교수가 속한 환경계획학과는 도시 및 지역계획 전공, 교통관리 전공, 환경관리 전공으로 나뉘는데 두 사람은 모두 도시 및 지역계획 전공이다. 지난 2002년 정년퇴임한 김안제 위원장이 환경대학원 명예교수로 재직중이고 최상철 교수는 정년퇴임을 몇 해 남겨두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전공과 경력이 비슷하다 보니 두 사람은 학교를 떠나 참여한 각종 학회나 연구활동에서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최 대표가 학교를 잠시 떠나 1992년부터 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았을 때 김 위원장은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을 맡고 있었다. 한국지방자치학회는 1995년 김 위원장이 회장을 지내고 나서 5년 뒤인 2000년 최 대표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락없이 ‘닮은 꼴’ 인생을 만들어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의 성격이나 일처리 스타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평가한다. 꼼꼼하고 원만한 일처리 방식도 닮았을 뿐더러 한번 일을 맡으면 책임지고 묵묵히 해내는 스타일도 비슷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 교수는 “맘에 안드는 사람과도 조목조목 따져가며 싸우기보다는 원만하게 넘어가는 것이 두 사람의 미덕”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환경대학원 선배교수였던 권태준 명예교수로부터 한날한시에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최상철 교수나 김안제 위원장 모두 소주를 좋아해 늘 어울려 다니는 ‘소주 친구’이기도 했다고 한다.
‘기록광(狂)’으로 알려진 김안제 위원장이 1996년에 펴낸 개인 수상집 ‘한국인의 삶과 발자취’에는 최상철 교수의 이름이 ‘몇월며칠 같이 골프치고, 몇월며칠 함께 술마시고…’하는 식으로 수없이 등장한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뒤 한 관계자가 김안제 위원장의 개인 수상집을 보고 “도대체 최상철이 누구길래 당신 책에 그렇게 많이 등장하느냐”고 물어봤다는 후문이다.
골프 입문도 동시에
흥미로운 것은 김안제 위원장과 최상철 대표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 및 지역계획 전공 교수진 7명 중 김안제 위원장과 서울시 행정2부시장을 맡고 있는 양윤재 교수를 제외하고는 5명 전원이 수도이전반대국민연합 회원 자격으로 수도이전 반대를 주장하고 나섰다는 점. 7명의 교수진 중 권태준 명예교수, 김안제 위원장, 최상철 교수, 김형국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임시 행정수도 건설작업에 함께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그중 3명은 ‘수도이전 반대’로 돌아섰고 김안제 위원장만 동료 교수들의 지원을 얻지 못한 채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수도이전 프로젝트에 관여한 것은 누가 먼저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정부의 수도이전에 반대해 헌법소원까지 낸 최상철 교수가 먼저다. 최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던 지난 1976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통해 청와대의 ‘밀명’을 받고 임시 행정수도 입지 선정 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최 교수의 회고담이다.
“1976년 현충일 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강의를 하고 있는데 교무과 직원이 강의실 문 밖에서 기다리면서 당시 윤천주 총장이 ‘총장실로 모시고 오라’고 했다는 거예요.”
윤천주 당시 서울대 총장은 고려대 출신이었다. 고려대 학장을 지낸 직후 공화당 사무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거치고 나서, 고려대를 떠난 뒤 12년 만에 서울대 총장을 맡아 학계로 다시 돌아왔으니 학교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공화당 실세 등 실력자들과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윤 총장이 맡았던 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뒷받침해줄 학자를 물색해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윤 총장을 포함해 공과대의 주모 교수와 함께 차를 타고 출발하길래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나도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까 김종필씨의 청구동 자택이었습니다.”
당시는 김종필씨가 국무총리직을 막 그만두었을 무렵이었다. 거실에 마주앉은 김 전 총리가 최 교수 앞에 꼬깃꼬깃 접힌 한 장의 지도를 내놓았다. 가장자리가 너덜거릴 정도로 접었다폈다 한 흔적이 있고 여기저기 뭔가를 구상하며 설계한 듯한 연필자국이 있는 낡은 지도였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는 북으로는 천안, 남으로는 대전, 그리고 동서로는 충주와 논산을 경계로 하는 충남권 일원이었다. 김 전 총리는 최 교수에게 “이 중에서 임시 행정수도가 될 만한 지역을 한군데 찍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워낙 급작스런 주문이어서 도시계획 전문가인 최 교수에게도 임시수도 건설의 ‘그림’이 쉽게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최 교수가 김 전 총리에게 배경 설명을 부탁했다. 당시 JP가 전한 박 대통령의 구상은 ‘지상포 화기의 사거리 내에 1000만의 인구를 둔다는 것은 안보전략상 문제가 있으므로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로 행정부 기능만 옮길 곳을 물색하겠다’는 것이었다.
청구동 거실에서 밀명을 받다
최 교수는 임시 행정수도 구상 그 자체보다 지도가 너덜너덜해질 만큼 박 대통령이 임시 행정수도 건설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는 데 놀랐다고 한다.
JP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포병장교 출신 아니냐, 포병장교는 독도(讀圖)법을 가장 먼저 공부한다. 때문에 박 대통령 역시 지도를 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 교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 채 안 되는 것이었다. 임시 행정수도 프로젝트의 발주자인 박정희 대통령측으로부터 ‘광복절 이전까지’라는 주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JP가 마련해준 남산 타워호텔 내 ‘안가(安家)’에서 40여일간의 강행군이 시작됐다. JP가 내밀었던 지도에 연필로 그어진 지역들을 샅샅이 현장답사하고 장단점을 분석해 18쪽짜리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를 JP를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난 뒤 최 교수는 한동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임시 행정수도 건설 구상을 밝힌 것은 이듬해인 1977년초 서울시 연두순시 과정에서였다. 최 교수의 기억에 따르면 서울시 순시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훗날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에게 문건 하나를 건네며 “이 안에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며 임시 행정수도 건설 작업을 지시했다. 수도 이전 문제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순간이다. 그때 박 대통령이 김재규 장관에게 건넨 문건이 바로 최상철 교수가 타워호텔 ‘안가’에서 만든 18쪽짜리 보고서였다.
70년대는 최상철 먼저 참여
김안제 위원장이 박정희 시대의 임시 행정수도 건설 작업에 참여한 것은 이보다 몇 달 뒤였다.
박 대통령의 지시 이후 임시 행정수도 건설 작업은 청와대 직속기구로 만들어진 중화학공업기획단에서 추진하게 된다. 기획단장은 오원철 경제 제2수석, 부단장은 훗날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낸 박봉환씨였다. 당시 중화학공업기획단은 각종 장치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국책 프로젝트는 물론 자주국력을 갖추기 위한 율곡사업 등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행정수도 이전이 안보 차원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기획단에 정책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주로 박봉환 부단장이 맡았다. 김안제 위원장 역시 박봉환씨의 요청에 따라 임시 행정수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김 위원장은 당시 연구실무반장 자격으로 1977~79년에 주로 임시수도 건설 비용 및 투자계획 등에 대한 추계 작업을 맡았다.
김 위원장은 “당시 수도이전 비용을 5조원 정도로 추산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 교수가 박 대통령의 밀명을 받아 극비리에 임시수도 입지 선정 작업을 맡았다는 사실을 안 것도 수도이전 작업에 참여한 지 한참 뒤인 1978년 무렵이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이력만 놓고 보면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신행정수도 건설 작업을 뒷받침할 전문가로는 두 사람이 가장 적격인 셈이다. 그러나 김안제 위원장은 28년 만에 다시 수도이전의 실무사령탑을 맡았고 최상철 교수는 28년 전 자신이 밑그림을 그렸던 수도이전 작업에 등을 돌렸다.
김 위원장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 뒤인 지난해 6월부터 신행정수도 건설추진 자문위원장을 맡다가 지난 4월 신행정수도특별법이 시행되면서 민간추진위원장을 맡아 행정수도 이전 작업을 사실상 진두지휘하고 있다.
반면 최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 작업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지난해 10월 ‘신행정수도 건설 재고를 촉구하는 전문가 포럼’을 만들어 이전 반대 여론을 조성해왔고 최근 헌법소원에 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두 사람의 경력이 증명하듯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수도이전 ‘적극 추진’과 ‘결사 반대’라는 상반된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은 자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금도 행정수도 관련 세미나에서 마주치면 두 사람은 ‘잘해보라’며 악수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서로 “잘해보소”
김안제 위원장은 “최 교수가 수도이전 반대운동에 앞장섰다는 것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할 무렵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반대운동을 하려면 특별법을 만든다고 할 때 했어야지, 이건 순서가 뒤바뀐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70년대 우리가 못 펼쳤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며 사십년 지기인 최 교수에게 신행정수도건설위원회에 동참할 것을 한 차례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교수로부터 수도이전 반대 입장을 전해듣고는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김 위원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임시수도 건설 작업을 할 때에는 국민투표 이야기는커녕 공청회도 제대로 없었다”며 수도이전 반대측의 ‘졸속 추진’주장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승복해야 한다. 헌재 판결에 따라서는 사업이 중단될 수도 있다”고 말해 여론몰이식으로 수도이전을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최 교수 역시 박정희 시대의 임시수도 건설과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최 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임시수도 건설 구상은 안보전략 차원에서 ‘임시로’ 수도의 행정기능만 옮기는 것이었으나 현재의 행정수도 이전은 행정부와 사법부를 통째로 옮기겠다는 것으로 당시 구상에서 변질돼도 이만저만 변질된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형국 교수도 “공간적 균형이 사회계층의 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균형발전’을 내세우며 행정수도를 옮겨보았자 결국 충청도에 땅 가진 사람만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편 김안제 위원장은 “나와 최 교수는 성격이 비슷하기 때문에 동반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하게 되면 초한지(楚漢誌)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처럼 무서운 상대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덧붙였다.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논란이 가열될 수록 사십년 지기인 두 사람의 ‘일합(一合)’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