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07-30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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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 ‘디앤무’가 발목을 잡더니 장마전선이 발걸음을 버겁게 했다. 내쳐 걸으려 했지만 이번엔 태풍 ‘민들레’가 앞길을 막아섰다. 3주 내내 ‘우중산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섰다가 어느 순간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신비로운 체험, 정상에 펼쳐진 초원지대와 아고산 식생대의 이국적인 정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비구름이 몰려드는 도솔봉.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자료가 있다. 바로 청암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와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로 둘 다 조선후기에 완성됐다. 성리학이 점차 쇠퇴하고 실사구시의 학풍이 유행하던 시절, 두 사람이 내놓은 책과 지도는 한국 지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지리학이 학문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에 순전히 다리품과 땀방울로 이루어낸 두 작품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디지털시대의 후학들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택리지를 집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시절 이중환은 몰락한 사대부였다. 이중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던지 후세의 사가(史家)는 그의 귀양지마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택리지의 발문에 나오는 ‘떠돌아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라는 문구를 통해 그의 말년이 ‘동가숙서가식’의 연속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놀랍게도 그토록 비참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택리지는 완결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사대부에 대한 유별난 자부심과 특정지역에 대한 지독스런 편견을 걸러낼 수만 있다면, 택리지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조명될 만한 인문학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짐승도 인간의 길로 다닌다

    김정호의 생애는 더욱 초라했다. 평생 가난하고 신분마저 미천했던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와 가까웠다는 사실 정도다. 다만 대동여지도의 치밀함으로 미루어 그가 한반도 구석구석을 수차례 답사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야사에는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천기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김정호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도제작에 나섰던 고산자의 힘은 무엇일까?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한반도 남쪽의 고을을 바라볼 때마다 김정호의 열정에 고개를 숙이곤 한다.



    6월19일 새벽. 충북 단양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양역 대합실에 앉아서 잠시 유로2004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보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기다린다고 그칠 비가 아니었던 탓이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자니 택시기사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방향을 살폈다. 그러고는 필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날도 좋지 않은데 단양유황온천에서 몸이나 푸는 게 어떠십니까?”

    택시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섰다. 거센 빗줄기에 밀려 나무와 풀이 등산로 쪽으로 비스듬히 누웠고, 덕분(?)에 필자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흥건히 젖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새벽길은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준다. 특히 비 내리는 새벽길은 묘한 긴장감까지 더해진다. 옥수수 잎을 타고 흐르는 굵은 물방울이 랜턴 불빛에 반짝이고, 돌덩이를 타고 넘치는 계곡물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물이 적신 자리에 차츰 땀이 흘러들어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무렵 백두대간 주능선에 솟은 싸리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싸리재부터는 걷기에 편안한 오솔길이다. 어느새 어둠은 걷히고 아침이 찾아왔다. 산등성이 위로 구름덩어리가 이러저리 몰려다녔다. 한참 구름의 흐름을 눈으로 쫓으며 내달리는데 코앞에서 산토끼가 필자와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잠시 후 산토끼가 등산로에서 벗어나 수풀 속으로 숨어들자마자 10여 마리의 꿩이 푸드덕거리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침의 고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궂은 날씨에 산을 타다 보면 이렇듯 짐승들을 괴롭힐 때가 종종 있다. 짐승들도 되도록 편한 이동로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등산로를 자주 이용한다. 산속에서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짐승의 배설물이 등산로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묘적봉(1148m)으로 가는 길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도솔봉(1314m)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적당한 곳에 앉아 구름이 이동하면서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절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빗줄기가 워낙 세서 한곳에 오래 머물기가 힘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도솔봉 정상은 난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나무계단이 설치돼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도솔봉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인데,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필자는 이곳에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지도가 빗물에 젖을까봐 갈림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느 정도 가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도솔봉 못미친 지점에서 필자를 지나쳐간 등산객이 저만치 앞에서 길을 열었고, 이따금 백두대간 표지가 나타났던 것. 필자는 그가 선택한 길이 맞겠거니 생각하고 천천히 그 뒤를 밟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에 새겨두었던 지도와는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없던 계곡이 등장하고 한참 전에 지나친 도솔봉을 안내하는 표지판까지 서있다. ‘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발길을 되돌릴 무렵 먼저 내려간 등산객이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도솔봉에서 백두대간 주능선이 아닌 비상탈출로를 타고 하산했던 것이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안양정에서 굽어 본 부석사 경내와 소백산 전경.

    경기도 분당의 느림보산악회에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있다는 중년 남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산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필자도 그의 뒤를 따랐다. 빗속을 뚫고 2시간 이상 올라선 뒤 다시 주능선으로 달리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물이 불어나고 있는 사동리 계곡을 따라 걷다가 길가의 민박집에서 맥주로 갈증을 달랜 뒤 대강면 쪽으로 빠져나왔다. 대강면에서 버스를 타고 단양으로 향하는 동안 차창 왼편에 펼쳐지는 백두대간 주능선엔 먹구름이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범인의 눈에도 구름의 양태는 예사롭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제6호 태풍 ‘디앤무’는 단양지역에 평균 350mm가 넘는 장대비를 쏟아 부었다.

    6월26일 오후. 단양읍에서 대강면을 거쳐 사동리로 향했다.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엔 상처가 가득했다.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 돌덩이들이 길을 막아섰다. 택시기사는 비 피해보다도 이기적 세태를 꼬집었다. 그에 따르면 폭우로 인해 단양지역의 어느 양어장이 넘치면서 물고기들이 관공서 앞마당으로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복구에 앞장서야 할 공무원들이 물고기를 잡아먹고 자랑까지 했다며 육두문자를 토해냈다. 발동이 걸린 택시기사는 화살을 중앙부처 공무원에게 돌렸다. 이번엔 김선일씨 사망사건과 관련한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응이 타깃이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민심의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사동리에서 도솔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우 미끄러웠다. 도솔봉에 오르니 또다시 비구름이 몰려왔다. 이번엔 태풍이 아니라 장마전선이었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퍼부을 것 같아 서둘러 죽령으로 향했다. 구름은 봉우리를 넘어설 때마다 드리웠다 걷히기를 되풀이했다. 장마전선이 변덕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백두대간은 1286m봉에서 서진(西進)을 멈추고 북으로 방향을 튼다. 편안한 내리막길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걸어가는데 중턱의 갈림길에 걸린 표지판이 발길을 붙잡았다. 뭔가 사연이 있을 법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여기 산을 좋아하던 우리 친구 종철이가 백두대간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종철아 편히 쉬어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백두대간에 묻힌 고인에게 예를 표했다.

    멀리 죽령이 눈에 들어왔다. 죽령은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사람의 정취를 느끼면서 걷고 싶다면, 5번 국도가 지나는 죽령고개에 이르기 직전 오른편으로 발길을 돌리는 게 좋다.

    지도상으로는 죽령을 통과하면서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을 건너게 되는데, 모두 산을 뚫고 지나는 터널이어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중앙선은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따라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 착공돼 오랫동안 산업철도로서 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2001년 완공된 중앙고속도로는 한반도 남쪽 동부지역의 도시화를 재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라진 소백산의 반딧불이

    죽령에서 소백산 천문대로 올라가는 길은 지루한 시멘트 포장도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백두대간 마루금은 시멘트길과 산길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7km가 넘는 오르막길을 혼자서 걷다보니 평소보다 빨리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잠시 산길에 주저앉아 간식을 먹으며 숨을 고르는데 발밑으로 새끼 독사 두 마리가 연달아 지나갔다. 순간 머리카락이 주뼛 서는 듯했다. 독사는 언제 봐도 소름이 돋는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되새겨보니 산에서 뱀을 만난 지도 참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백산 천문대가 가까워질 무렵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다행히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구름 속의 산책이다. 10m를 걷고 나서 돌아봐도 지나온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 후 구름 속에서 손을 꼭 잡고 걸어 내려오는 젊은 연인들이 보였다. 이보다 더 환상적인 데이트가 있을까 싶었다. 구름으로 덮힌 천문대를 지나 연화봉(1383m)에 이르자 구름 위로 듬성듬성 솟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연화봉은 해마다 5월이면 철쭉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필자는 연화봉에서 희방사 쪽으로 서둘러 하산했다. 일반적으로 백두대간 종주자들은 죽령에서 끊고 다음날 고치령까지 내달린다. 소백산 주능선에서 도중에 내려서면 상대적으로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능선을 단번에 주파할 경우 희방사-연화봉 구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다. 필자는 그것이 아쉬워 남들이 마다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두운조사가 창건한 절로 훈민정음 원판과 월인석보를 보관하던 유서 깊은 고찰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문화재가 모두 소실되는 시련을 겪었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높이가 25m에 달하는 희방폭포.

    희방사 코스의 명물은 바로 희방폭포. 높이가 무려 28m에 달한다.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폭포수 앞에 이르자 누군가 먼저 와서 물줄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10년 만에 소백산을 다시 찾았다며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고 있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산길에서 랜턴을 켤까 말까 망설이다가 배낭에 집어넣었다. 필자와 나란히 걷던 그가 풀숲의 반딧불을 보고 탄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소백산을 영롱하게 물들였다는 반딧불. 그러나 지금 우리는 겨우 반딧불 하나를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이 어디 반딧불뿐일까마는, 우리는 너무 빨리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27일 새벽, 일찌감치 눈을 떴다. 배낭을 꾸려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흩날렸다. 오늘의 목적지인 고치령까지는 빨리 걸어도 10시간 이상 걸린다. 비가 내린다면 2시간 남짓 지체될 수도 있다. 필자는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희방폭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침에 바라보는 폭포는 또 다른 기품이 있었다. 저녁의 폭포가 소리에 녹아든 실루엣이라면 아침의 폭포는 소리를 깊숙이 빨아들인 한 폭의 산수화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의 물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마지막으로 긴 숨을 토해내는 것이니, 희방폭포는 소백산의 에너지가 결정적으로 폭발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희방사 대웅전 앞에서 잠시 예를 갖추고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갔다. 희방사에서 깔딱고개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라 몇 번이고 거친 숨을 토해내야 한다. 오죽했으면 깔딱고개라 했을까. 필자보다 100m 앞에서 걸어가는 중년부부의 발걸음이 꽤나 힘겨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깔딱고개에 이르러 그 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소백산이 처음이라는 그들은 구름 낀 소백산의 풍광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에게 연화봉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코스를 추천했다.

    일단 깔딱고개에 올라서면 연화봉까지는 무난하게 내칠 수 있다. 연화봉 정상에 도착했을 무렵 비는 거의 그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를 뿌리던 구름은 산허리쪽으로 밀려나면서 또 하나의 비경을 연출했다. 아침 일찍 연화봉에 오른 등산객들은 구름과 산의 어우러짐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구름의 이동이 어찌나 심하던지 소백산 천문대가 수초 간격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연화봉에서 제1연화봉(1394m)을 거쳐 비로봉(1439m)으로 가는 동안에도 구름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섰다가도 어느 순간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신비로운 체험…. 만일 중국의 시성 이태백이 이 자리에 있다면, ‘산중문답(山中問答)’의 그 유명한 마지막 시구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을 읊지 않았을까 싶었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 주변은 유럽의 초원지대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등산로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아고산 식생대가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준다. 산수를 보는 눈에서 세계의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았던 조상들이 이런 기이한 전경을 보고 침묵했을 리 없다. 비로봉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문호 서거정이 남긴 시구가 새겨져 있다.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경기도 이천에서 왔다는 5명의 등산객은 비로봉 정상에서 막걸리를 잔에 따르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소백산에 20번째 오른 날이라고 했다. 그들에게서 막걸리를 한잔 얻어 마시고 있는데, 이번엔 20대 중반의 여성이 비로봉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소백산만 100번쯤 올랐다고 했다. 이번엔 그녀가 막걸리를 받아 마셨다. 필자는 소백산 마니아들이 소백산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를 잠시 엿들었다. 마니아는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필자가 구름에 반해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구름에 가려진 풍광을 더듬고 있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묻힌 땅

    비로봉에서 국망봉(1420m)으로 가는 동안 또 한 차례 비구름이 몰려왔으나 이번에도 엄포만 놓고 사라졌다. 구름 낀 하늘 사이로 햇볕이 비치고 이따금씩 비가 뿌리는 기이한 날씨였다.

    국망봉은 소백산 봉우리 가운데 가장 사연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이곳 국망봉에 올라 옛 도읍지인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배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이곳에서 이퇴계와 선조대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국망봉에서 상월봉(1394m)을 지나는 길에 하늘이 갑작스레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헛기운만 쓰겠거니 싶었으나 잇따른 천둥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곧바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장마전선이 전열을 가다듬고 북상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번 퍼붓기 시작한 비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상월봉에서 마당치로 이어지는 코스는 표고차가 크지 않아 빗속에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마당치에서 고치령으로 가려면 1032m봉을 지나야 한다. 다행히도 이 구간에 이르자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고치령으로 떨어지는 내리막길에서 약초꾼과 등산객을 차례로 만났는데 그들은 전혀 비를 맞지 않은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비에 흠뻑 젖은 필자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거 참. 방금 전에 내려간 사람은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쯤 되면 소백산의 날씨가 얼마나 기이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고치령은 힘 좋은 지프라야 겨우 올라설 수 있는 험준한 고개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샘물이 있고, 소로를 따라 영월 쪽으로 두어 시간 들어가면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묘가 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반군에 투항한 죄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는데 뒷날 그는 집안의 내력을 모른 채 할아버지의 죽음을 조롱한 시구로 장원급제했다. 이후 평생 자책감에 시달리고, 결국 모든 걸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객사한 시대의 풍운아가 바로 김삿갓이다.

    공중에 뜬 돌 ‘부석’

    7월4일 아침.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북 풍기역에 내렸다. 아내는 제7호 태풍 ‘민들레’가 빠르게 올라온다며 한사코 산행을 말렸다. 하지만 필자는 현지에 가서 날씨를 보고 판단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풍기역엔 예상대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주일 전 고치령에서 인사를 나눴던 택시기사는 “새벽에 올라간 사람들도 비바람 때문에 그냥 내려왔다”며 산행 포기를 권했다. 3주 연속 주말마다 태풍과 장마전선을 만나는 인연이라니….

    곧바로 서울행 기차에 오르자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부석사(浮石寺)로 향했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을 따라 풍기 땅을 지나는 동안 꼭 한번 들르고 싶었던 곳이다. 택시기사는 부석사 얘기가 나오자 천년 세월의 전설과 역사를 두서없이 풀어놓았다. 그만큼 부석사는 풍기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부석사에서 유명한 것은 역시 고려시대의 목조건축물 무량수전이다. 하지만 무량수전에 먼저 다가서면 다른 보물들이 안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부석사를 제대로 살피려면 외곽부터 천천히 챙겨본 뒤 무량수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부석사의 부석(浮石)은 말 그대로 뜬돌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교도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특기할 것은 최근까지도 무량수전 뒤편의 바위가 공중에 뜬 모양으로 남아 있는데, 실제로 여러 사람이 명주실을 바위 사이로 통과시켜 뜬돌의 실체를 확인한 바 있다.

    부석사 입구의 오른쪽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6개로 갈라진 벽화(국보 제46호)가 보존돼 있는데 본래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에 있던 것을 누군가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해체한 것이라고 한다. 벽화는 불가의 천신과 사천왕상을 그린 것으로 조사당에 머물렀던 의상대사를 호위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이퇴계가 지은 의상스님의 지팡이에 대한 시도 남아 있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흥미롭다. 의상스님이 평생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부석사 조사당 앞에 꽂아놓자 거기서 꽃이 피고 잎사귀가 달렸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지금도 조사당 앞에는 선비화(禪扉花·학명은 골담초)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산 뒤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무량수전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우리 문화의 보물이다. 많은 사람이 무량수전 하면 평생 문화재보호에 힘쓰다 돌아가신 최순우 선생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떠올린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취해본 사람이라면 최순우 선생이 남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잊지 못할 것이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안양문은 무량수전 앞의 건물로 조선시대에 사명당이 중창했다).

    부석사에서 풍기 방면으로 10여분을 달리면 순흥면이 나온다. 이곳에선 현재 ‘영주선비촌’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순흥지방은 단종 복위를 시도했던 선비들이 세조에 의해 무참하게 참살당한 정축지변의 현장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희생자들의 피가 무려 20리를 흘러갔다고 한다. 그 피가 멈췄다는 지점의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정축지변 이후 쇠락한 순흥지방은 228년이 지난 숙종 9년에 이르러 ‘의거의 요람지’로서 명예를 회복했다.

    선비촌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 영남 사림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이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바로 소수서원의 시작이었다. 소수서원은 명종이 직접 현판을 내리고 노비와 전답을 지원한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1871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은 27개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원군의 핍박을 견뎌낸 27개 사액서원의 지역별 분포다. 자료를 보면 전국적으로 경상 10, 경기 8, 강원 2, 충청 2, 전라 2, 함경 1개의 사액서원이 남았고 평안도와 황해도는 하나도 없다.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하는 과정에 영향력 있는 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최후까지 버틴 27개 사액서원은 조선시대의 지역적 편중현상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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