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에도 ‘한강투신’이 유행했다. 지난 100여년 동안 국운이 기울면 여지없이 자살자의 수도 느는 추세를 보였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한국인은 죽음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생계형 자살이다.
‘자살장으로 화한 한강’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1922년 5월16일자 보도. 최근 한강투신 자살자가 늘자 경찰은 한강 주변 순찰을 강화했다.
그런데 정 회장은 ‘왕(王)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업을 계승한 재벌기업의 황태자이며, 정권과 더불어 민족통일사업을 추진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가 자살을 했으니 이는 자살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정 회장은 ‘나약함’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자살하도록 만들 만한 위치에 있었을 것 같은 인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정 회장의 자살 뒤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자살이 뒤를 이었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 초 강명화(康明花, ?~1923)의 자살 사건과 비슷하다. 유명한 미기(美妓)였던 강명화는 양반 부호의 외아들 장병천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쥐약을 먹고 죽었다. 그러자 많은 젊은이들이 강명화를 따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렸다. ‘연애의 시대’였던 1920년대 초 벌어졌던 이야기다.
정 회장의 자살 뒤 목숨을 끊은 대우건설 사장, 부산시장, 전남도지사, 파주시장 같은 이들은 사회의 ‘모범’으로 평가받아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사회적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던 권력자들이었다. 타인들은 그들이 지녔을 내면과 자의식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죽음을 초래한 모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지도층이 자살하는 이유
자살자들은 모두 외로운 단독자다. 자살을 선택하는 순간 이들은 모두 천애고아가 된다. 이들은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맞이하여 자신의 인간됨을 최후로, 외롭게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혼자가 되어 유언이 적힐 백지를 내려다봐야 하고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이나 강물을 쳐다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살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다. 그 불행과 우울은 아무도 모른다. 그 마음은 온전히 자살자만의 것이다.
부모나 자식도, 친구나 애인도 그 순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라 한들 자살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다 알 수가 없다. “자살자의 심리세계를 아무리 재조합하고 싶어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실마리들은 언제나 간접적이고 부족하다.”(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남겨진 이들에게 모든 자살이 의문사가 되고, 큰 마음의 상처가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었다는 배신감과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상승작용하며 자살자 주변의 살아 있는 사람들을 크게 당혹케 한다.
그러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것도 전염성이 매우 높은 사회적 현상이다. 자살이 모방·복제되고 번져나가는 현상을 가리켜 흔히 ‘베르테르(Werther) 효과’라고 하는데, 베르테르는 유부녀 로테를 사랑하다 권총 자살한 괴테의 낭만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그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인데 괴테의 소설을 읽은 많은 독일 청년들이 베르테르를 흉내내며 죽었다.
오늘날 한국에선 사장님도 시장님도 살아가기 힘겹다. 그 존재도 외롭고 마음도 위태롭다. 사회지도층도 두부처럼 무르고 풀꽃처럼 여리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삶은 허망하다는 점을 ‘지도층의 자살’로부터 새삼 배우게 된다. 자살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교훈적인 면이 있다.
자살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이다. 생을 유지해가는 동력이며 생 그 자체이기도 한, 삶에의 본능을 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문화권에서 자살은 매혹적이면서도 신비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쉽게’,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자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생의 의지는 자동적이며 일상적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밴 이 의지와 공포를 모두 단절시키는 자살에의 의지를 갖기란, 그리고 그것을 밀고 나가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자살은 문제적인 행동이다. 자살은 이상(異常)심리학의 영역에서 다뤄지며, 자살기도자는 정신과의 치료대상이다. 대부분의 철학과 거의 모든 종교는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한다.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물질들
한편 자살은 가장 실천적인 행위다. 자살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 자살하고자 마음먹는다는 것, 자살을 실제로 기도한다는 것, 그리고 자살에 성공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살아가는 일에 지칠 때 누구나 한번 쯤은 자살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리고 그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자살에 성공한다. 미수에 그친 자살기도자 가운데 14%만이 다시 자살을 시도한다고 한다.
자살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자살은 사고 영역의 문제며 철학적 문제다. 어떤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자살과 결부될 수 있다. 인간의 ‘고독한 실존’도 자살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살은 문학과 철학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자살은 심리학적 현상이다. 심리와 사고는 서로 다른 것인데,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심리는 때때로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울’은 결정적인 자살 원인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살 위험 집단이다. 심리는 인간의 신체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심리적으로 자살은 항의이거나 호소, 또는 어리광이다.
자살은 생물학적, 유전학적 현상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물학적 상황은 인간의 정신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자살의 원인인 ‘우울’은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명백히 영향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중추신경계에 있는 ‘노에피네프린’이라는 물질이 정상 상태에 있는 이들보다 부족한 경우가 많다. 공격 성향과 관계되는 ‘세로토닌’이라는 화학물질의 수치가 낮으면 자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도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프로작(Prozac)과 같은 약물로 이를 조절해주려 한다. 약물이 생의 의지, 즉 정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살은 인간의 모든 다른 행동처럼 일종의 동물적 행동이다. 즉 유전자에 의해 영향받고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행위가 자살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동물의 자살이 다른 동종의 개체를 위해 택하는 이타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또는 집단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울증의 부산물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 자살은 사회학적이며 문화적 현상이다. 자연과 기후, 사회적 소통의 상태와 경제 상황, 사생관(死生觀)에 결부된 문화적 전통이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은 오래전부터 ‘하라키리’ 또는 ‘셋푸크(切腹 : 할복)’라 불리는 독특한 자살 문화를 발전시켜왔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할복자살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세계 여느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앞에서 열거한 그 어떤 것도 자살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저 배경일 뿐이며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이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명예
사회적 사건으로서 자살은 사회적 변화상을 보여준다. 자살이라는 사건에는 한 사회의 가치관과 문화적 모순이 집약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최초의 근대 한국인들은 오늘날의 한국인과 비슷한 이유로, 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자살을 선택하였다.
‘독립신문’ 1896년 4월25일자 기사가 먼저 눈에 띈다. “만리재 물 떨어진 다리 근처에서 김가라 하는 자가 술을 먹고 목매달아 죽었다더라”는 단신이다. 이 단신에는 자살 동기가 나타나 있지 않다. 자살 관련 기사는 ‘독립신문’ 잡보(雜報- 오늘날의 사회면에 해당)란의 중요 기사였다. 잡보나 단신이 자살자의 운명과 운명적 선택을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자살은 단신일 뿐이다.
1896년 6월27일자 ‘독립신문’은 근현대 한국인의 보편적 형태의 자살 유형을 소개했다. “인천 항구의 병막(兵幕)지기 김소성이라는 사람이 ‘생계 수단이 없는 것에 슬프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 집 건넌방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내용이다. 신문은 김소성의 칠십 된 노모는 품을 팔고 오십 된 병든 처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른바 ‘생계형 자살’이다.
‘독립신문’은 김씨 부부에게 자녀는 하나도 없었고, 김씨의 네 형제가 모두 흩어져 살고 있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가족 사이의 갈등이 자살의 동기가 되기도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대가족 체제는 개인의 자살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기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동체 속에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자살할 확률이 낮다.
1896년 7월9일에는 빚 독촉을 못이겨 자살한 사람의 소식이 실렸다. 용천군에 사는 김달호라는 이가 베 값 빚을 진 김예렴에게 상환을 독촉하였더니 김예렴이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엽기적인 복수 살인극으로 이어졌다. 자살한 김예렴의 아들들이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며 빚쟁이를 끌고 가서 아버지가 목맨 그 나무에 목매달아 살해한 것이다. 이 아들들은 관에 붙잡혔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었다. 청산군 수안말에 살던 남선지라는 자가 1896년 음력 6월19일 밤 그 이웃 동리 새터에 사는 과부 조씨에게 ‘무례한’ 행실을 했다. 피해자인 과부 조씨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서까래에 목을 매 죽었다. 그러자 조씨의 아들 리문구가 자신의 아내와 작당하여, 어머니의 원통함을 갚기 위해 남가를 유인하여 둔기로 때려 죽였다.
독립신문의 ‘분사(憤死)’ 보도
과부 조씨의 자살은 일종의 명예자살이다. ‘정절을 훼손당한’ 조선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왔다. 또한 리문구의 복수 행위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피살된 남가가 평소 행실이 아주 나빴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으되, 피살자의 아버지인 남병호와 남씨 일족들은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살인을 불문에 부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살한 과부 조씨의 열녀 행적과 그 아들 내외의 효성을 관에 고하기까지 했다. 조씨와 그 아들들에게 열녀문이나 효자비를 내려달라고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관은 이미 묻힌 남선지의 시신을 꺼내 새로 검시하고 범인과 피살자의 아버지 등을 모두 잡아들였다.
구한말 망국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이준, 민영환, 박승환, 황현 열사(왼쪽부터).
실제로 1890년대의 조선에선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는 이들이 많았다. 조선 후기, 혹은 근대 초기 한국인은 그만큼 개인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반증이다. 명예를 회복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다른 길이 없을 때 택하는 방법이 자살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살은 스스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힘에 떠밀린 수동적인 형태의 자살이다.
독립신문 기사에선 자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드러난다. 실제로 자살자들이 ‘분을 못 이겨’ 자살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문은 관용적으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라고 썼다. 당시 한국인들은 자살을 ‘분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정의내리고 있었다.
한일합방 직후 27명 자결
지금은 ‘분사’라는 말 자체가 잘 쓰이지 않지만, 분사는 사실 정치적인 의미를 진하게 담고 있는 용어다. 한국사에서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자살 사건은 모두 분사의 일종이었다. 특히 1905~10년에 이르는 동안, 애국애족 차원의 자살, 즉 분사한 ‘지사(志士)’들이 많았다. 이준, 민영환, 박승환, 황현 같은 사회 지도자급 인사들이 조선과 함께 분사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민족적 각성과 연결시키려 했고 실제로 일정 정도의 반향을 얻었다.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通史)’에 의하면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는 전국적으로 27~28명에 이르고 있다.
1907년 6월30일에 발생한 정재홍의 자살사건은 당시 분사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외국에 갔다가 귀국한 금릉위(영혜옹주의 남편) 박영효를 환영하기 위해 전직 고관대작 부부가 모인 공개석상에서 정재홍이라는 청년이 육혈포, 즉 권총으로 자신의 배를 쏘았다. 다행히 즉사하지 않아 정재홍은 곧 병원에 옮겨졌다. 박영효가 보낸 위문 사자 앞에서 그는 ‘내 평생 나라 근심하던 뜻과 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사오니 원하건대 대감께서는 나라 일을 더욱 담착하야 신명을 아끼지 마시고 국권을 회복하며 창생을 구제하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절명했다.
사람들은 정씨의 시신을 남소동(지금의 장충단공원 근처) 그의 자택으로 옮겨갔다. 당시 신문은 “정씨 모친이 슬피 울며 말하기를 ‘이 자식이 살아서 능히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우지 못하고 졸지에 나를 버리고 죽었으니 그 시체를 볼기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더라”고 보도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서 나타난 자살도 분사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태일을 비롯해 김상진·김경숙·김세진·이재호·조성만 등의 젊은이들은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며 목숨을 버렸고, 1990년대 이후에도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분신 자살을 택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의 자살자는 주로 우물에 뛰어들거나 서까래나 집 근처의 나무에 목을 매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특이한 사실은 양귀비 열매로 만드는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1909년 6월에 자살한 김씨와 박씨는 각각 아편을 과다복용하여 죽었다. 같은 해 6월26일 ‘대한매일신보’는 “근래 한국인이 아편을 먹고 자폐하는 자가 종종 많은지라 인명의 손해가 적지 아니하므로 아편 매매를 엄금할 차로 청나라 당국자와 교섭한다더라”고 보도했다. 당시 중국에서 들어온 아편은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 극약으로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도 ‘한강 투신’ 유행
한국인의 자살에서 사실 가장 주목해야할 유형은 생계형 자살이다. ‘생계형 자살’은 자살이되 자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생의 막바지에 내몰린 사회 시스템의 낙오자, 부적응자들이 선택하는 극한의 행위다. 그래서 ‘생계형 자살’은 사회적 타살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7년에 가난한 늙은 가죽신장이가 관에서 부과한 벌금을 갚지 못해 고민하다가 홰나무에 목매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빚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는 힘을 가진 모양이다.
자본주의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한국 땅에 도입되던 1920년대에도, 또 전쟁으로 피폐해진 땅에 건설과 개발 붐이 일던 1960년대에도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8월4일 서울 현대사옥 집무실에서 투신, 자살한 정몽헌 회장의 시신이 응급차에 실리고 있다.
생활고에 몰린 가족의 동반자살도 이때 이미 시작됐다. 1921년 5월11일 서울 광희문 성벽 밑에서 박한경이라는 노인과 그 부인 장씨가 생활난을 이유로 동반자살했다. 1920년대 동아일보를 보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자살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대부분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었다.
1922년 5월16일자 ‘동아일보’에는 ‘자살장으로 화한 한강’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여름이면 수정 같은 맑은 물로, 겨울이면 거울 같은 얼음물로 수영과 스케이트를 즐기게 해주는 시민의 휴식처이자 놀이터인 한강이 ‘눈물 흘리는 영결(永訣)장’이 되고 있다”면서 “연애에 실패한 자도, 생활이 곤란한 자도, 세상을 비관하는 자도 한강에 뛰어들고 있다”고 한탄했다. 당시 경찰 조사에 따르면 1921년 한강에서 자살한 사람은 19명인데 1922년 들어선 5월 현재 이미 그 숫자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당국은 한강 인도교 위에 ‘인사상담소(人事相談所)’를 설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강에 투신,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자살 방지를 위해 한강 다리 주변에 경찰이 상근하는 2004년 현재의 세태와 당시의 사회상이 너무 닮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인사상담소는) 물에 빠져 죽으려는 사람에게 기어이 죽지 아니하면 아니될 그의 사정을 듣고 살도록 인도하여 주고저 한다는데 오늘날까지 물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의 사정을 조사해보면 제1에 생활난이요, 제2에 염세 비관이요, 제3에 연애실패 등이라더라.”
한강에서의 자살자를 줄이려는 노력은 이 때 있었다. 1922년 한강 인도교를 관할하는 경성 용산경찰서는 2004년 서울 반포대교를 관할하는 영등포 수난구조대가 그러하듯 무척 바빴다. 1922년 6월 용산경찰서는 자살자의 마음을 돌리게 할 표어를 현상모집했다. 시민들의 응모작에는 ‘잠깐만 기다리고 생각을 돌려라’는 평범한 것도 있었고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년 춘삼월 다시 피지마는 인생 한 번 죽어지면 다시 오든 못하리라’는 가사풍도 있었다. ‘사람의 몸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네 몸이 네 몸이 아니라 하느님의 몸이라. 참고 살면 하느님이 도와주실 것이오, 죽으면 살인한 자와 일반이니 하느님이 벌을 주리라’는 기독교식 설교도 나왔다. ‘고진감래라니 죽지 말고 살아있소’ ‘옛적 강태공이 궁팔십을 기다리지 않았으면 어찌 달팔십이 있었겠소, 궁팔십으로 알고 기다리시오’ ‘죽은 재상이 산 거지만 못하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전통적인 풍유법도 있었다. 그러나 이 캠페인은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1922년에 자살한 사람은 1256명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가 현재의 약 3분의 1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다. 참고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2년의 경우 자살자 수는 매년 3000명선이었다.
1920년대 한국인들은 아편은 물론, 빨래하는 데 쓰던 양잿물이나 쥐약도 자살 도구로 많이 사용했다. 철도에 뛰어드는 방식의 자살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였다. 1922년의 자살자를 형태별로 보면 목을 매 죽은 사람이 655명,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396명, 독극물을 먹고 죽은 사람이 256명, 기차에 치여죽은 사람이 43명, 흉기를 사용해 죽은 사람이 39명 등이었다.
1920년대 조선 사회에는 자살기도가 너무 많이 나타났다. 크나큰 사회적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식민 자본주의사회로 사회체제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일시에 갈등과 모순이 터져나와 사람들에게 압박을 준 것이 자살급증의 원인으로 꼽힌다. 당시 사람들은 경제적 문제, 달라진 인간관계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사회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경기지수와 자살률은 정비례
생계형 자살은 경기와 연동되는 양상을 보인다. 경기 지표가 나쁘면 자살률도 올라가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자연법칙처럼 이런 정비례 관계를 보여왔다. 4·19 혁명이 발생한 1960년,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게 되었지만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특히 1960년 가을에서 1961년 겨울의 경기는 매우 나빴다. 1960년 11월, 14년 경력을 지닌 영등포경찰서 소속 김윤태 형사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당시 신문은 “‘적빈(赤貧)’이 고달파 그랬다”고 썼다. 김 형사의 불행이 알려지자 각계에서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열흘 만에 부평경찰서 소속 한 경찰관이 또 자살했다. 김 형사처럼 생계난이 이유였다. 1961년 1월14일엔 생활고로 힘들어하던 삼부자가 함께 음독한 사건이 일어났다. 전직 경관이던 아버지와 장남은 죽고 차남만 목숨을 건졌다. 1960년 11월8일에도 ‘생활고를 못 이긴’ 부산의 노모와 딸이, 12월9일에는 서울의 모녀가 음독했다. 부산 영도다리에서는 1960년 4월에서 12월 사이에만 78명의 사람이 바다에 투신했다.
세계적으로 높다는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시절의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재반등으로 이뤄진 것이다. 1998년의 자살자 수는 전년 대비 42.6%나 증가했다. 이 대단한 기록은 앞으로도 쉽게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자살이 경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은 자살자의 연령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시기 모든 연령대에서 자살이 늘었지만 25~44세 사이의 남자 자살자는 49.7%, 45~64세의 남자 자살자는 67.8%가 늘었다. 취업실패, 실업 등이 자살 폭증을 부른 것이다. 1999년, 2000년의 자살자 수는 각각 1998년 대비 -17.4%, -8.3% 감소했다. 이 같은 기록은 청장년층 남성들의 자살이 20% 이상 줄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살률이 이처럼 단기간에 크게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양상은 ‘IMF 극복·경기활성화’ 외엔 다른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002년 자살자 수는 다시 IMF 당시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2002년의 자살자가 전년에 비해 24.6%가 늘었던 것. 특이한 것은 여성 자살자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2002년 한국인들에겐 ‘월드컵 4강’ 등 기분 좋은 일도 많았지만 그 정도로는 경제 침체의 충격을 상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02년 대한민국은 뭔가 한껏 폼이 난 듯했지만 개개인들은 더 불행해지고 가난해졌다. 한국인들은 ‘붉은 악마’로 하나가 된 듯했지만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20~30대의 경우 이해 12월 대선에서 ‘참여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정작 자신들은 대부분 실업자 대열에 편입되었고 상당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처지가 되었다.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 무려 4위이고 증가율 면에서는 1위라고 한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은 자살로 죽을 확률보다 낮다.
약자 죽이는 천박한 ‘장사 논리’
폭증하는 자살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사회가 아니라는 것, 사회이기는 커녕 그저 아귀지옥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버려지는 사람들, 자해하는 왕따가 많은 곳이 사회일 리가 없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은 모두 ‘우울’이라는 자살 소질을 갖고 있으며, 먹을 것이 별로 넉넉지 않은 동물 집단은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약한 개체를 자살로 내몬다”고 설명한다. 약한 개체들도 기꺼이 자살을 택한다. 유전자도 그것을 명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는 그들은 모두 이타적이다. 그러니 우리는 자살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스스로 탈락해줌으로써 무한경쟁 가운데 잠시나마 숨통이 틔었다고 춤이라도 추어야 할까.
감당하기 어려운 카드빚을 진 젊은이와 카드빚을 ‘추심’하기 위해 협박 전화를 돌리는 젊은이는 어쩌면 같은 종류의 인간인지 모른다. 사회 한쪽에서는 느닷없이 나타난 ‘웰빙’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진정한 화두는 ‘살아남기’ 즉 ‘being’ 그 자체가 아닐까.
자살을 줄이기 위해 지금 당장 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방법밖에 없고 너무 지당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란 것이 한국 정부의 정책의지로 좋아질 수 있는 것인지 는 모르겠지만 경기가 좋아지면 자살자는 줄어들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서 약자가 죽음에 내몰리는 현상까지 치유되는 건 아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상황만 놓고 봤을 때 현 정권은 자살자 수의 증가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거나, 자살이 오로지 개인의 실존과 관계된 문제라는 입장을 지닌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다.
현 정권하에서는 아수라적 자연상태가 계속 유지될 것이며 경기가 회복되어도 생계형 자살자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장사의 논리’를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즉 아파트 분양가 공개문제와 관련, “10배의 이윤도 볼 수 있는 장사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정권은 안 그런 척하지만, 매우 천박한 사고를 정치철학으로 갖고 있다. ‘장사의 논리’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이유가 분명한 자살교사자 내지 방조자였다. 고리대금업자나 해결사들이 특별히 나쁜 인간들이라서 약자들을 자살로 내모는 것은 아니다. 장사의 논리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장사의 논리는 약자의 생을 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