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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남성작가 5인의 릴레이 에세이

버리고 떠나기

버리고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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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이 바삐 가는 흰 구름을 비웃는다 ◆

버리고 떠나기
‘집착하는 나’는 소유지향적인 관형격의 모습이다. 내 처소, 내 가족, 내 생각, 내 물건, 내 것 등등…. 내 중심으로 우주와 세상을 좁혀버리는 맹독(猛毒)에 중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 정찬주 소설가 jchanjoo@kornet.net

좁은 툇마루에 앉아 잠깐 동안 갠 먼 산봉우리를 응시한다. 산봉우리에는 비구름이 홑이불 자락처럼 걸쳐 있고, 툇마루는 아직도 들이친 빗물에 젖어 축축하다. 비바람이 거칠게 다녀간 뒤끝이라 개울물 소리가 격렬하다. 이럴 때 나는 골짜기를 울리는 개울물 소리에 나의 몸과 마음을 맡겨버린다. 선방의 수행자들이 화두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기듯.

중국의 남전선사는 어느 젊은 수행자가 도(道)를 묻자, ‘평상심이 도다’라고 했다. 평상심이란 한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청정한 본래의 마음일 터이다. 남전의 수제자 조주선사는 스승의 가풍을 이어 ‘차 한 잔 마시기(喫茶去)’라고 했다. 차 한 잔 마시라는 뜻은 공연히 망상 떨지 말고 차 한 잔 속에 그대의 온몸을 적셔보라는 말이다.



격렬한 물소리에 나는 순간적이나마 좀 전의 나를 버리고 무아(無我) 속으로 빠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라고 집착하는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무아의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잠시 후 나는 또다시 집착하는 무엇에 사로잡히고 만다.

‘집착하는 나’는 소유지향적인 관형격의 모습이다. 내 처소, 내 가족, 내 생각, 내 물건, 내 것 등등…. 내 중심으로 우주와 세상을 좁혀버리는 맹독(猛毒)에 중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몇 해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남도 산중으로 내려와 처소를 지은 뒤, 논밭에서 콩을 심고 감자를 캐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명이 있건 없건 세상의 모든 것과 한 몸이기에 결코 나를 관형격으로 놓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는 연기(緣起)와 상생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착하는 나’는 ‘본래의 나’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달콤한 유혹과 게으름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방심하면 언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되살아난다. 그러니 비록 몸은 청산에 있으나 마음은 저잣거리로 나가 이런저런 욕심에 끌려다니고 만다. 사람들은 내 산중 처소를 찾아와 부러워하지만 실제 내 살림살이는 꼭 그럴 만한 것이 못 된다.

어떤 날은 그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서울을 떠난 것이 공연한 객기를 부린 듯하고 서울에 떨어진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그래서 방벽에 초의스님의 시 가운데서 마음에 와 닿은 이런 구절을 적어 놓았다. 靑山應笑白雲忙. 좀 거칠게 풀자면 ‘청산이 바삐 사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이다. 나도 묵묵한 청산을 닮아보고 싶어서다.

서울을 떠나고 나서부터 나는 깊은 산중의 선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대산의 상원사 청량선원에서부터 제주도 서귀포의 남국선원까지 내려갔다. 허상의 나를 버리기 위한 나만의 떠나기였다. 좀더 말을 보태어 고백하자면 선방이라는 금족(禁足)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 인생을 걸어놓고 수행하는 선객을 만나 대화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잘 사는 길인가’ 등을 명백하게 알고 싶어서였다.

최근 2, 3년 사이에 돌아가신 노선승을 뵙는 정복(淨福)을 누리기도 했다. 해인사 해인총림의 혜암 방장스님, 봉암사 태고선원의 서암 조실스님, 백장암 청화 조실스님, 백양사 고불총림의 서옹 방장스님 같은 분들이다.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분들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

혜암 노스님은 “적게 먹고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뭘 하기로 맹세했다면 전 인생을 걸어보라는 간절한 말씀이었다. 서암 노스님은 헛된 꿈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現前一念)”고 하셨고, 청화 노스님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삼배를 하려고 엎드리자 미소 지으며 손을 잡아 끄셨다. 스님께서는 진리(부처님)를 미칠 정도로 사모하였고, 그것에 감사하여 눈물이 끝없이 나므로 벽에 수건을 두 장이나 걸어놓고 사신다고 했다. 서옹 노스님은 “죽어도 산 사람이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다”며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일갈하셨다.

이와 같이 큰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면 헝클어진 내가 바로 서고 바른 길이 보이게 마련이었다. 노스님의 미소가 전염되어 욕심과 헛된 꿈들의 업장(業障)이 잠시 녹아 내렸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출가를 권유하는 노스님도 있었지만 나는 ‘용케’ 재가(在家)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미 입적하신 고승들말고도 나는 몇 분의 선방 선원장 스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먼저 성철 큰스님의 속가 딸인 불필 노스님의 선에 대한 단호한 의지와 따뜻한 배려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다승(茶僧)의 법력으로 차 한 잔 속으로 나를 빠뜨리곤 했던 극락암 호국선원에 계신 명정스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만행(萬行)도 결코 잊을 수가 없고.

20여 년 전에 처음 나와 인연 맺었던 봉암사 태고선원의 선원장 정광스님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말씀도 그분의 형형한 눈빛처럼 늘 번득인다.

“화두 이 뭣고(是甚摩)를 드는 데는 출가, 재가자의 구별이 없지요. 화두를 들려고 따로 시간을 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아무 때나 생각날 때 드십시오. 이 뭣고를 드는 순간 앞뒤의 시간이 잘리므로 과거와 미래가 사라집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나’라는 것마저 끊어버리면 일체가 돈절(絶)되고 큰 허공처럼 텅 비워집니다. 그리하면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자기 본래 모습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화두를 들게 되면 거친 현실을 극복하는 데 남모르게 이익이 있을 겁니다. 갑자기 닥친 불행이나 좌절도 화두를 챙김으로써 마음을 어떻게 쓸까 하는 대응능력이 생겨 자신도 놀라게 됩니다. 불생 불멸하는 텅 빈 마음에서 나오는 화두의 힘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어떤 문제를 몰록 잊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객관화될 때, 바로 거기에서 비상한 해결책이 나오지요.”

이런 이야기를 20여년 전부터 하신 기억이 난다. 지금도 스님은 설명을 달리할 뿐 변함이 없다. 그래서 스님의 말씀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나를 감동시킨 또 한 분의 선승이 있다. 모든 이를 구원하겠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해인사 장경각 앞에서 불 태워버린 제주도 남국선원의 선원장 혜국스님이다.

“임제스님은 깨닫고 나서 대성통곡했지요. 깨닫고 보니 허공이 바로 내 안에 있거든요. 그래서 스승을 향해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한 겁니다. 깨닫고 보니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내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법당에 방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집을 뜯어내면 이 방, 저 방은 사라집니다. 벽 때문에 방이 있는 겁니다. 벽을 다 허물어버리면 허공이 되어 버립니다. 임제스님이 통곡한 까닭도 내 안에서 허공의 성품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바로 ‘집착하는 나’가 아닐 것인가. 혜국스님의 말씀은 낡은 집과 같은 오래된 허상의 나를 벽에 비유하여 철저하게 허물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 인생에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완전히 갠 것은 아닌 듯하다. 보슬비가 다시 내리려 하고 있다. 비 설거지라는 말을 산중에 살면서 처음 들어보았다. 비 온 뒤에 패인 길이나 쓰러진 작물을 손보는 일을 비 설거지라고 한다. 연못가에 쓰러진 이팝나무와 화단의 나무백일홍도 바로 일으켜 세워야겠고, 아래채 아궁이에 불을 넣어 습기 찬 산방(山房)을 말려야겠다.



서암 노스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살라 했고, 혜암 노스님께서는 무엇을 하되 죽을 각오로 덤비라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런 살림살이가 바로 선방에서 닦는 선(禪)이 아닐까 깨달아진다. 나도 나에게 주어진 삶이 고마워 눈물이 났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청화 노스님처럼 눈물 닦을 수건을 벽에 걸어놓고 싶다. 그것이 바로 서옹 노스님께서 말씀하신 죽어도 산 사람이 되는 참사람(無位眞人)의 길이 아닐까 하고 깨달아진다.

그리 살 수만 있다면 내 산중 처소야말로 ‘집착하는 나’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나만의 선방일 터이다. 선방이 꼭 절을 찾아가야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내 산중 처소가 나의 선방이듯 주인공(隨處作主)이 되어 온몸으로 뒹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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