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정계개편’ 시동 건 고건 전 총리 “박근혜와 연대, 협력할 수 있다”

  • 인터뷰·김승훈 자유기고가 shkim0152@hanmail.net 정리·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6-07-04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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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계개편’ 시동 건  고건  전 총리   “박근혜와 연대, 협력할 수 있다”
    고건(高建·68) 전 총리는 최근 ‘희망한국국민연대’(이하 희망연대) 설립 의사를 밝혔다. 이는 내년 대권(大權)을 향한 장도에 첫 발자국을 찍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동안 “국민의 여망에 따라 결단을 내리겠다” “적절한 시점에 구상을 밝히겠다”며 정국을 관망해오던 고 전 총리. 그는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참패하자 “이번 지방선거는 나에게 국민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근본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논평’을 냈다.

    ‘희망연대’는 7월26일 치러지는 재보궐선거 이후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이 연대 대상이다. 고 전 총리는 “현 정치권이 꿈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희망연대는 향후 사회 각 분야 일반 국민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 성격의 연대모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연대에는 민주당 전 의원 등 2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고 전 대표는 공동대표를 맡을 전망이다. 이번 발표에 발맞춰 열린우리당 내 친(親)고건 인사인 안영근 의원은 고 전 총리의 ‘대권 로드맵’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 전 총리는 올 연말쯤 범(汎)여권 통합기구를 만들어 내년 2월까지 희망연대, 열린우리당, 민주당이 통합해 새로운 당을 창당하고 내년 4~5월께 범여권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6월10일 언론 인터뷰)

    내년에 출범할 통합신당의 경선(競選)에 대해 안 의원은 “고 전 총리는 대선후보로 ‘추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조건 없이 경선을 치르겠다는 구상”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고 전 총리측은 안 의원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우리와는 무관하다”며 일단 거리를 뒀다.



    고건·박근혜·이명박 3자 구도

    고 전 총리의 이 같은 움직임을 정치권도 주목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권에 있고, 향후 정치권이 유력 대선주자들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6월5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고 전 총리는 26.7%의 지지율로 1위에 올랐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24.4%, 이명박 서울시장이 22.8%였다. 5월24일 한국리서치 조사에선 이 시장이 1위(24.7%)였고, 고 전 총리가 2위(20.4%), 박 대표가 3위(18.3%)였다. 5월22일 코리아리서치센터 조사에선 박 대표가 선두(21.5%)였고, 고 전 총리가 2위(21.1%), 이 시장이 3위(18.1%)였다. 세 사람이 선두권 블록을 형성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양새다.

    고 전 총리가 국무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이렇게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데 대해 고 전 총리 지지자들은 ‘개인적 자질’을 요인으로 든다. 지난해 12월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차기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은 국가운영능력-국민통합-안정감-도덕성-개혁성 순이었다. 고 전 총리는 이 5가지 면모를 모두 갖췄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대통령대행으로서 안정적 국가관리, 세계청렴인상 수상(국제투명성기구), 서울시 개혁 성공(미국 행정학회) 등의 실적을 내세운다. 고 전 총리도 “탄핵 직후 국민이 적극 협조해줬다. 국가관리엔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실감했다”며 탄핵정국 운영이 대선주자 기반 구축의 계기가 됐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고 전 총리의 인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열린우리당에 아직 경쟁력 있는 대선주자가 없다 보니 한나라당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갈 곳 없는 마음’이 하는 수 없이 고 전 총리에게 쏠리고 있다는 논리다.

    ‘거품론’도 빠지지 않는다. 고 전 총리의 자질이나 정치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일각에선 “이념과 노선 가리지 않고 군부독재에서부터 개혁정권에 이르기까지 각종 정치세력에 투신해 고위공직자 생활을 한 것은 ‘무원칙 개인주의’일 뿐이지, ‘국민통합의 자질’은 아니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고 전 총리가 사실상 정계개편의 시동을 건 이후 열린우리당에선 “잠재적 우군일 수 있으므로 지켜보자”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고 전 총리에 대해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고 전 총리와의 연대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나라당은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은 여기 다 모여라’고 한 고 전 총리 진영으로 한나라당 내 중도 노선 의원들이 쏠릴 여지도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고 전 총리와 한나라당은 지지기반이 상당부분 겹친다고 한나라당측은 판단하고 있다. 보수 성향 유권자 중 상당수가 고 전 총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15일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정계개편 구상, 양극화, 한미관계 등을 주제로 고 전 총리를 인터뷰했다. 고 전 총리는 이 자리에서 노무현 정부와는 다른 대북·대미관(觀)을 드러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맡은 인물이지만 오히려 한나라당 노선과 유사했다. 고 전 총리는 “박근혜 대표와도 연대 협력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인터뷰는 5·31 지방선거 이전에 이뤄졌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였다. 다음은 고 전 총리와의 일문일답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평가 합니까.

    “남북경협이 더 제도화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투자는 확실하게 보장돼야 합니다. 북측을 지원하는 정책 목표에는 인도적 지원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대북정책은 궁극적으로 북측을 개혁·개방으로 이끄는 방향으로 잡아야 합니다. 북쪽이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갈 수 있도록 분야별로 목표의식을 분명히 갖고 정책을 세우고 지원해야죠. 유의할 점은, 대북정책이나 계획은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를 얻는 과정이 중요해요.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죠.”

    -북핵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정부는 북한이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리도록 북한을 설득해야 합니다. 남북 채널을 활용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잘 설명하고 북한이 대화에 나오도록 유도해야죠. 그리고 한미공조를 통해 6자회담의 골격을 유지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6자회담을 동북아 안보협력체로 확대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요. 물론 북핵 문제 해결 이후겠지요.”

    “친북좌익세력이 잘못했다”

    ‘정계개편’ 시동 건  고건  전 총리   “박근혜와 연대, 협력할 수 있다”

    5월 4일 고건 전 총리가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에 들어서고 있다

    -그러려면 미국과의 관계도 중요할 텐데요.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지난 3년여 동안 한미 정부의 공식적 관계를 보면, 주한미군 재배치나 용산기지 이전, 주한 미대사관 토지 문제 같은 현안은 원만한 해결을 봤어요. 지난번 경주 정상회담에서도 한걸음 나아간 포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천명했죠. 그런데 동맹으로서의 긴밀한 의사소통, 그러니까 실질적인 소통에 좀 갭이 있는 것 같아요. 동맹이라는 끈끈한 유대가 희석돼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부는 물론 양 국민이 서로 노력해야겠죠.”

    -평택 미군기지 이전 갈등 등으로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일각의 견해에 동의하십니까.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도는 일부 친북좌익세력의 극단적 행동으로,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국민 대다수는 그러한 시도에 반대해요.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를 망각해선 안 되죠.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싸고 미군 철수를 주장한 것도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고 전 총리가 사용한 ‘친북좌익세력’이라는 표현은 소위 ‘평화민주세력 연대론’을 밝힌 바 있는 열린우리당과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대립적 개념이다. 열린우리당 내 중도파에 해당하는 정동영 전 의장이 ‘평화민주세력 연대론’을 폈는데, 김두관 전 장관 등 이른바 친노(親盧)직계세력은 정 전 의장보다 ‘남북공조’에 훨씬 더 우호적이다. 대미관계에 있어서도 고 전 총리는 한미동맹을 강조하지만 이들은 ‘대등한 한미관계’를 주창하고 있다.

    ‘친북좌익세력’이라는 표현 하나에도, 고 전 총리가 열린우리당을 포함하는 범여권 통합 방식의 정계개편을 추진한다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는 듯하다. 정치는 ‘정서적으로’ 맞아야 같이 하는 건데, 고 전 총리와 열린우리당 내 일부 계파가 정서적으로 융화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고 전 총리는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을 엮어내겠다”고 밝힌 바 있어 그의 연대 대상엔 ‘개혁세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개혁세력=진보세력=민족공조세력’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이 때문에 보수진영에선 개혁진보세력을 비난할 때 종종 이들을 ‘친북좌익세력’으로 규정한다.

    고 전 총리는 별 뜻 없이 ‘친북좌익세력’이라고 말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의 사상과 가치관이 어휘 선택에 반영되기도 한다. ‘친북좌익세력’은 그가 연대 대상이라고 밝힌 세력을 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가 이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점은 의미부여를 할 만한 대목이다. 또한 대북관(對北觀)과 대미관은(對美觀) 대선주자의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데, 고 전 총리는 명백히 ‘친미 노선’ ‘북한개방 노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미관계의 파열음을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요.

    “똑같은 제도와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두 나라가 좀더 친밀하게 의사소통을 해야죠. 6·25전쟁 이후 미국의 안보 공약이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젊은 세대에게 인식시키는 교육도 필요해요. 또한 한국민은 통일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후원자가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 통일에서도 미국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죠.”

    -양극화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그 해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보다 앞서 양극화 문제를 극복한 선진국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어요. 해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성장입니다. 대다수 선진국은 이 방법을 썼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육입니다. 고용, 복지, 교육 이 세 가지를 생산적으로 연결하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해요. 이를 ‘생산적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고, ‘생산적 복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4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고건 전 총리에 대해 “한나라당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했다. 박 대표(5·31 선거 이후 대표직에서 물러남)와 연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봤다.

    -만약 박 대표가 연대 요청을 해온다면 받아들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대학 강의를 통해 중도실용주의 개혁세력들이 정파를 초월해 연대 통합할 것을 주창해왔어요. 정략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자는 뜻에서 한 말이죠. 그러한 제 뜻에 동조하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라면 협력할 수 있어요.”

    -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연대 협력, 네, 할 수 있죠.”

    박근혜가 중도개혁?

    최근 고 전 총리의 본격적인 대선 행보에 대해 한나라당측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이계진 대변인은 “개인의 이름값, 몸값을 좀더 올리려고 사람 중심, 지역 중심의 1970~80년대식 구태정치를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구태정치’라는 ‘센 표현’이 들어가 있다. 그는 “고 전 총리의 신당 창당은 정치적 당위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일부 지지자들과 함께 만든 사람 중심 당”이라고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고 전 총리는 우리와 한 배를 타기 어렵다’고 판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정황도 있다. 이재오 원내대표는 “고 전 총리가 훌륭한 분이라 연대 얘기가 나오긴 하지만, 한나라당에 들어와서 대선후보 경선을 하려 하겠냐”고 반문했다.

    ‘반(反)고건 정서’는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에게서도 묻어나온다. 손 지사는 고 전 총리를 겨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곡예를 벌이는 리더십은 한나라당에 도움이 안 된다. 더구나 지역기반에 미련을 가진 그가 한나라당에 들어올 리도 없다”고 비판했다. 손 지사가 고 전 총리와 비슷한 ‘콘셉트’인 ‘중도개혁세력 연대’를 오래 전부터 주장해온 사실이 흥미롭다. 손 지사 진영에선 ‘우리 것을 뺏으려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유독 박근혜 전 대표가 고 전 총리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것은 이러한 한나라당 정서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다. 1970년대 말 박 전 대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할 때 고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청와대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다. 고 전 총리 또한 한나라당과 박근혜 당시 대표를 분리해 “박 대표와는 연대, 협력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한 듯하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표를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으로 봐야 할까?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의 이미지는 ‘보수주의’로 굳어져 있다. 이는 고 전 총리의 ‘친북좌익세력’ 발언이 미래의 연대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열린우리당 내 상당수 계파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또한 ‘박근혜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고 전 총리의 마인드에 대해 열린우리당 측이 어떻게 평가할지도 의문이다.

    ‘중도 실용주의 개혁세력 연대’를 내세운 고 전 총리의 정치권 개편 시도는 이래저래 우여곡절을 겪게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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