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한국 부동산 버블, 일본 버블과는 차원이 달라요”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6-07-07 12: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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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대형은행, 외부 압력 받고 대출해주다 망했다
    •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는 시기상조…금융시장 위기 초래할 수도
    • 돈을 돌같이 알아야 돈을 번다
    • 부동산 가격은 세금이 아니라 시장기능으로 잡아야
    • 비정규직 정규직화 하려면 정규직 봉급 내려야
    • 고금리 오래 못 가고 중저(中低)금리 시대 온다
    • 브릭스(BRICs)·실물자산·채권형 펀드 투자 권유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통합 신한은행장 집무실에 들어서면 ‘처음처럼’이라고 씌어 있는 서예 작품 액자가 먼저 눈길을 끈다. 서예가 강권진씨가 쓴 글자엔 획마다 사람 형상이 들어 있다. 옆방 접견실에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쓴 ‘처음처럼’이 걸려 있다. 신 교수의 한글 서체는 개성이 강해 어디서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두산주류의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로고도 신 교수의 글씨다.

    ‘처음처럼’은 신상훈(申相勳·58) 신한은행장의 좌우명이다. 그는 “두산주류가 로열티도 내지 않고 내 브랜드를 가져갔어요”라며 웃는다. 신 행장은 사원들에게 임명장을 줄 때도 ‘처음처럼’을 강조한다. 인사발령을 받는 사람들은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초심(初心)은 퇴색하고 가슴 뛰던 처음의 기억은 먼지 낀 과거로 편입된다.

    은행의 연륜은 그저 숫자일 뿐이다. 신한은행은 1982년 재일교포들이 제일투자금융을 모체로 설립한 은행이다. 지난 4월, 109년 역사를 지닌 한국 최고(最古)의 조흥은행이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신한은행에 흡수되며 간판을 내렸다. 통합 신한은행은 총자산 163조원, 직원 수 1만6000명으로 명실상부한 2위 은행이 됐다.

    필자는 최근 매달 10만원씩 붓는 적금을 들었다. ‘신동아’ 인터뷰 때마다 동행하는 속기사가 “오빠가 신한은행 지점장인데 실적을 올려야 한다”며 10만원짜리 한 계좌만 가입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을 받고 적금을 든 것은 평생 처음이다. 필자가 속기사를 소개하며 적금 든 이야기를 꺼내자 신 행장은 “아, 100만원짜리를 들었어야죠”라고 한술 더 떴다.

    신 행장은 전형적인 은행원의 이미지를 풍긴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구석이 없고 얼굴은 방금 면도를 끝내고 로션을 바른 사람처럼 말끔하다. 시종 단정한 자세로 앉아 차분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목소리가 낮아 녹음이 제대로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표현에 수식이나 과장이 드물었다.



    -청계천 옹벽에 모사된 도자(陶瓷) 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班次圖)가 청계천의 새로운 명물이 됐습니다. 지나다니다 보면 지금도 조흥은행 로고가 그대로 붙어 있더군요.

    “서울대학교에도 발전기금을 내면서 CHB관(CHB는 조흥은행의 영문 머리글자)을 지어주었죠. CI(Corporate Identity) 기준으로 보면 바꿔야 하지만 지금 하기에는 조금 일러요. 조흥은행 출신 직원들이 조흥의 역사에 커다란 애착을 갖고 있거든요. 바로 바꾸면 반발이 생길 수 있죠.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됐을 때 거론해야지요.”

    진정한 통합은 노노(勞勞)통합부터

    -신한은행의 문화는 전투적이고 현장 중심적이며 서비스 마인드가 철저한 데 비해 조흥은행은 역사가 길다 보니 전통과 권위에 안주하고 관료주의적 분위기가 있는데다 현장 마인드가 뒤진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두 은행 차이를 조사해보니 300가지가 넘었다면서요? 서울은행과 신탁은행이 합쳐져 이름은 서울신탁은행이 됐지만 한 지붕 두 가족이 그대로 가다가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 직후 하나은행에 흡수통합됐지요.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은 ‘화학적’ 통합이 잘 되고 있습니까.

    “2003년 9월 조흥은행이 신한금융지주회사 자회사로 편입된 이후 ‘선(先)통합, 후(後)합병’이라는 독특한 모델을 추구했습니다. 통합 신한은행이 출범하기 전 2년6개월의 동거 기간에 두 은행직원들 간의 심정적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습니다.

    동양 사회에선 조직과 조직이 합쳐지는 게 쉽지 않아요. 일본 다이이치간교(第一勸業)는 통합 뒤 40년 이상 인사부의 부장, 차장을 다이이치와 간교 은행 출신이 나누어 맡았죠. 그대로 가다가 1999년 다이이치간교·후지(富士)·니혼고교(日本興業) 3개 은행이 통합해 미즈호금융그룹으로 출범했습니다. 우리도 노력을 안 하면 상당히 오래갈 거 같아요. 지난 2년 반 동안 감성통합 훈련을 했지만 명실상부하게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되려면 노노(勞勞)통합이 돼야죠. 노조가 두 개로 나뉘어 있으면 위에서 통합을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합병 초기다 보니 인사에서 두 은행 출신을 50대 50으로 안배했지만 앞으로는 성과와 능력주의로 가야 합니다. 여러 해가 걸릴 거 같아요. 조흥은행, 신한은행 출신들이 끼리끼리 밥 먹으러 가는 것도 막고 있습니다. 발각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지요. 합병을 계기로 향우회, 동창회도 못하게 했어요. 인포멀한 모임이 조직 발전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리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못하게 막고 있지요. 내가 ‘안방에서 모이는 것까지 조사하겠다’고 했어요.”

    그동안 사례를 보면 노동조합이 통합에 암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4월1일 신한·조흥은행 통합식장에서는 두 은행 노조의 위원장들이 단상에 올라와 노사 화합선언을 했다. 신 행장이 조흥은행 본점 건물에 있던 노조사무실을 홀로 찾아가 설득함으로써 화합선언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신한금융지주회사 라응찬(羅應燦·68) 회장은 신한은행의 정신적 지주다. 경북 상주 출신으로 선린상고를 나와 농협은행, 대구은행을 거쳐 신한은행의 전신인 제일투자금융 이사로 신한은행 설립에 참여했다.

    신 행장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군산상고를 나왔다. 그는 산업은행에 근무하다 신한은행 설립 때 옮겨왔다. 은행가에서 신 행장은 라 회장이 키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신한은행에는 지연, 학연을 따지지 않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키우는 문화가 설립 당시부터 뿌리를 내렸다.

    라응찬 회장의 ‘깔끔’ 리더십

    “라 회장님은 지연, 학연 또는 학력의 차이를 안 따지시는 분이죠. 그분이 사람을 선택하는 관점은 영업 성적, 근무 자세 같은 것이죠. 인재를 편파적으로 쓰지 않아요. 저는 신한은행 오기 전에 그분하고 생면부지(生面不知)였죠. 내가 대표적인 사례가 될지 어떨지 모르지만 저말고도 그런 사례가 허다하죠. 어떻게 보면 신한은행에서 실적과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는 문화를 그 양반이 만들었어요. 그리고 인사 청탁을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그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아요.”

    -김대중 정부 출범하고 나서 인사 청탁을 거부해 라 회장이 한때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전에도 있었어요. 전두환 대통령 때도 군의 실력자가 부탁을 했는데, 오히려 해당자에게 불이익을 줘 검사역 발령을 내버렸어요. 중심 점포장 하던 사람이 검사역으로 발령나자 결국 그만두었죠. 당시 상황으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외부에 인사청탁을 하고 다니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거든요.”

    신한금융지주회사는 신한은행 제주은행 굿모닝신한증권 신한생명 신한카드 신한캐피탈 등 11개 자회사를 두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은행 증권 보험 카드 자산운용 등 금융의 전 부문을 아우른다. LG카드 인수 경쟁에도 뛰어들었다.

    -라 회장이 내년에 임기 3년이 되는데요. 지주회사 경영진은 그대로 갑니까.

    “제가 어떻게 윗분의 인사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후배로서 주주총회 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분이 할 일이 대내외적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분이 한참 더 계셔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은행에 이런 모임이 있으니까 오셔서 한말씀 해주세요’라고 요청하면 ‘그건 은행장이 할 일인데 왜 내가 가느냐’며 간섭을 안 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보고받고 할 터인데, 일절 노터치예요. 대외적으로 큰일을 할 때는 도와주죠. 그런 인격을 갖추신 분이 드뭅니다.”

    신한은행은 창립의 모태인 재일교포들이 약 2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외국인 지분이 늘어나 63%에 달한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일본 정부의 외환 관리가 엄격했다. 재일교포들은 정식 송금절차를 거치지 못하고 가방이나 라면상자에 돈을 담아 한국으로 들여왔다. 재일교포들은 일본에서 은행 설립이 불가능했고, 일본 은행들로부터 여신 차별을 받았다. 한이 맺힌 재일교포 상공인들은 조국에서라도 은행을 만들어 한을 풀어보고자 했다.

    일본 전역에서 재일교포 상공인 1000여 명이 설립에 참여했다. 창립 주주는 재일교포 중에서도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關西) 지방 상공인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희건(李熙健·89) 명예회장도 오사카 출신이다.

    CEO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고객을 설득하고 직원들을 자극해야 한다. 그러자면 이것저것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신 행장이 직원들에게 소개한 에스키모의 들개 사냥법이 흥미롭다. 에스키모들이 날카로운 창 끝에 다른 동물의 피를 발라 들판에 세워두면 들개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든다. 들개들이 창을 혀로 계속 핥다 보면 혀가 마비되고 나중에는 제 혀에서 피가 나와도 느끼지 못한다. 결국 들개는 누구의 피인지도 모르고 쉬지 않고 창 끝을 핥다 비극적으로 죽게 된다. 타성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예화다.

    -경영에 필요한 정보는 어떤 경로를 통해 얻습니까.

    “신문을 늘 보지요. 메일로 지원해주는 사람도 있고요. 도와주는 사람들 덕에 삽니다. 그리고 특별정보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스태프들이 이런 저런 정보를 올려줍니다. 나를 교육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열심히 해야죠.”

    -왜 인문계를 가지 않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까.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벌어온 돈으로 작은아버지들을 다 가르쳤죠. 숙부들은 아버지 덕에 학교 다니며 ‘형님, 상훈이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말대로 안 되잖아요. 숙부들이 상고를 가라고 권유했죠.”

    그는 1967년 군산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상고에서 은행반은 특별반이었다. 성적순으로 1등부터 60등까지만 은행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고의 선두주자들은 은행 중에서도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산업은행에 다니며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마쳤다.

    “성균관대에 입학하고 나서 은행을 그만두려고 했죠. 그런데 제가 모시고 있던 과장이 인사부 차장이 됐는데, 조사부 발령을 내 공부할 수 있게 해주더군요. 그 때 은행을 그만뒀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1982년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신설 신한 은행으로 옮긴 것은 모험이 아니었습니까.

    “산업은행에서 기업으로 많이 나갔어요. 대우, 동부 쪽으로 간 사람이 꽤 있어요. 산업은행에서 토플 550점 이상 받은 사람은 2년 코스로 미국 대학에 보내줬어요. 그 준비를 마치고 어드미션(입학허가서)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한은행에서 연락이 왔죠. 그때 미국 대학으로 간 사람은 다 학교로 빠졌어요. 사람이 살면서 진로가 여러 번 바뀔 수 있지요.”

    -한창 일하는 분한테 결례가 되는 질문이지만, 은퇴한 후에는 무얼 할지 생각해보았습니까.

    “저도 나이가 이만큼이나 되니까 언제까지 은행에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평균수명이 늘어나 은행을 그만두었을 때 무얼 할 거냐에 관해 가끔 고민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 어떤 활동을 해야 심리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저는 교회를 통한 사회봉사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총각 시절에 하숙집 근처에 있던 종암동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교회에 다닌다. 그 목사가 결혼식 주례도 했다. 목사의 설교가 좋단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신앙이 도움이 됩니까.

    “외롭고 의지할 데가 없을 때는 신앙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요. 황 위원은 교회 안 나갑니까? 저한테는 너무 황당한 질문 같아요.”

    -신앙인은 믿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비(非)신자 처지에서는 궁금할 수 있죠.

    “믿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커왔기 때문에 마음속에 늘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점장을 할 때도 이상하게 제 실적이 좋아요. 내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대 이상으로 일이 잘되고 성적이 올라가죠. 그러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느꼈어요. 일본 오사카 지점장 때도 버블이 꺼지고 한 3년 정도 정리하느라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다른 은행들이 철수하는 마당에 우리는 그래도 교포주주들 도움으로 근근이 정리를 했어요. 마무리가 잘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이죠.”

    그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조선호텔 헬스클럽에서 한 시간가량 운동을 한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서면 밤 12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강행군이다. 특별한 건강관리 비결이 있을까.

    “식초에 절인 검은콩을 상복합니다. 술 마신 날 자기 전에 두어 숟갈 먹으면 해장하는 데도 좋아요. 내 말 듣고 황 위원도 한번 드셔보세요.”

    집에 돌아가 집사람한테 식초에 절인 콩 이야기를 했더니 “식초가 독해 잘못하면 위벽 상한다더라. 먹지 말라”고 했다.

    신 행장의 아들(28)은 직장에 다니며 미국 MBA를 준비하고 있고, 딸(24)은 유학 중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적었는데도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이들 엄마 덕분”이라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다른 아버지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부하직원을 집으로 초청해 부인이 만든 음식을 대접한다. 과거에는 상사 집에서 저녁 먹고 포커나 고스톱을 하는 행사가 1년에 한 번씩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다. 집에서 남자들의 말발이 서지 않기 때문인지, 직장문화가 변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는 ‘신동아’ 명사(名士) 인터뷰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제 개인 얘기는 되도록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면서 은행에 관해서만 써달라고 부탁했다. 필자는 “긴 인터뷰를 전부 은행 이야기로 채우면 너무 건조해진다”면서 “설렁탕 국물 맛을 내려면 다진 양념이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인터뷰에도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가야 흥미를 끌 수 있다”고 설득했다. CEO도 스타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이 명예회장은 한국 본점에 자주 들르는가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오시죠.”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하신데 아무래도 연세가 많으니까 거동을 조심하시죠. 그렇지만 기억력이 아주 좋고 목소리도 쩌렁쩌렁하시죠.”

    그는 이 명예회장과 라 회장이 병풍이 되어주고 큰가르침을 남겨 오늘날 신한은행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신 행장은 1989년부터 5년 동안 신한은행 오사카 지점장을 지냈다.

    -신한은행에서는 일본 지점장, 그중에서도 오사카 지점장을 해야 출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아이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제가 3대 지점장을 했는데 1대, 2대 지점장 했던 분들은 다 임원 했어요.”

    이백순 부행장은 도쿄 지점장을 지냈고, 김은식 부행장은 후쿠오카 지점장을 거쳤다. 이들은 일본 지점장을 했기 때문에 잘나가는 것이 아니다. 신한은행을 대표할 만한 재목이 일본지점 근무를 거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 행장은 오사카(大阪) 지점장을 하면서 ‘오사케(お酒)’ 지점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본말로 ‘오(お)’는 존칭이고 사케(酒)는 술이다. 일본에서 차별의 서러움을 겪으며 사업을 일군 재일교포들은 신한은행 오사카 지점장을 불러내 번갈아 사케를 샀다. 겨울에는 따끈한 청주(淸酒), 여름에는 냉주(冷酒)를 마시며 재일교포 상공인들의 성공담, 그리고 눈물로 얼룩진 젊은 시절의 인생역정을 들어주는 것이 퇴근 후의 중요한 일과였다.

    “늘 당신들이 사셨죠. 저한테 대접할 기회를 안 줬어요. 제게 굉장히 잘해주셨어요.”

    오사카 지점장 시절에 야쿠자를 만나 담판을 벌여 이자를 제때 갚도록 한 이야기도 금융가에 전한다.

    “일본토지주식회사라는 회사의 사장이 야쿠자 출신이었어요. 전임자가 여신을 줘 이자를 매달 받았죠. 다들 그 사람한테 가기를 꺼렸습니다. 매달 말일 오후 4시에 오라고 해서 가면 이자를 어음으로 주었습니다. 어음을 교환에 돌리면 다음달 초일에 떨어지지요. 하루 연체인 셈인데 연체이자도 못 받죠. 그렇게 계속 애를 먹이기에 찾아가 담판을 했어요. 그 뒤로는 제 날짜에 이자를 줬어요. 배짱으로 찾아갔죠.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고, 점잖게 얘기해서 받아냈죠. 다른 은행들도 내 덕을 봤지요. 다른 한국계 시중은행들도 그 회사에 융자를 줬거든요. 나중에 그 사람은 권총 자살했어요.”

    그는 오사카 지점장 시절에 1년이면 100번가량 오사카 공항에 출영을 나갔다. 지점장 임기를 마치자 승용차의 스프링이 내려앉았다.

    재일교포 2, 3세들 중에는 한국말을 못하는 사람이 많고 교류가 없었다. 그는 재일교포 2, 3세를 중심으로 경영연구회를 발족했다. 창립 당시 30명이던 회원이 지금은 120명으로 늘어났다.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조흥은행은 고종 때 설립된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인데요. 어쩌다가 부실해져서 신한은행에 인수되는 운명을 맞게 됐습니까.

    “글쎄요. 조흥은행의 전직 임원들을 폄하하는 얘기가 될까봐 조심스럽습니다. 요점만 말하면 투명경영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 조직원이 회사의 전체 내용을 훤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부족했습니다. 가령 위부터 아래까지 전 직원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인데도 노동조합조차 모르고 있었던 게 많죠. 전 직원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팔을 걷어붙였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외부 청탁을 단호하게 배제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실이 생기기 시작한 거죠.”

    제5공화국 때 전두환 대통령 장인의 동생이 연루된 건국 이후 최대 사기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장영자·이철희 부부 어음 편취 사건’. 1982년 이 사건으로 한 차례 위기를 겪은 조흥은행은 1997년 한보 사태, 삼미그룹 파산, 기아그룹 부도 같은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는 부실은행으로 전락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권력으로부터 대출 압력이 오면 버티기 어렵지 않았나요.

    “대출압력을 거부한 은행이 있잖아요. 우리 신한은행도 대출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거부했습니다. 회사 내용을 보고 대출해야지요. 돈이 나가서 상환될 수 있다 없다 하는 것은 금융계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대략 감으로 알 수 있어요. 뻔히 부실이 될 걸 알면서 왜 돈을 내줘요? 그건 자기 직을 내놓고라도 막아야지요. 큰 부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 그런 것들이에요. 부실이 될 거라고 뻔히 알면서 내준 거죠. 경영진이 자기 임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겁니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시장에서 일단 패자가 되면 부정적인 평가가 덧씌워질 수밖에 없다.

    -국민은행은 주택은행을 합병한 뒤 인근 점포를 통합했습니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점포는 어떻게 정리됩니까.

    “해외점포 17개를 포함해 총 979개 점포가 있어요. 그중 68개 점포가 붙어 있거나 가까이 있는 중복 점포입니다. 고객과 거래선 분석을 해봐야 합니다. 가령 점포 두 개가 가까이 있다고 해도 점포의 1인당 생산성이 3억원 이상이면 괜찮습니다. 큰 건물 안에 있는 점포는 그 건물 고객만으로 충분히 수익을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점포를 유지하지 않으면 다른 은행이 들어와요. 점포의 영업 상황을 보고 결정하려고 합니다. 통합을 위한 점포 분석은 이미 끝났습니다.”

    -금융권의 최대 이슈가 2008년부터 시행되는 자본시장 통합입니다.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본격적인 인베스트먼트 뱅크(투자은행)시대가 열리는데요. 신한은행은 어떻게 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주회사 체제여서 다른 은행보다 나은 편이지요. 신한금융지주회사 자회사에 증권회사와 자산운용사가 있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쪽보다는 유리하지요. 그걸 강화하는 쪽으로 나가면 됩니다. 인재를 육성하고 확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외국 선진 투자은행에 비해 인재가 부족해 걱정입니다. 시중은행 중에서는 신한은행의 인력계발 예산이 가장 많습니다.

    카이스트 금융공학 석사와 해외 MBA 등 전문 인력을 채용해 경험을 쌓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전략적 투자은행인 BNP파리바그룹과 자본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인재들을 BNP파리바 파리 본사와 홍콩, 싱가포르 지역본부에 보내 경험을 쌓게 해야죠. 파피아스 부회장이 신한은행의 인재들을 보내주면 잘 가르쳐서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인재들이 충성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은행들이 입주가 시작되는 아파트 단지에 천막 지점을 설치하고 출혈경쟁을 한다고 하더군요. 예금금리가 높아지는데 금리 깎아주기 경쟁을 벌인다는 거죠. 레드오션을 넘어선 블루오션 창출 전략을 들려줄 수 있습니까.

    그는 웃으며 “비밀이라 다 내놓을 수 없는데…”라고 말했다.

    “블루오션은 여태까지 남이 하지 않은 걸 찾아서 하는 거지요. 상품, 시스템과 서비스의 혁신, 지역 모두 생각해볼 수 있죠. 블루오션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방안도 있어요. 다방면에 걸쳐서 부단히 준비하고 있어요. 국내에서 기껏 땅 따먹기 해봐야 뺏고 뺏기다 보면 특별한 진전이 있겠습니까. 서로 물어뜯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땅 따먹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로드맵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주로 영업 분야에서 일하셨는데, 은행에서 영업이 어느 정도 중요한가요.

    “영업도 잘하고 스태프직(職)도 잘해야지요. 제 경력에 영업 쪽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퍼포먼스(실적)가 항상 좋아야지요. 퍼포먼스가 나쁘면 다른 거 아무리 잘해도 빛이 안 납니다. 은행 통합해놓고 이제 석 달이 돼가는데요. 지수가 나쁘면 다른 게 아무리 좋아도 시장에서 평가를 잘 안 해줍니다.”

    그는 지점장 시절에 평생 한 번 받기 힘들다는 전국 영업점 업적 평가대회 대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1등 대상은 고객만족도 실적 등 10개 평가항목 중에 하나라도 하자가 있으면 받을 수 없다.

    -‘고객 재발견 프로그램’이란 게 뭡니까.

    “종전에는 예금이 많은 손님을 최고로 쳤지요. 그런데 사실 은행에 이익을 많이 갖다주는 손님이 예금액 많은 고객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객의 거래 상황을 분석해 실질적으로 우리한테 이익을 가져다주는 손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려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한 1년 걸렸어요. 전체 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정말 고마운 손님을 놓아두고 엉뚱한 손님한테 보상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쓸데없이 낭비하는 거죠. 우리한테 더 기여해줄 수 있는 잠재고객을 찾아내려면 데이터 분석을 잘해야지요. 고객의 예금과 대출이 얼마이고, 그래서 우리 은행의 손익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지요. 낚시, 골프, 여행 같은 취미생활까지 데이터화해놓았습니다. 창구에 손님이 와서 단말기에 통장을 탁 넣으면 대화할 소재가 화면에 튀어나옵니다. 이것을 점프 프로그램이라고 이름붙였어요.”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 정동일 교수는 신한은행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신한은행 방식(Shinhan way)’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한 권의 책으로 나온 ‘신한 웨이’를 요약하면 고객 중심, 팀워크로 결속된 조직문화, 능력 위주의 인사 시스템, 일선 직원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리더십, 한 발짝 앞선 혁신, 투명·윤리경영이다.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2005년 9월30일 치러진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통합추진위원회 현판식. 맨 오른쪽이 신상훈 통합신한은행장.

    -국내 리딩 뱅크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은행의 강점과 약점은 뭐라고 봅니까.

    “글쎄요, 국민은행은 리테일(소매금융) 분야가 탄탄해요. 이른바 하체에 해당하는 부분이 아주 강하단 말이에요. 네트워크가 좋죠. 가령 어떤 상품을 파는 걸 보면 우리가 배울 점이 많아요. 옛날 국민은행이 아니에요. 성공신화에 도취해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문제가 많아 걱정스럽고, 국민은행은 잘하고 있어요.”

    -국민은행이 앞서고 2위인 신한은행을 우리은행이 간발의 차이로 쫓아오고 있는데요. 우리은행은 토종은행임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토종은행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있나요. 외국자본이 적다는 뜻으로 그렇게 얘기한 거 같은데, 앞으로 커지려면 외국 자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토종은 별 의미 없는 이야기예요. 자산규모 1, 2, 3위라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위한 임계점(臨界點·critical point) 확보가 중요한데, 신한은행은 합병을 통해 그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규모보다는 어느 쪽이 시너지를 내고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더 크냐가 중요합니다. 눈덩이가 조그마할 때보다는 커진 상태에서 굴리면 급속하게 불어나듯이, 어떤 수준을 넘어서면 내부 혁신, 분야별 전문화, 인적자원을 봐야지, 자산 규모는 큰 의미가 없어요.”

    -은행 창구직원을 영어로 텔러(teller)라고 하는데, 외국에 가보면 텔러들은 서서 손님을 맞습니다. 한국은 텔러들이 앉아서 근무 하는데요.

    “우리도 ‘빠른 창구’는 일단 서서 손님을 맞습니다. 다른 은행은 모르겠는데 신한은행은 서는 걸 원칙으로 했어요.”

    일본에서는 부동산 버블이 꺼지면서 은행 부실로 이어졌다. 신 행장은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꺼질 때 오사카 지점장으로 부실여신을 정리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신한은행의 아파트 담보인정비율(LTV)은 평가액의 40% 정도. 평가액은 시가와 기준시가의 중간쯤 된다. LTV는 정부에서 규제하기 때문에 모든 은행이 같다.

    -서울 강남 3구(區)의 아파트 가격에 거품이 끼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은행에서 위험관리를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지난해 30% 컨틴전시 플랜(위기상황 비상대책)을 짜놓았어요. 아파트 값이 30% 하락하면 많이 떨어지는 거지만 그 정도까지는 견딜 수 있죠. 지역별로 차이가 커요. 강남과 강북이 다르죠. 수도권과 지방이 다르고. 이러기 때문에 LTV도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어요. 버블이 많은 지역은 더 낮추고, 버블이 적은 지역은 높여야죠.”

    -일본에서 부동산 버블이 터지기 전의 상황과 지금 우리 부동산 시장 상황이 비슷합니까.

    “차이가 있어요. 일본 은행들은 당시 융자해줄 때 이자 납부할 돈까지 줬어요. 은행들이 늘어나는 유동성을 운용하지 못해 그렇게 한 거죠. 거래선 중에서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만 눈에 띄면 부동산을 사라고 권유하고 돈을 빌려줬지요. 자기 돈 한푼 안 들이고 은행돈으로 부동산을 사고팔면서 시세가 마구 오른 거죠.”

    -시중은행들이 복덕방 노릇을 한 거군요.

    “그렇지요. 일본 버블은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1991년에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죠. 도쿄와 오사카의 아파트 값이 10분의 1로 떨어졌습니다. 10%만 떨어져도 요동을 칠 판인데 아예 10분의 1로 떨어진 거죠. 골프장 회원권도 3000만엔짜리가 300만엔, 250만엔으로 떨어졌어요.”

    -그런 버블 붕괴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공장에 대출할 때도 30%는 자기자본을 쓰라고 하지요. 집도 자기자본이 있어야 사지요. 100% 여신 안 해줬잖아요. 대출비율이 감정가액의 70%, 65%였기 때문에 일본 버블하고 우리나라 버블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부동산 물건이 좋으면 금융기관이 부추겨 뻥튀기를 했는데요. 우리 버블은 그런 일본 버블하고는 차이가 있죠. 최근 강남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고 하지만 일본과 같이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최근에는 아파트 시장에 가보지 않았지만 여기도 ‘아줌마 부대’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문제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배석한 배을용 공보팀장이 전세 사는 목동 아파트의 시세가 6억원 정도였는데 몇 달 만에 10억원으로 올랐다고 말했다. 요즘 어딜 가나 집값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들 할말이 많다. 신이 나는 사람도 있고, 땅을 치기도 하고, 속이 쓰린 사람들도 있다.

    “전국적으로 땅값이 오른 건 사실이죠. 강남지역 같은 데는 차별화됐다 해서 더 오른 거 같아요. 그러나 세금으로 부동산을 잡겠다고 한 일이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잖아요. 성공한 것 같지 않습니다. 시장 기능으로 잡아야지요.”

    그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자신은 부동산 전문가가 아니라며 “아파트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두자”고 제동을 걸었다.

    -미국에서도 저금리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요. 우리나라 부동산도 금리만 올리면 간단하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비 위축 같은 다른 부작용 때문에 못하는 거지요. 우리나라도 저금리 시대가 끝나가는 것 같은데, 고금리 시대에는 어느 쪽에 투자해야 유리한가요.

    “경제 상식으로는 고금리시대에는 주식보다는 채권이 낫고, 금리가 오르면 주가가 떨어지지요. JP모건 존 립스키 부회장이 미국도 금리를 계속 올리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이 사람이 오는 9월에 IMF 수석 부총재가 됩니다. IMF 이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높였지만 경기의 경색을 막기 위해서는 다시 올릴 수 없고 오히려 하락할 것이라고 예측했어요. 우리 금리도 미국 금리와 어느 정도 연계돼 나가죠. 금리를 계속 높이다가는 가뜩이나 경기가 안 좋은데 소비가 더 위축될 수 있죠.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10%선의 고금리는 무리이고 이런 말은 없지만 ‘중저(中低)금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중저금리라면 어느 정도인가요.

    “제 생각으로는 7% 이내죠.”

    -한국인의 자산 포트폴리오가 다른 선진국 국민에 비해 부동산에 집중돼 있는 편인가요.

    “신한은행의 프라이빗 뱅크와 VIP 코너 고객들을 조사해보면 부동산으로 재산을 형성한 사람이 많더군요. 상대적으로 주식을 해 돈 번 사람은 적어요. 제가 보기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오히려 중산층이 활발하게 하는 것 같아요.”

    -부동산 불패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되리라고 보는지요.

    “보유세가 오르고 기준시가도 뛰니까 달라지겠죠. 우리 집도 재산세, 보유세가 계속 오르는데 그걸 팔고 어디 가기도 그렇고….”

    신 행장은 용산구 동부이촌동 LG 자이 60평에 산다. 9억원에 샀는데 한강이 내다보이지 않는 뒤쪽이지만, 두 배가량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 자산은 어떻게 운용하고 있습니까.

    “집 빼면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어요. 신한은행 주식 좀 있고….”

    신한은행의 주가는 2001년 말 1만7550원으로 출발해 5월30일 현재 4만4100원이 됐다. 5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151.3% 올랐다. 매년 23% 이상 상승한 셈이다. 그만큼 투자가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한은행에서 파는 펀드 상품 중에서는 어떤 펀드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까.

    “국내 주식시장의 약세로 국내주식형 펀드보다는 해외투자 펀드와 실물자산(원유 광업) 펀드의 인기가 높습니다.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지역에 투자하는 펀드도 괜찮습니다. 정기예금 이상의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는 고객에게는 채권형 펀드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성향에 맞춰 상품을 권하지만 펀드 상품의 특성상 위험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분산투자를 기본으로 합니다. 거액 일시 투자보다는 적립투자를 통한 시간 분산투자, 한 지역 집중 투자보다는 다양한 상품과 지역 분산투자로 위험을 관리하도록 가이드하고 있습니다.”

    신한은행은 해외 주식시장의 호조에 힘입어 올 들어 해외투자 판매가 크게 늘었다. 4월말 현재 펀드상품 판매 수수료로 500억~60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 과거의 노동조합은 생계형이었지만 지금은 권력화했다는 말을 했더군요. 신한은행 노동조합은 어떻습니까. 신한과 조흥은행의 노조 통합은 언제 이뤄집니까.

    그는 “비교적 대화가 잘 통하고 있어요”라며 노동조합 간부가 선물로 들고 온 유리화분을 가리켰다.

    “옛날에는 이런 거 없었잖아요. 금융권은 후생 복리 측면에서 보면 다른 사업장에 비해 월등히 좋습니다. 조합원들도 그걸 다 알고 있습니다. 사용자들이 알아서 잘 해주는 상황이니까요. 구 신한은행과 구 조흥은행 직원들 사이엔 직급간 차이가 있고 후생복지 규정도 다릅니다.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중요합니다. 올해 말까지 노동조합 통합도 이뤄야지요.”

    -금융계에서 정년(58세)을 채우고 퇴직하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요.

    “드물죠. 사회가 그렇게 만드는 거 같아요. 조기 퇴직하는 분위기가 생겨 55세만 되면 나가라고 하잖아요. 그런 분위기가 은행에만 있는 것이 아니죠. IMF 금융위기를 거치며 사회 전반적인 현상이 됐어요.”

    -기업에서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면 정년이 연장될 수 있지 않을까요.

    “좀 민감한 얘기지만 일정한 계급이 되면 임금에 캡(上限)을 씌우는 것이 조직의 발전을 위해 필요합니다. 외국계 은행은 다 그러지 않습니까.”

    -일종의 직급별 임금 피크제라고 할 수 있네요.

    “그렇죠. 어느 정도 이상은 임금이 안 올라가는 거죠. 계속 받을 거 받으면서 오래 있으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죠. 한 직급에서 5, 6년이 되면 승진을 못 하는데도 임금은 계속 올라가지요. 임금 상승의 한계를 그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인건비가 늘어나 배가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아 버려요.

    임금 피크제도 필요하고 직급별로 캡을 씌울 필요도 있어요.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커요. 지금 봉급 깎는다고 하면 난리가 나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해달라고 요구하려면 기존 정규직의 봉급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안 내리려고 하죠. 생산성이 그대로인데 임금만 올라가면 기업이 견딜 수 없습니다.”

    금융계  풍운아 신상훈 통합 신한은행장

    인터뷰 중인 신상훈 통합신한은행장(오른쪽).

    신 행장은 “민감한 내용이어서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는데…”라고 말했다. 신한은행 창구에도 비정규직이 많다. 비정규직은 노조에 가입할 수 없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키우려면 기업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파산해야 해고할 수 있습니다. 외국은 안 그렇잖아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높아지면 비정규직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죠.”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 허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두산이나 현대차그룹에서 보듯 우리 기업들은 투명성이 떨어집니다. 투명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행업에 국내 대기업 자본이 진출해 경영권을 행사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금융시장 전반의 위기상황으로 연결될 소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는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기업의 투명성이 전반적으로 개선되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허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은행은 돈을 만지는 곳이죠. 삶에서 돈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제가 골프에서 내기할 때 우스갯소리로 ‘돈은 잃어도 은행으로 들어오고, 따도 은행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돈에 애착을 갖고 돈을 쫓아다니면 돈이 자꾸 도망갑니다. 관심 없는 것처럼 살아야 돈이 들어오지요. 장사도 그런 거 같아요. 돈 벌려고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은 힘들어하죠. 그냥 취미삼아 시작한 사업이 아주 잘돼서 돈을 모으는 경우를 더러 봤습니다. 역설 같지만 돈을 돈같이 알지 말아야 돈이 자기한테 가까이 옵니다.”

    -은행원이 돈에 관심이 없으면 은행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은행원이 돈에 집착하면 윤리와 투명성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돈을 많이 벌려면 돈을 돌같이 알아야 합니다. 돈을 아무렇게나 취급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돈에 욕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뜻이죠.”

    신 행장은 별명이 ‘저녁 두 번’이다. 외부인과의 모임은 1차로 하고, 사내 사람들과 하는 저녁은 2차에서 합류한다. 저녁만으로는 모자라 조찬으로도 만남 일정을 소화한다. 심리학자 레즈란은 ‘오찬 기법(luncheon technique)’ 실험을 통해 식사하며 접촉한 사람이나 대상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녁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납니까.

    “대개 거래 손님을 만나죠. 전문가나 학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 조언을 들을 때도 있죠. 황 위원처럼 언론사 분들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저는 주로 듣습니다.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 직원들도 만나죠. 주요 부서를 돌아가면서 식사하죠. 부채꼴로 사람이 쭉 퍼져 있다면 한 바퀴 돌아 다시 만나는 데 1년 걸리잖아요. 넥타이도 1년에 한 번도 안 매는 것은 뽑아서 내놓아야 하지 않습니까. 수첩, 전화번호부에 보면 1년 동안 통화를 한 번도 안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빼고 새로운 사람을 집어넣어야죠. 그렇게 인간관계 구조조정을 해도 사람 만나는 일정이 빡빡해요.”

    -CEO에게도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말 같아요. 직원과 고객의 마음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이 있으면 말해주겠습니까.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서번트(servant)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도 서번트 리더십에 대해 강조하는데 저도 동감입니다. 솔선수범하고 자기를 굽혀서 임하는 자세가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신한은행 본부의 간부들한테도 ‘본부에 있다고 영업점 직원들한테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봉사하고 지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조직의 리더는 어떻게 하면 아랫사람이 편하게 일할 수 있는지, 또 즐거울지에 대해 늘 고심해야 합니다.

    신한은행 문화가 영업점 우선이라는 얘기를 했잖아요. 조흥하고 다른 점이죠. 조흥은행은 본점 위주로 경영하며 본점의 정책을 따라오라고 하는 식이었죠. 신한은 영업점에 우선 지원합니다.

    어쨌든 서번트 리더십은 환경이 급변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가는 시대 분위기에서 효과가 있습니다. 저는 ‘스타’가 아니라서 더 그렇습니다. 스타 소질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안 해도 되겠지요.”

    -저녁 자리를 두 번씩 옮기다 보면 술을 많이 들게 되잖아요. 폭탄주는 몇 잔까지 합니까.

    “정신 차리고 먹으면 좀 먹지만…. 다음날 영향이 있으니까 되도록 조금 먹고 분위기만 맞추려 해요. 나이가 있는데 너무 마셔 일 못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처음처럼’을 좌우명으로 삼은 이유는.

    “대개 사람들이 어떤 직책을 받을 때는 무척 고마워하다가 임기가 돼 그만둘 때는 자기 공로를 인정 안 해주고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서운해하죠. 받을 때나 나갈 때나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임해야죠. 처음에 임명장을 받을 때의 자세를 항상 유지하자는 것이죠.

    오늘 어느 신입행원한테서 e메일이 왔어요. 평촌지점 직원인데 처음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는데 4개월 정도 근무하니까 화도 나고, 내가 여기를 왜 들어왔나 하는 후회가 생겼다는 거예요. 하루하루 손님 대하기도 싫었다고 해요. 그런데 점프 프로그램 교육을 받고 나서 다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하더군요. ‘초심대로 다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어요. e메일을 받고 격려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안 됐어요.”

    -어떤 책을 주로 읽습니까. 꼭 경영학 관련 서적이 아니더라도….

    “최근에는 이순신과 정조대왕에 관련된 책을 좀 읽었고요. 역사책을 좋아합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사카모토 료마의 책을 즐겨 읽었죠.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사람이죠. 그런 책들은 어떤 자리에서도 인용하기가 좋죠. 김훈의 ‘칼의 노래’도 재밌게 읽었어요. 경영에 관한 것으로는 잭 웰치 전 GE 회장의 책을 좋아합니다.”

    GE는 1896년 미국의 다우(DOW)공업지수가 처음 계산됐을 때 포함된 기업 중에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기업이다. 잭 웰치가 이끈 지난 20년간이 100여 년에 걸친 GE의 역사에서 혁혁한 변화와 성장을 주도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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